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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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왜 우리가 ‘타자의 고통’에 섣불리 공감하기보다 고통을 겪는 타자의 공간에 침범하는 걸 더 조심해야 하는지, 왜 우리의 얄팍한 이해력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할 때’가 아니라 ‘다 아는 척할 때’ 더 나빠지는지.
- 김지수(기자, <김지구싀 인터스텔라> 연재)
들어가며 | 고통을 보여주는 일
16 매체가 고통의 스펙터클에 일정 분량의 시간을 할애하기를 애호한 게 먼저였는지, 대중이 뉴스 안에서 일정한 양 이상의 고통을 보기를 원한 게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분야에서건 수요와 공급은 서로를 북돋고 창출해 낸다. 무엇이 먼저였든, 언론은 오늘도 안방의 브라운관 앞까지, 손안의 스마트폰 화면 앞까지 고통을 질질 끌어다 놓는다.
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24-25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 실시간으로 참사가 벌어지던 때,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검색하던 사람들이 피할 수 없었던 ‘불편한’ 이미지들은 무엇을 보여준걸까?
33 현실의 모든 저널리즘이 이 전제에 충실하지는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저널리즘은 진실을 전달하고 정보와 지식을 널리 공유하여 사람들이 더 나은 판단을 하도록,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믿는다.
34-35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알려져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슬픔은 많은 이유 중 하나이지 전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만일 슬픔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매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슬픔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사회적 실패에서 오고, 공공영역의 오류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목격한 장면이 구경거리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 대화는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36 그러므로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급한 진단의 호용과 오용을 잊지 않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를. 때로 대중이 활용하는 기술은 부당할 정도로 쉽게 공격받는다. 인터넷에서 간단히 볼 수 있는 큰 단위의 숫자만으로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행동했다는 효능감을 느끼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좋아요’와 ‘리트윗’ 같은 대중화된 기술의 효과를 괄시하거나 폄하할 필요 역시 없다.
56 내 경우엔 어떤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그 얼굴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61 대중은 벌을 주고 싶어한다. 얼굴을 보고, 이름을 알고, 망신을 주고, 그에게 사회적 죽음을 선고하고 싶어 한다. 얼굴과 이름을 광장에 매달아 놓는 방식으로라도 사법 테투리 밖에서 한 번 더 징벌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얼굴을 ‘까는’ 일은 단죄다. 대중은 앞으로 일어날 재판에서 정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기엔 좋지 못한 전례를 지나치게 많이 안다.
71 개인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방향을 틀어야 한다. 범죄가 일어나도록 방조하는 사회 구조와 가벼운 처벌을 일삼는 사법 시스템을 가리켜야 한다.
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77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만, 실은 차별 없음과 거리가 멀다. 날씨가 몰고 오는 위험함과 불쾌함은 일정 부분 값비싼 주거 환경이나 적절한 냉난방 시설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니 날씨로 인해가장 먼저 취약해지는 건 약자들이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그리고 노인.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야 하겠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날씨 뉴스는 경제적 약자나 건강 약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도 뉴스 가치를 더하게 된다.
94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101 우리가 보이는 고통을 수집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이 몇 개인지를 헤아려 본다.
112 뉴스는 시의적절한 슬픔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아득히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피해자들은 잊혀도 되는 것일까.
118 공동 생활 공간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미화원들은 아파트의 필수 인력이지만, 그 중요도에 비해 고용 조건이 열악하다. 미화원들은 대개 아파트 관리 업체와 용역 계약을 한 회사가 보낸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다.
120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124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쳐져야 하는 건 보이는 인프라나 환경만이 아니라 이들을 어둑한 땅속으로 밀어넣고서 깐깐한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노동과 쉼을 고작 자신의 눈에 띈 장면만으로 평가하는 무례함이다.
133 할머니의 기부의 본질 안에는 자신을 스쳐가는 돈을 쥐고 있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기본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그녀의 ‘형편’을 보여주는 대신 그녀가 가진 기부의 철학에 대해 더 많이 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주는 마음에 앞서 가진 게 거의 없다는 조건들을 상세히 따지고 나서야 감동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일까?
136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145 전쟁의 스펙터클을 보도의 재료로 하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수신자인 당신과 생각보다 얼마나 가까운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닮음은 그 간극을 메우는 도구다.
독자의 쉬운 이해와 더 순조로운 공감을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거의 다 동원한다고 볼 수 있는 뉴스에서, 닮음이 등장하는 맥락은 이러하다. 바꿔 말하면 앞서 언급된 저널리즘의 실패 사례들은 놀랍게도, 어느 정도는 무관심을 비집고 잘 전달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불행히도 ‘닮음-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닮지 않음-다름-그들’이라는 대조항을 소환한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엄호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편으로 몰아낸다. 더러움과 추함, 폭력과 불행을 우리 바깥으로 쓸어낸다.
151 세상은 어쩌면 끝없는 편파와 편파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에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논리 구조를 세워 더 많은 연민을 끌어모으는 사람이 이기는 투쟁의 현장인지도 몰랐다.
154 개인을 잠시 내려두고 보편이라는 관점을 택하는, 그리고 닮음이라는 틀에서 훌쩍 벗어나 저 멀리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상상한다. 나 이상의 테두리를 감각하고, 나의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욱 큰 사회가 있음을 인지하고, 지구 공동체 안의 시민으로서, 인류의 일부로서 어떤 고통과 어떤 뉴스를 더 큰 ‘우리’의 우선순위로 놓고 해결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
155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고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161 걸려 넘어지는 부분은 늘 비슷한 지점이다. 우리는 사회 변화의 수단으로 고통을 전시하고, 그 전시를 위해 피해자를 설득할 때가 있다. 어떤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이슈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일 자체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를 위해 개인인 피해자들이 맡아야 하는 역할에 의심이 드는 것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적 담론장 안으로 가져오고 여러 매체 앞에서 비슷한 말을 증언하는 노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며 지쳐가는 일이 대체로 ‘더 낭느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대한 논리 속에서 지나치게 쉽게 합리화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떨쳐내기 어려워서다.
162 그 모든 과정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 정작 피해자 본인이 포함되지 못한 채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167 피해자의 고통을 보도록 하는 일이, 세상의 눈에 띄는 고통을 반복하고 늘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언어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
나는 보여주기를 옹호한 쪽이었고, 마지막 편집본에 결국 그 영상을 넣었다. 반복적으로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러운 건 당연하지만, 한 이야기를 생산해 낼 때 시청자가 그 영상에 어느 정도 노출된 사람인지 가늠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보는 사람들의 고통보다도, 그 영상 안에 담긴 선연한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더 어려워서였다. 한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 일, 고통을 겪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의 불편감부터 배려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반드시 게으른 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영상을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하는 이유가 향하는 주어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172 고통이 얼굴을 갖자 감응하기 쉬워졌다.
174 독자에게 배달해야 하는 고통이 아주 낯선 것일 때, 어떻게 친숙하게 만들어서 연민과 공감이라는 목적지에 닿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 앞에서 나 역시 자주 넘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사정거리를 벗어나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타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전할 때, 고통에 대한 독자의 접근성과 친밀도를 친절히 고려하는 시도는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처럼 보이기도 했다.
175 어째서 타국의 시련을 전달할 때는 고통의 현지화가 필요한지.
176 하나의 고통을 온전히 빨아들이기 어려울 때, 그 빈자리에 죄책감이 들어찼다.
193-194 뉴스 가치, 즉 언론사가 뉴스를 만드는 기준은 시청자의 흥미와 관심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생각할 때, 이는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연결되어 있다. 한국은 국토가 대단히 좁고, 지역 간 거리가 가까운 편이지만 수도권 사람들이 지역을 인식하는 ‘거리감’만큼은 대단히 멀다고도 할 수 있다.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한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196 중앙 언론이 지역을 비춰온 방식에는 지역을 부정적으로 타자화하는 시선이 묻어있다. ‘그런 특성을 야기하는 사회·환경적 맥락’을 감추는 방식으로 서울의 뉴스가 지역을 재현하는 한, 지역 소멸을 짐짓 걱정하는 듯 말하면서도 진정한 지역 소멸의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201 언론이 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한 요소를 통해 발각되곤 하지만, 어떠한 어휘를 선택하는가는 그중에서도 언론의 시각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잣대다.
202 오랫동안 고쳐지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사회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도할 것인지가 매우 의도적인 선택이며, 맥락이 있는 사건에서 맥락을 도려낸 채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공평한 비율’로 나열하는 건 실상 중립과 거리가 멀다.
207 그러나 사회적 갈등의 효용은 매우 분명하다. 구조적인 오류를 수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다. 억압의 맥락을 자른 보도는 억압을 재생산하고 기존 질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곤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맥락을 제거한 채 화해를 강요하는 일이 아니라, 지워진 맥락을 복구하는 작업이다. 또한 김지수 기자가 말했듯 “갈등의 맥락을 재배치해 더 나은 언어를 설계”하는 일이다. 갈등이 있다고 외치기보다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223 많은 경우 언어와 기술, 자원은 동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자신의 고통을 더 잘 말할 수 있는 계층과 계급, 무리가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고통을 잘 말한다는 그러니, 때론 부족한 자원을 두고 벌이는 각축전에서 우위를 점하게 하는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224 나는 다시 저울을 들고서, 보여줌의 효용성과 유해성 사이에서 취해야 할 균형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게 된다.
224 뉴스라는 텍스트는 무엇을 유도해야 할까. 기자는 사진과 영상, 글을 통해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나란하게 독해해 주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했고,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인지 말이다. 감춤이 없어야 하고, 맥락을 읽어야 하고, 불편부당한 정보를 줘야 한다. 뉴스는 세계의 수수께끼들을 보여주지만, 모든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불완전한 매체다. 단순히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기자와 시청자 둘 다에게 쥐어져 있다.
235 단순히 매체들이 조회 수 장사에만 혈안이 되어있고 극히 비윤리적이라서가 아니다. 이 경향은 영향력을 확장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매체의 욕망,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효과적인 뉴스를 만들겠다는 기자의 선한 다짐들과도 분리하기 어렵다.
252 “(…) 요즘의 정체성 정치가 제한하는 어떤 가능성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때가 많아. 만일 네가 동양인 여성만을 취재하고 내가 백인 남성만을 취재할 수 있다면 그건 너무나 지루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세계 아닐까?”
그의 말을 이해한다. 하지만 어떠한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그 불안한 아득함을 그저 인정하고, 타인에게서 온 이야기를 세계에 펼칠 수 있는 자격과 적합성에 대해 고민하고 반추하는 게 좀 더 정직한 저널리즘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접기 어려웠다.
261 상실과 슬픔, 우울과 기억의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새로 쓰려고 한다. 같은 이름의 다음 고통을 막기 위해. 이들의 선한 의도는 언론이 좋아하는 영웅담의소재가 되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오랫동안 바라봐야 하는 건 그들이 나눠주고 이식해 준 기억 자체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슬퍼하려면 기억을 나누어야 하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래 슬퍼하려면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262 공적인 애도에 대해 적으려면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야기가 때론 이야기에 불과하고, 지나치게 매끈히 다듬어진 이야기는 오히려 해체가 필요할지도 모르며,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위험성을 또렷이 기억하면서.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서, 이해로 마음을 집어넣는 일이 쉬워지면, 슬픔을 나눈 공동체를 상상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