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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에세이

각주: 밀려난 자리

2023-11-18 저자: 구구 출판사: TINN

🔖 책갈피

5 이제 내 다음 소망은 이 책을 읽은 당신이 오래 마음에 품어온 작은 이야기를 중요한 위치에 올려두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9 명확함을 규정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일을 ‘믿지 못할 이야기’로 속단한다. 속단 당한 사람들은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저 끝으로 밀려난다. 그들이 돌아올 제자리는 없으므로 그들은 영영 바깥에서 중심을 흠모하며 때를 기다린다. 나의 이야기를 믿어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를. 하지만 이 세계의 명확함 분멸 박사들에 따르면 지어낸 이야기를 지껄이는 불명확한 존재들에게 그 ‘때’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 증명해야만, 박사들에게 증거를 내보여야만 이야기는 승인받는다.

31 그러나 아무도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문장 하나가 나의 삶 전체를 압도한다.

37 이제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은 사실 모두 가짜다(당신이 원하는 대로). 아니, 사실 모두 진짜다(당신이 원하지 않는 대로).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거주하는 시민들은 자신의 이야기조차 의심한다. 나도 이제 진짜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의심해도 좋다. 어차피 그 누구도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47 사실은,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마음이 정말 비참해지기 때문에 최대한 윤이 나는 사람들 곁에 앉고 싶었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한편으로 나도 언젠가 이들처럼 반짝거리게 될 거라고,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명품관에 가 명품백 하나 사서 바에 앉아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도 있다고 하소연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내게 이런 삶은 곧 도래할 가까운 미래였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불행은 전염되니까, 나는 불행 말고 돈과 성공의 기운을 옮아가고 싶었다.

66 이들에게 거부감이 든다는 건, 이들의 존재가 내가 가진 욕망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떠한 장에서 기득권이 되길 원한다고 느낀다.

93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100 이제 우리는 발각해야 한다. 발각한 다음, 무덤에 묻힌 존재들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적어도 발각된 자 역시 무덤에 묻힐 때까지는, 쉬지 않고, 계속. 우리는 무덤에서 어떠한 이야기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땅을 밟는 일을 멈춰야 한다. 공모자가 되는 일을 멈춰야 한다.

밀려난 자들이 살인자들의 위치에서 동등하게, 큰 목소리로, 이 이야기는 부차적이거나 중요하지 않다거나 대의에 밀려 후순위에 머물러야 한다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말에 대항하며 살아남아야 한다. 적어도 이야기만큼은 묻히지 않아야 한다.

  • 권력을 가진 수많은 자들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