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농담에 진심

농담에 진심

우리 아빠가 누누이 이야기하셨다. 인생에 통달한 사람만이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고.

2026-05-25 저자: 곽민지 출판사: 어크로스

IMG_3094.jpeg

🔖 책갈피

41 언어는 의식을 지배한다. 우리가 동물의 생사나 처우를 밈으로 활용하면 다른 생명의 삶을 밈으로 경시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셈이 된다. 파리 목숨 취급을 하는 것이다. 정작 파리 역시 함부로 죽이면 안 되는 생명인데도 ‘파리 목숨’이라는 말은 파리를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든다. 살아가면서 모기나 파리를 살충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자주 놓이고 그것을 실행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 살해를 농담 삼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적어도 내가 나의 쾌적을 위해 불가피하게 살해를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지라도 해야 한다.

49 웃기지 않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당시 선배들에게는 그게 없었고 나에게도 없었다. 어떤 약자에게는 웃는 행위보다 웃지 않는 행위가 더 적극적인 액션이어서 거기까지 가기가 그렇게 어렵기도 한 것이다.

58 개그는 권력이다. 안 웃긴데 웃으라 경요할 수 있고,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달려든다고 할 수 있고, 관객의 절반이 불쾌해할 법한데 그 절반의 관객조차 개그의 탄생 배경을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가면처럼 웃게 만드는 일이 희극에서 빈번하기 때문에 권력이다. 어린 시절 내 몸이 그런 일을 겪고도 해당 대사를 직접 재연하고, 내 삶과는 동떨어진 기득권의 욕망에서 생산된 개그를 무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쿨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믿게 한 것도 권력이다.

84 정상성의 다른 이름은 파티 소집권이라는 새로운 교훈과 함께 추후 사업 아이템에 비주류 파티 플ㅐ닝을 하나 더 추가한다.

108 나는 주체적이고, 똑똑하고,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더라도 ‘기특한 외국인’에 머문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래서 늘 친구들 사이에 있어도 가끔은 억울하고 괴로웠다.

119-120 하지만 드라마의 깊은 감동이 사람들의 삶에 갖는 의미와 별개로, 어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느낄 심연에 들어갈 만큼 건강하지 못하기도 하다. 어떤 고통과 슬픔을 대리 경험할 정도의 컨디션을 갖추지 못한 채 또 돌아오는 월요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즉각적인 도파민, 원초적인 웃음, 많이 고민하지 않아도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는 저맥락의 짧은 서사만 간신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웃긴 것만이 콧줄이고 산소마스크다. 그걸 해내는 희극인과 희극 제작진들은 사실상 중증외상센터의 응급의료인이나 마찬가지다. 양질의 식사, 재활, 장기적인 심리상담 단계로 넘어가는 것조차 꿈인 사람들도 있으니까.

135 우리는 서로의 다름과 결핍을 이야기하며 이어온 커뮤니티다.

137 친구들 모두가 좋은 부모님과 화목하게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마음을 터놓은 친구가 적은 것뿐이다. 친구 관계를 돌아보도록 하자.

139 결국 어떤 깊은 관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깊이 박힌 삶의 BGM을 선점하는 일이다. 인생을 뒤흔든 사건도 농담의 소재로 삼을 권리, 그 농담을 듣고 기꺼이 낄낄댈 권리를 서로에게 부여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웃어넘길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울기조차 지친 일 앞에서 할 수 있는 미친 짓이 웃는 것뿐이라면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웃기고 웃어주는 것이다. 이런 웃어넘김은 술 한잔하고 어깨너머로 소주잔을 털어 넘기는 것 같은 넘김이 아니라 거대한 가마니를 한쪽 모서리씩 붙들고 끙-차! 하고 넘기는, 협업으로 대형 쓰레기를 고개 너머로 치우는 행위에 가깝겠다.

141 너의 거대한 슬픔 앞에서도 함께 농담 따먹기 해줄 사람들을 꼭 만나. 그리고 너도 그런 친구가 되렴. 친구의 거대한 슬픔 속에서도 반드시 웃게 할 농담을 찾아낼 수 있는, 그리고 그걸 뱉을 수 있을 만한 자신감과 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확실한 사랑 속에서 웃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거든. 반드시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다른 거대한 슬픔을 웃어넘길 수 있게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