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심은 데 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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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밤이 가장 긴 날, 팥알 같은 옹골찬 용기들을 그러모아 1년을 살아갑니다. 몸과 마음이 춥고 시려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무릎이 꺾여도, 우리 내면에 뿌려둔 ‘나’라는 씨앗이 스스로 자라나 만든 붉고 따스한 힘을 믿습니다. 나를 일으키는 힘은 결국 내가 보내온 시간 안에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나 심은 데 내가 자라니까요.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겨울을 날 때마다 한 뼘씩 자랍니다.
11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뜻한다. 나는 언제나 그 방향을 내 힘으로 만들어 나름의 확신만을 지닌 채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 길의 끝에는 정답 따위 없고, 가는 길에 보이는 내 표정만이 의미가 있다.
친숙하지만 늘 새롭다는 듯이 좋아하고 싶은 마음. 새롭지만 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좋아하고 싶은 마음. 원래도 좋아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 안에서 다시금 미세한 취향이 갈릴 때 느껴지는 이상한 희열이 있다. 나는 매일 무언가를 좋아하기 일상 전문가로서, 취향의 길에서만큼은 노련한 가이드이자 어리숙한 길치 둘 다 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이다.
13 그런데 어째서 팥을 이야기하게 되었냐 하면,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건 어느 정도의 어려움과 곤란함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취향의 가지가 있다면 조금은 어렵고 곤란할때 비로소 자라난다. 물냉면은 어렵거나 곤란하지 않고 언제나 물냉면이 내어주는 시원한 물길에 잠시 온몸을 맡기는 내가 될 뿐이다. 물냉면이 편안한 우정이라면, 팥은 주제도 모르고 넘보고 싶은 사랑이다.
49 둘리 호빵처럼 둥그런 겨울 이야기. 이 추위가 아무리 견디기 힘들어도, 사는 일이 아무렇지 않지 않아 힘이 들어도, 호빵 하나 소중하게 그릇에 담아 먹는 순간들이 존재하기에, 내 삶도 둘리표 비눗방울로 자꾸 다시 들여다보고 싶다.
59 취향 속 취향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이런 순간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를 조금씩 좋아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64 단 음식에 대한 찬사가 ‘안 달다.’인 게 재밌으면서도 이런 적당한 맛을 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단 음식을 만들면서 부러 더 달게 만들지 않는다는 건 아주 멋진 마음이 아닐까 하고. 억지로 더 달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팥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달면 금방 질려버리는 나에게 이 팥소는 매일 먹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81 취향과 입맛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재미를 붙일 때에 비로소 자라나지 않을까.
91 조용한 기운이 멀리 오래 닿는 게 팥의 힘이라면 힘이다.
101 모처럼 잘했다고 생각한 일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을 때, 사람은 주눅이 드는구나.
109 해보는 게 많을수록 보이는 것도 알게 되는 것도 많은 건 당연했다.
141 아무리 친하고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도 오랜만에 만나면 눈을 마주치는 첫 순간엔 다소 긴장감이 감돈다. 아마도 친한 사이라는 것보다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 안에 더욱이 진하게 쓰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긴장감을 조금 좋아하는 편이다.
165 선택지가 많은 세상에서는 더 많은 이가 골고루 행복해진다.
189 순탄해 보이는 사람은 있어도 순탄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좋아 보이기만 해도 모르는 일투성이니까. 다 알고 싶은 만큼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도 힘드니까. 만약 진짜로 순탄하기만 했다면 기꺼이 축하할 일이고.
189 때때로 나도 나를 잊는구나. 나도 나를 매번 다 알지 못하는데 타인은 얼마나 많이 모를 수밖에 없을까 하고.
198 글을 쓰는 일이 즐거운 만큼 어렵다. 어렵다고 느낄 때 비로소 쓰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느낀다. 그렇게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 안에는 점차 ‘좋은 글’이라는 기준이 동그랗게 만들어진다. 우선 나에게 좋은 글, 그리고 누구에게든 외롭지 않게 닿는 글을 쓰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