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책 > 에세이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2023-05-07 저자: 하재영 출판사: 휴머니스트출판그룹

🔖 책갈피

서문. 필연적 오독, 불가능한 재현, 예정된 실패

7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여성-엄마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나의 엄마로 ‘태어난‘ 것처럼,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엄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여겼다. 이 글은 엄마에 대한 모름을 앎으로 바꾸기 위해 시작되었다.

9 남편의 출세도, 자녀의 교육도 아내-엄마의 노력 여하에 따른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엄마는 그 일을 자신의 실패로, 치부로, 부끄러움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우리는 불운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사람의 진실은 바로 그런 이야기 속에, 또는 그런 이야기 너머에 있다고 믿는다.

9-10 나의 해석은 한 사람 속으로 ’들어감‘이고 ’물러남‘이다.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엄마의 감정으로 느끼려고 그녀의 내적 논리와 존재 방식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들어감‘은 나의 상상 속에서 엄마의 삶을 다시 살아내려는 시도였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삶을 텍스트로 삼아 독해하고 ’물러나려‘ 했다. ’물러남‘은 엄마의 이야기를 전기화하고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노력이었다. 엄마의 축약된 일대기에 나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엄마의 삶을 전편으로, 나의 삶을 후편으로 구성함으로써 내가 엄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강력한 연관성으로 이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우리가 다른 삶을 살았고 살고자 했음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10 글쓰기의 본질은 불가능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시도‘하는 일이라 믿는다.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은 글을 쓰면서 품게 된 꿈이다.

12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고,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13 훌륭하고 위대한 작가는 구태가 된 기득권과, 오염된 정치와, 뿌리 깊은 편견과, 청산되지 않은 역사와 쑨다. 그러나 범박하고 미욱한 나는 그저 자신과 싸운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과, 자기 검열과, 자기 불신과 싸운다. 이 ‘사적’인 싸움에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딸들이 그렇듯 나는 분열된 자아를 대면해야 했다.

14-15 이야기는 단지 우리의 과거, 경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이거나 해방일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나 자신이 된다. 내가 엄마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엄마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 “나 자신으로 살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엄마가 자기 삶의 저자가 되는 ‘사건’이었다

첫 번째 앨범. 평범한 여자아이 되기

아내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닌

24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차근차근 배우면서 잘하는 거지. 배움의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서투름을 감당하지 않은 대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거야. 어리석고 어리석지.

27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말에 의문이 들긴 해. 얌전하고 조신한 게 미덕일까? 착하다는 건 나의 의지가 아닌 남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성실은 언제나 좋은 걸까? 나는 칭찬받는 학생이 되려고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믿어버렸던 것 같아.

아무것도 나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34 엄마에게 여성의 일생이란, 특별한 사람으로 고독하게 지내는 삶과 평범한 사람으로 원만하게 지내는 삶으로 이분되어 있었고,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후자가 더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

38 기성 체제에 반기를 든 여성은 같은 여성에게조차 외면당했고, 사회적으로 단죄되거나 고립되었다. 평범함과 행복함을 나란히 놓는 사고방식에는 아펏가는 여성은 미치거나 죽는다는 소위 ‘나혜석 콤플렉스’가 여전히 자리하는 듯하다.

39 ‘평범하지 않음’은 ‘특별함’이나 ‘비범함’일 수도 있고, ‘비보편성’이나 ‘소수성’일 수도 있다. 딸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선구적이고 투쟁적인 살마으로서 질투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소수자로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듯하다. 평범해지고 싶은 소망, 혹은 스스로가 평범하다는 믿음의 기저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삶에 대한 갈망, 정상성과 표준성에 대한 강박, 비주류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혐오가 자리하는지 모른다.

40 두 언어 사이에 반복되는 ”어느 편에도 치우지지 않“음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아니라 기울어진 상태를 방관하는 것, 기존 질서에 가담함으로써 기울기를 더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43 더 평범해지고 덜 미움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가 잃은 것에 대해, 평범함이라는 언어가 소외시키거나 배제하는 정체성에 대해, 존중받지 못한 개별성에 대해, 모두가 같거나 비슷해지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낯선 존재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에 대해. 이제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평범함이 곧 행복함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결국 아무도, 아무것도 나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실어의 시간을 경유해 다른 목소리로

있지만 없는 사람

64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어. 시집살이하면서 선택권도, 결정권도 없었지만 내 정신만은 지킬 줄 알았지.

65 할머니와 아빠가 정말 좋은 사람들이잖아. 바르고 선량한 사람들이지.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살아도 집안에서 내 위치가 그랬어. 대소사에 관여할 수도 없고, 상의할 상대도 아니고, 중요한 결정에 의견을 말할 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66 하지만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직업이 하나 있는데 배우야. 화려한 스타여서가 아니라 무대 위나 카메라 앞에서나마 다양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어서. (…)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배우가 되고 싶어. 나는 상인이었다가 농부였다가 군인이었다가 정치인이었다가 예술가일 거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모두이면서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겠지.

오래된 이야기를 거부하는 여자가 될 것인가, 오래된 이야기 속의 ‘그 여자’가 될 것인가?

68-69 (여전히 결혼식이나 상갓집에서 남성은 양장 차림을 하고 여성은 한복을 입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을 근대화에서 제외하여 영원히 전통 속에 머물게 하려는 압박이 아닌가?)

70-71 나는 왜 아빠를 사랑의 주체로, 엄마를 사랑의 객체로 생각했을까? 엄마가 사랑과 결혼에 주체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러나 엄마는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로서 사랑을 갈구하지도,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도, 자기 연민에 허덕이지도 않았다. 아빠가 엄마에게 무심한 것 이상으로 엄마도 아빠에게 무심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엄마가 아빠에게 살아받지 못한다는 데 안달했을까?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어린아이가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나만의 일이었을까? 나는 ‘타고난’ 성차별주의자인가?

72 내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거부하는 여자가 되든지, 오래된 이야기 속의 ‘그 여자’가 되든지.

73 이야기 속의 ‘그 여자’, 괴물 같은 여자의 반대편에 있는 ‘천사 같은 여자’, 한마디로 ‘남성-사회가 욕망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안전한 방식이라고.

74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안전한 방식은 없다. 더욱이 ‘남성-사회가 욕망하는 여성이 되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에 내던지는 일에 가깝다.

81 나의 언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나를 위한 언어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를 지배하고 압제하는 언어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라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81 결국 엄마가 포기한 것은 목소리가 아닐까? 목소리는 자신의 고유함을 설명하는 도구이다. 내가 나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하는 일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도 목소리다. “있어도 없 사람”의 핵심은 목소리 없는 존재, 침묵하는 자 또는 실어하는 자이다.

82 목소리를 제거(당)함. 이것은 가부장제가 초래하는 부정적 측면 가운데 하나다. 목소리를 빼앗음으로써 세상이나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충돌하게 만든다.

82 지금까지 들어온대로 말하지 않기, 다수의 사람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않기, 내재된 가부장제의 언어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기. 이것은 목소리들의 싸움이다.

84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나약함을 통제당하지만, 캐럴 길리건이 간파했다시피 “한때 여성의 것이었던 연약함은 인간의 트겅”이다. 약함은 여성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다.

84 내가 실어의 시간을 경유해 다른 목소리로 말했을 때 나는 절친했던 몇몇 사람과 멀어졌다. 그것은 목소리와 불화의 상관관계를, 한 집안과 사회가 소수자의 목소를 차단함으로써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존 체제는 약자의 침묵으로 고요한 평화를 유지한다. 미투 운동의 정국에서 소환된 뮤리얼 루카이저의 저 시구처럼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므로.”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모순이 있다

너를 다시 키운다면

92 여자에게 불리하거나 위험한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 성별로 한계를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너희가 딸이라서 ‘걱정’스러웠고 늘 ‘조심’시켰지.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것 같아.

입 안에 갇힌 말과 패배한 몸

119 솔닛의 말처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소멸을 여러 방식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요구, 자리를 덜 차지하라는 요구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라는 요구이자 소멸하라는 요구이다. ‘목소리’가 없는 존재는 다른 말로 ‘자리’가 없는 존재다. 몸에 관해서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다.

121 기준에 미달하는 말과 몸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도달하려는 마음에 저항해야 했다.

124 엄마에게 증오를 표출하고 책임을 전가하느라 나와 엄마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그 세계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과 차별에 대해 질문하지 못했다.

125 페미니스트 학자이자 작가인 재클린 로즈는 <숭배와 혐오>에서 어머니는 딸리 불리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세상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마음과, 현재의 세상에서도 딸을 무탈하게 키우려면 자녀의 사고와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한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전자는 소망으로 그치는 데 반해 후자는 행위로 나타난다.

131 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지만 나는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침묵할 수도 있다.

132 그렇게 모성은 찬양과 숭배의 대상이거나 처벌과 단죄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고, 이상화되거나 폄하된 채비판적 담론의 바깥에, 비현실성의 영역에 머물렀다. (…) 모성에 덧씌워진 신화를 걷어낼 때 우리는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앨범. 여성의 일에 대한 두 가지 신화

‘스위트홈’이라는 의무

나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155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젊음과 아름다움을 교환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비즈니스다. (…) 심지어 한시성은 이 자원의 가장 위험한 측면도 아니다. 자신의 성취가 실력에서 비롯한 것인지 여성이 스스로 의심하게 맘ㄴ들고, 기회를 잡은 여성이 가십의 소재로 전락하며, 여성이 여성을 적으로 돌리고, 남성 고용자에게 향해야 할 화살이 엉뚱한 표적을 겨냥하며, 그 결과 모든 비난이 여성에게 집중된다는 점이 더 문제적이다.

157 신화는 대체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이 권력 구조에 진입하려는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에는 모성이든, 여성성이든, 아름다움이든, 좌우지간 신화가 필요하다.

165 많은 앎이 그렇듯 ‘벗어남’과 ‘깨어남’은 고통스럽지만, 고통에 비할 수 없는 자유와 해방감을 준다.

다섯 번째 앨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 이름 붙일 수 없는 관계

어머님의 식사

두 명의 갇혀 있는 자

194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알아가면서 나는 공존할 것 같지 않은 감정이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달아갔다. 사랑하면서 미워하기, 미워하면서 사랑하기.

205 이 책(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은 내가 살아온 집들을 통해 집과 여성, 집과 계급, 집과 자아실현 등의 주제를 다루는 동시에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시도”였다. 나는 물리적 장소이자 상징적 자리로서 ‘place’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장소 상실(placeness)’이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생각했다.

207 ‘공간’에 대한 책을 쓰면서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를 떠올렸다는 것은, 집안에서의 권력관계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새삼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씀과 노동일수도, 장소와 장소 상실일 수도 있다. 장소 상실은 한 사람의 자리를 지워버림으로써, 또는 모든 자리에 그 사람이 머물게 함으로써 누군가를 ‘있지만 없는 사람’, ‘부재하는 존재’로 만든다.

208 그러나 가사노동은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귀하거나 천한 일이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인간답게 생활-생존하기 위해 음식을 만들고 더러운 옷을 빨고 먼지를 털어내고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

209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원하는 여성이 있다-많다는 것 역시 핵심이 아니다. ‘그 선택’ 말고 ‘다른 선택’이 가능했느냐가 핵심이다.

210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엄마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전자의 다짐은 엄마가 처했던 현실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후자의 소망은 그 현실에서 고유성을 지키려 애썼던 엄마의 정신을 상속하겠다는 의미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고 단정을 꺼리는 엄마가 “잘 살아왔어. 책임을 저버린 적도 없고, 자존감이 흔들린 적은 있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고,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내면에 집중하며 살아온 이의 긍지다.

나에게 엄마는 낡은 관습을 상징하지 않는다. 타인이 나를 비주체적 인간으로 내모는 상황에서도 주체적 인간이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이의 상징이다

211-212 엄마는 자신의 표현처럼 ‘생각하는 자’, ‘질문하는 자’로 살았다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은 고통스러우나, 엄마는 그렇게 했다. ‘생각하는 자’, ‘질문하는 자’는 곧 ‘성찰하는 자’, 궁극적으로는 ‘성찰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꿈꾸는 자’다. “너희의 좋은 면을 발견할 때 내가 영향을 준 부분도 있을 거라고 믿어.”라는 엄마의 말은 진실이다. 나에게 좋은 면이 있다면 엄마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다.

212 열렬히 읽는 삶이 그녀를 그녀이게 했다면,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사는 한 타인이 나를 훼손해도 나는 훼손당하지 않고, 타인이 나를 모욕해도 나는 모욕당하지 않으며, 타인이 나를 소멸시키려 해도 나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13 “힘든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라는 질문에 “살아가는 거야, 극복하는 게 아니라.”라고 대답하는 엄마에게서 상처를 극복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복의 서사가 승리하는 자, 성공하는 자의 이야기라면 우리의 이야기는 극복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자, 상처에 의해,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여섯 번째 앨범. ‘비존재’의 계보를 기록하기

황혼을 바라볼 때

218 자존감과 책임감으로 살았던 것 같아. 자존감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어떤 일이 생겨도 내가 무너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거라 믿음이 있었다는 거지.

219 책임감도 별다른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거야. (…) 나에게 책임은 자기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견뎌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러나는 마음이었어. 책임에 짓눌려 살았다면 내 삶을 힘들었다고 회상할 거야. 그런데 아니야. ‘아, 나 잘했다.’ 싶어서 만족스럽거든.

235 이제 나는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와는 그랬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어. 내가 슬픈 건 엄마와의 추억이 떠오를 때가 아니야. 추억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을 때야.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몰라. 엄마에 대해 기억나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돌아가셨을 때는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 요즘은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 내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면 누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까? 엄마의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으면 누가 엄마를 기억해줄까?

결여된 이야기

241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이 지나가면 곧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날이 찾아온다. 무기력, 침울함, 과수면 상태로 내던져진다.

250 ‘나이 듦’과 ‘젊지 않은 여성’을 비하하거나 희화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사회에서 노년 세대와 나이 든 여성에 대한 “적절한 대명사”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 것은 이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여전히 주요 담론의 바깥에,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255 ‘감응 가능성’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에게 응답하고 있다는 것’, 혹은 ‘나의 응답을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응답하는 능력’을 뜻한다.

256 어쩌면 엄마가 느끼는 불안에도 생의 대부분을 돌봄의 주체로 살았던 삶이 한순간 돌봄의 대상이 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 우리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날을 상상하며 나는 예비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헤아려보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우리가 끝내 유지해야 하는 감응 가능성, 마지막까지 지속할 관계에 대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