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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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 왜 돌봄에 관해 이야기하는가
4 저는 양육, 교육, 의료, 요양 크게 네 가지 돌봄 영역을 제안합니다.
6 따라서 돌봄 이론가들은 돌봄의 필수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돌봄 노동과 돌봄 제공자에게 부여할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8 좋은 돌봄이란 돌보는 이와 보살핌받는 이 사이에서 교환되는 의지적·정서적 행동으로, 여기에서 돌보는 이는 보살핌받는 이의 소망을 충족하여 그가 피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단 돌봄은 사회 구조 속에서 순환해야 하며 돌보는 이와 보살핌받는 이의 상시적 위치 전환은 함께-돌봄을 요구한다.
들어가며 | 모두가 모두를 돌보기 위하여
15 그렇다면 문제는 이들에게 선택권이 허용되는지가 아니라, 이들에게 제대로 된 돌봄이 주어지고 있는지다. 집에서도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돌봄 체계가 있어야만, 고독하고 가난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리던 관계망과 돌봄 속에서 마지막을 맞을 수 있어야만 ‘집에 가서 죽는’것이 유의미하지 않은가.
26 좋은 돌봄은 관계적이고, 공감과 책임을 요구하며, 주의 집중을 통해 서로의 피어남을 바라고, 구조 속에서 순환하며, 돌보는 이와 보살핌받는 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 돌봄은 모두에게 책임으로 주어지는 실천이다. 단지 각자에게 시기마다 주어지는 돌봄의 과업과 전문성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말한다. 돌봄은 모두의 것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돌봄’이라고.
1장 돌봄은 서로 교환한다
37 첫째, 돌봄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며, 둘째, 우리의 정체성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돌봄이 명확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돌봄의 상호성과 관계적 정체성이야말로 돌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얻을 수 있는 인식이다. 사회는 개인을 독립적인 존재이자 타인과 절연된 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의 안경으로 보면 그런 생각은 틀렸다. 돌봄의 눈으로 본 개인은 個人이 아니다. 그는 타인을 향해 열린 開人이자 여러 관계 사이에 ‘끼어 있는’ 介人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나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왔다.
43 친밀감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안정과 위안을 주는 것이 가족이라면, 유대와 존중에 기초하여 필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상대를 보호하는 것이 간병인이기 때문이다.
49 번팅은 돌봄의 위기를 두 차원으로 이야기한다. 첫째, 사람들은 원하는 돌봄에 접근할 수 없다. (…) 둘째, 보살핌받는 사람도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한다.
57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종종 그 바람은 선을 넘는다. 문제는 이것이다. 돌봄은 어디까지 바랄 수 있는가.
63 그것은 보살핌받는 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통해 그가 더 많은 가능성을 펼 수 있도록 지지와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어는 돌봄을 수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온 돌봄을 능동적으로 취해 자기 삶과 관계를 조직하고 꾸려나가는 것이다. 이제야 리앤과 오어는 돌봄이 상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64 하지만 그렇기에 돌봄은 우리를 기존에 있던 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게 만든다.
⇒ 교환과 이동
73- 돌봄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인간의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돌봄
- 에마뉘엘 레비나스: 나의 있음 전에 타자가 있다
- 조안 트론토: 돌봄은 민주주의다
2장 돌봄은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이다
87 또 타인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일은 정서적·의지적 결정이자 행위이고, 또 돌봄이다. 나는 돌봄을 어떤 정서와 의지의 발현으로 인한 하나의 행위, 특히 다른 생산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생산적 행위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88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는 돌봄에 대한 각기 다른 정의를 내놓았으며, 주로 윤리와 정치의 관점에서 돌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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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헬드, “돌봄 제공의 노동을 포함하는 실천이자 그 실천을 평가할 수 있는 표준”
⇒ 돌봄 제공과 평가에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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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니스 피셔, 조안 트론토 “우리의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며, 수선하기 위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종 특유의 활동으로, 이를 통해 우리가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 우리 삶을 존속시키는 틀을 지켜나가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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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잉스터 “개인이 사회에서 생존하고, 발달하며, 기능하기 위하여 개인의 생물학적 필요를 만족하고, 기본 역량을 개발·유지하며, 불필요하거나 원치 않는 통증과 고통을 피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하는 모든 것”
⇒ 개인이 살 수 있도록 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
90 건강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삶의 목적에 따라 변하는 역동성이며, 건강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100 그는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오직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응답하는가밖에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깨달음이 돌봄의 시간을 구원의 경험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 우리는 돌봄을 통해 성숙할 수 있으며, 그것은 개인과 주변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고.
113 나는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뿐더러 통제하려는 생각이 우리의 중요한 것을 갉아 먹는다고 생각한다.
113-114 삶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든 사회든 신이든 다른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이러한 관점은 겸손, 책임, 연대와 같은 미덕으로 이어지는데,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무언가를 구성하는 이런 하부 요소들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141 이는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다루는, 사려 깊은 접근은 아니다. 그렇다면 복잡한 문제에 복잡하게 접근하는 사려 깊은 대안이 있는가. 그 대안으로 “대화의 윤리”, 또는 관계적 윤리를 살펴보려 한다.
142 좋음과 옳음은 모두 내 손으로 완성된다: ‘독백’의 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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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적 의무론 - 보편규칙이 될 수 있는 자기원칙(준칙)에 따라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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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정언 명령, 로스의 일응의무, 스캔론의 ‘합리적인 사람이 거부할 수 없음’
⇒ 의무 정립, 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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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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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의 쾌락, 밀의 행복, 싱어의 선호
⇒ 행동이 낳을 결과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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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타이어의 덕윤리 - 윤리적 행위자에 집중
- 장점: 구체성에 집중, 복잡성 인정
149 돌봄은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는 대신 돌보는 이와 보살핌받는 이 모두의 성장과 성취를 생각한다. 항상 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돌봄은 모두를 위한 방향을 소망한다.
3장 돌봄은 보살핌받는 이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163 장애는 두 가지 가치를 지닌다. 첫째, 장애는 문제임에도 사회 다수가 문제인지 알지 못하던 지점을 드러낸다. 둘째, 장애는 공동체성을 잊어가는 사회에서 그 회복을 요청하고, 함께함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전자를 장애의 인식론적 가치로, 후자를 장애의 윤리적 가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애는 (타인에게) 불편하다. 다수가 잊으려 하는 것을 공론장으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애는 소중하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일깨움을 나는 발전으로 이해한다. 발전이 삶의 높아짐이라면 앎과 실천을 넓히는 것이야말로 발전이 아닌가.
170 이들은 자립해 있을 때보다 서로 연결되었을 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 연결을 견딤으로써, 그들은 공동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연결과 연합을 우리에게 당위로 제시하기에, 그 연결은 윤리적이다. 자립하는 영웅이라는 20세기의 이상이 가져왔던 많은 고통과 슬픔을, 연립하는 영웅이 치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72 물론 학생들은 질병을 치료하고 장애를 가진 환자를 대하는 의학적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물학적 질병이 개인에게 미치는 경험인 질환을, 신체적·정신적 손상이 사회적 조건과 맞물려 개인에게 강제하는 장애의 우환을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질환과 장애라는 단어에라도 익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강의를 이어간다.
178 치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없어져버린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것들을 애도하고 새로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치유여야 한다.
179 돌봄으로서의 치유는 장애 앞에서 불가해한 희망이나 비장애중심주의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손상된 몸들을 돌보고 보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198-199 첫째 단계는 마음 씀이다. 돌보는 이는 보살핌받는 이의 필요와 요구에 집중해야 한다. 둘째 단계는 떠맡음이다. 보살핌받는 이의 필요와 요구를 알았다면, 돌보는 이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아야 한다. 셋째 단계는 돌봄 수행이다. 책임으로 떠맡았으니, 이제 직접 움직일 때다. 보통 여기까지를 돌봄의 단계라고 생각하지만, 트론토와 피셔는 그다음 단계를 말한다. 바로 수용의 단계다. 보살핌받는 이가 돌보는 이의 돌봄을 돌봄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때에야 돌봄은 완성된다.
199 이것이 돌봄을, 돌봄의 완성을 참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돌봄의 자리를 알려준다. 돌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다. 돌봄은 주고받는 것이며, 양쪽 모두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한쪽이 줄 때, 다른 한쪽은 받는다. 둘 중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돌봄이 아니다.
201 탈시설과 자립은 자기결정권에 기반을 둔 장애인 생활의 보장이며, 그를 위해선 지역사회에 장애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서울시의 조사 결과는 여전히 열악한 우리의 지역사회 환경에 대한 지적이지, 장애인들은 결국 시설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아니다.
219 좋은 돌봄은 보살핌받는 이가 그것을 돌봄으로 인정할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보살핌받는 이가 돌봄을 수용할 수 있는 한편, 돌보는 이가 그 과정에 함께할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약한 후견주의를 따라 돌보는 이가 보살핌받는 이에게 충분한 정보와 진정한 동의 요건을 제공하는 방식, 또는 자유주의적 후견주의를 따라 보살핌받는 이의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결정의 맥락과 상황들을 돌보는 이가 제시하고 조절하며 설득하는 방식, 마지막으로 역능강화를 따라 보살핌받는 이와 함께 지금 주어지는 돌봄을 검토하고 같이 돌봄을 공부하며 서로 이해한 돌봄을 함께 이행해나가는 방식을 그 대안으로 놓고, 구체적인 돌봄 실천의 방식들을 마련해볼 필요가 있다.
4장 돌봄은 피어나게 한다
228 내가 생각하는 피어남의 모습은 해풍을 견디며 뒤틀어진 모습으로 자라난 소나무다. 피어남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과정이고, 그렇게 그늘이 되어 다음 세대가 자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다.
230 돌봄에서 피어남이란 지금의 필요만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상대방의 삶을 검토하는 것을 말한다. 그 돌봄은 결코, 즉각적인 쾌락이나 행복의 달성이 아니다.
235-236 하이트와 루키아노프는 미국의 양육과 교육이 새로운 세대를 나약한 존재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세 가지 비진실’을 심어 그들을 망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첫째, 유약함의 비진실(”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둘째, 감정적 추론의 비진실(”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셋째, ‘우리 대 그들’의 비진실(”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이다.
236-237 이것이 하나의 문화(안전주의)라면 그 출처는 어디인가. 이들은 여섯 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첫째, 정치적 양극화 및 다른 정당에 대한 적개심의 증가, 둘째, 십대의 불안증과 우울증 수준의 증가, 셋째, 양육 방식의 변화, 넷째, 자유 놀이의 감소, 다섯째, 캠패스 관료주의의 성장, 마지막 여섯째, 정의에 대한 고조된 열정이다.
253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인식하고 각자가 노력하지 않는 한, 사회적 고통은 해소되지 않는다.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함께해야 하며, 우리는 그 책임을 나누어서 져야 한다. 그때에만 고통을 함께 상대한다고, 그 고통을 돌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장 돌봄은 구조 속에서 순환한다
337 관계적 인식이란 무엇보다도 내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관계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존재함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것을 “분인 dividual”이라는 독특한 조어로 표현한 바 있다. 히라노는 생각한다. 단일의 진정한 나(개인)는 환상이다. 오히려 여러 사람과 관계하며 나타나는 여러 모습 각각이 모두 진정한 나(분인)이며, 한 사람은 그런 분인들의 조합니다. 문제는 이런 여러 모습이 거짓이고, 어딘가에 진정한 나의 모습이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며 괴로움을 겪는 데 있다. - 히라노 게이치로, <나란 무엇인가>, 이영미 옮김, 21세기 북스, 2015 참조
338 돌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서로의 삶에 관한 깊은 이해, 심지어는 나 자신에 국한된 삶을 넘어 타인의 삶으로 건너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 떨어져 있는 삶들을 연결하여 우리의 연약함들을 견디어낼 때, 그래서 생이 “기쁨의 불꽃을 피워” 낼 때를 나는 피어남이라고 부른다.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이 그러했듯이.
6장 나는 돌보며 돌봄받는다
349 따라서 나는 공감 대신 타인의 고통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즉 민감성이 돌봄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돌보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보살핌받는 이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돌봄은 타인을 향한 민감성을 통해 그의 필요와 욕망을 살피고, 상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실천이어야 한다.
369 대신 중요한 것은 돌봄의 민감성이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의 필요와 요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처지를 직접 경험할 필요는 없으며, 상대방의 상황과 필요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충분하다(그렇기에 나는 서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369 둔감해지지 않기 위하여, 내 방식만이 답이라고 믿고 남들의 필요와 요청 또한 내 방식으로 재단하지 않기 위하여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375-376 따라서 난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우리는 돌보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야 하고, 그에 따라 자기 삶에 돌봄을 들여야 한다. 바로 ‘함께-돌봄’이다.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나 열외가 되지 않는다. 보살핌받는 이 또한 어느 순간에는 다른 이를 돌보기 때문에, 돌보지않아도 되는 이는 없다.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특정 개인을 돌봄에서 면제하고 있다면 그 요소를 바꾸어야 한다. 경제적 상황이 개인의 돌봄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 돈으로 돌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야 한다. 제도적 결정이 개인을 돌봄에서 배제해서도, 돌봄 책임에서 면책해서도 안 된다. 모두 다 돌봄에 참여하고 그리하여 돌봄은 중첩적이고 반복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나가며 | 함께, 좋은 돌봄을, 모든 곳에서
376 둘째, 돌봄 실천 각각은 좋은 돌봄이어야 한다. 앞서 살핀 여섯 가지 좋은 돌봄의 기준, 즉 관계성(둘 사이의 교환), 정서와 의지(정서적·의지적 실천), 주의집중(보살핌받는 이의 필요 충족), 피어남, 구조적 접근, 민감함(돌봄 위치의 전환)이 돌봄의 평가 기준이 되고 이들 요소 각각을 개별 돌봄이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돌봄을 모든 곳에서’라고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