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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복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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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복직합니다

2024-11-05 저자: 박서련 출판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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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갈피

50 사과할 만큼의 잘못이라는 건 벌받을 만큼의 잘못. 사과를 남발하는 사람이라는 건, 벌받는 걸 그만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나는 미안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거고, 이미래가 복수를 결심할 만큼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내가 미움받는 건, 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서 자꾸 사과를 하게 되는 거라고.

60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떠올려보는 감각인 것 같았다. 가족이라 부를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 꾸준한 온난함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행복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쓸쓸해지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할아버지와 상관없는 행복의 감각을 가능한 한 많이 계발하고 싶었다.

69 항상 정직해야 한다, 정직하지 못하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가 불편한 법이야. 생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던 할아버지 탓이었다.

129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확인할 뿐이라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요즘은요,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가 나를 받아주는 거란 생각도 들어요.”

“미래가 나를 받아준다고요?”

“네, 내가 최선을 골라도 최악을 골라도 바뀌지 않을 미래요. 당장의 내 선택으로 인해 미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긴 하겠죠. 그렇지만, 그러면 미래도 최소한의 변화로 내게 몸을 맞춰오려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미래를 선택하려 하지만, 미래는 우리에게 적응하려 해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지만. 말하자면 그게 예언자와 미래의 관계가 아닐까요.”

미래…

“그러니까 예언의 마법소녀로서 내가 맡은 역할은, 미래를 보는 게 아닐 거예요. 미래를 믿고 미래에게 말을 거는 걸 거예요. 부디 우리의 선택을 포용해달라고.”

211 사실 내가 화학공장 사건 피해자들에게 걸었던 마법은 영구적인 장애를 전제한 게 아니었지만, 그 점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면 장애는 무조건 나쁜 거라는 인식을 강화할 수도 있을 듯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나는 다만 나를 조금이라도 보호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했으니까. 비록 나에게 붙은 희생의 마법소녀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는 그대로였지만.

218 꼭 마법소녀가 되어야 한다면, 마법소녀 되기를 피치 못한다면… 기왕 될 거 훌륭한 마법소녀가 되는 게 좋겠지.

할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자랑스러워할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고,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220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 말이 완전한 진심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나로선 따라잡을 수 없는 깊은 배려심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지만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선생님은 정말 어른스럽고 근사하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 자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도 용서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 자세. 진정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자세.

222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껴안는 걸까,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용감한 걸까…


229 옛말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고 했지. 우리 세대는 쥐꼬리만큼 벌어 사람처럼 쓰려 할 뿐이라고 느낀다. 그저 사람만큼 소비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만큼… 가끔은 생존과 무관하지만 그냥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쓰고 싶으니까 부리는 단순한 사치.

경험한바 사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념이다. 예술의 시작이 다름 아닌 잉여였음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현재의 처지 때문에, 이를테면 가난 때문에, 누군가의 시선과 사회적 위신 때문에, 또는 지금이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의 기호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품위가 깃든다고 믿는다. 사치는 예술이 아니지만 예술은 사치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하물며 나의 생업도 사치에 연루되어 있다. 예술이 인류 문명의 사치라면 문학도 그 예외일 수 없으니까. 누군가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과 돈을 소비해 내 책을 읽어주는 덕에 나는 먹고 살고, 남는 돈으로는 생일에 호텔에서 묵고 마법소녀 아이템을 살 수 있는 거다.

그래, 사치는 교환되는 것.

당신의 사치가 나의 사치를 가능하게 하며 나는 내 사치의 기록을 당신이 소비할 사치로 재생산한다. 기부, 수집, 덕질, 멋 부리기, 어떤 형태의 사치라도 그렇다. 우리의 사치는 교환된다.

232 나에게 복직은 은퇴보다는 해고와 상대되는 말이라서. 해고가 살인이라면 복직은 활인이다.

복직의 복자는 회복의 복, 복수의 복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