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필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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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47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낸다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혹은 야심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자책한다. 샤마는 그 시에서 자기 가족의 자좀심을 이카로스에 비유한다. “보라, 우리가 하늘에 너무 가깝게 솟아올랐다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이 우리를 끝장내지 못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며. 오 허세부리지, 너희 생각만큼 나쁠 리는 없으니.”
49 때로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경험을 상대방에게 애써 설명할 필요가 있다.
58 모든 사회적 신호를 박탈당해 나의 행동을 타인과의 관계에 비추어 가늠할 수단이 없으니 유령 취급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았을지, 무슨 말을 하면 좋았을지 내 생각을 샅샅이 점검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자아는 자유 낙하하는데 초자아는 무한대로 커져서, 나라는 존재는 부족하다고, 결코 충분치 못하다고 다그친다. 그러므로 더 잘하고, 더 잘되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하며, 자기 이익이라는 이 나라의 복음성가를 맹목적으로 따라 부르고, 내 순가치를 늘려 내 개인적 가치를 입증해 보이는 짓을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한다.
66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72 나는 자전적인 작품을 쓰는 시인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삶을 농담거리 삼아 썼다는 사실은 내 깊은 곳에 자리한 자기 학대 성향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내 농담을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왕 망하는 거, 내 삶에 관해 농담하면서 장렬하게 망하고 싶었다.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다가 실패하고 싶었다.
84 소수적 감정은 현대 미국문학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 감정이 생존과 자기 결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구성 원리와는 다르게, 소수적 감정은 중대한 변화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의 결여에 의해, 특히 변하지 않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경제 상황에 의해 촉발된다. 소수적 감정을 다루는 문학은 인종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트라우마가 개인을 제자리에 묶어 두는 현상을 탐구한다. 제자리에 묶인다는 것은 “흑인이면서” 테니스를 치고 “흑인이면서” 외식을 하는 것이다.
86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은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다.
101 퀴어 이론가 캐서린 본드 스톡턴은 퀴어 아동이 어떻게 “옆으로(sideways) 자라는지” 적으면서, 퀴어의 삶이 흔히 결혼과 출산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톡턴은 유색 인종 아동 역시 옆으로 자라는데 그들의 어린 시절도 퀴어 아동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백인 아동이라는 모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어린 시절을 옆으로 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면, 어린 소녀가 내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 나의 기억들을 깜박거리는 환상의 그림자놀이로 유도한다.
옆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을 함축한다. “곁눈질”은 의심, 의혹, 심지어 경멸을 암시한다.
108 번스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종적 서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집요하게 상기당하고 그 위치 때문에 심지어 범죄자가 되면 순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농담한 대로다. “나는 여덟 살 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
109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 - 또는 가해자 - 로서 점하는 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나는 개들이 목에 두르는 수치의 깔때기이다. 나는 남자 소변기에 부착하는 수치의 변기 탈취제다. 이 감정이 내 정체성을 갉아먹어 결국 몸은 껍데기만 남고 나는 하얗게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로 화한다.
111 영어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살짝만 잘못 디뎌도 내 존재가 노출되는 투명한 인계철선을 쳐두고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언어였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열심히 경청하는 학급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를 말했고, 나는 그것을 “나가”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갑자기 선생님이 밖으로 따라 나와서 벌게진 얼굴로 나를 야단치고 다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수치심은 나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사르트르가 쓴 대로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다 자란 지금에야 나는 어렸던 내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불복종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양반다리를 하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에 열중하는 여섯 살짜리들에게 교사가 책을 읽어주는데 얌전하고 어린 아시아 소녀가 난데없이 이야기 중간에 태연하게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간다. 이듬해, 그 얌전하고 어린 아시아 소녀는 포르노 티셔츠를 입고 등교한다.
111-112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2 그러나 인종적 트라우마는 누가 앞서고 뒤지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문제는 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이례적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 전형적이었다는 데 있다.
113 그러나 이 기억의 촉발은 꼭 특정한 인종차별 사건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되살린다. 한 오라기의 두려움과 수치심, 동물처럼 바짝 긴장한 경계심 같은 것 말이다. 순수한 상태로 향수에 젖어 회귀하는 것이든 불안과 걱정을 갑작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든 간에, 어린 시절은 하나의 정신 상태다. 어린 날의 순수가 보호받고 위안받을 때의 정신 상태라면, 어린 날의 불안은 그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보호받고 위안받는다고 느낄 때의 정신 상태다.
120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에 대한 반격으로 흔히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라는 구호에도 저들의 망상이 암묵적으로 내재해 있다. “모든 사람”(all)은 포용적이라기보다 방벽을 둘러친 대명사, 즉 “그것을 인종 문제로 만들지 못하도록 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백인성의 헤게모니가 도전받지 않고 지속되게끔 하는 방어 장치이다.
136 예술적 타자화는 문화적 건실성과 다양성 증진의 기반인 혁신, 발명, 변화와 관계 있다. 사회적 타자화는 권력, 배제, 특권과 관계 있다. 즉 한 명사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자성을 측정, 배분, 주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예속되는 사람들에 의한 전자의 실천에 초점을 둔다.
142-143 영화감독 트린 T. 민하는 내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제안한다.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트린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에 관해 말하기보다 근처에서 말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과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는 거죠. 그리하여 당신이 대상자와 아주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신하거나, 그위에 군림하여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근처에서, 즉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며(그 타자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든 부재하든), 그러려면 의미 규정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의미가 간단히 봉쇄되지 않게 하고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자가 그리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접근 방식은 양자 모두에게 자유를 주며,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이 방식의 강력한 윤리적 견지를 알아본 영화인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자의 위치를 점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전지전능의 주장과 지식의 위계에 따라 생성되는 무수한 판단 기준으로부터 당신은 사실상 자유로워집니다.
149 예술은 이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잠시라도 꿈꾸는 일이다. 그렇지만 소셜미디어가 그런 비밀스러운 유토피아를 거의 즉시 뿌리 뽑아 표면에 드러내고 첨단기술 기업의 알고리즘이 예술과 시가 공유되는 영역을 감독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감춰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156 한편으로는 그 순간에 내가 미술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렬하게 의식했던 까닭에, 미술가로서의 내 정체성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160 예술작품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술가의 행위뿐이다. 문제는 예술가의 규칙 위반을 역사가 “예술”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 예술가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흑인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뺑소니치고도 교묘히 넘어가는 사립학교 부잣집 아이처럼, 교묘히 넘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악동 예술가가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다. 규칙을 위반하는 악동 예술은 사실 가장 위험 회피적이며, 돈 있는 수집가라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무한 반복되는 재탕 묘기이다.
174 나는 재능과 더불어 옛날식으로 땀을 쏟는 노력이 있으면 그것이 작품의 성공과 비례한다고만 믿었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작품이 좋은지는 내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좋게 평가해줘야 하는데, 그들이 무엇을 좋게 평가하느냐는 작품 그 자체와는 거의 무관했고, 그보다는 연출, 타이밍, 운, 그리고 내가 미술가로서 어떻게 처신하느냐와 같은 요소들이 합쳐져서 작용했다. 결국 나는 시큰둥하고 따분해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법을 배웠다. 내 코르덴 작업복은 점점 더러워졌고 머리도 안 감았다. 진지한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싸구려 신문지 지면에다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선을 그어댔더니, 마침내 아테나가 내 드로잉을 인정해주었다.
190 교수는 어떻게 해서 시형(poetic form)이라는 회로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해 충전되는지 논했다. 시라는 것은 완벽하게 형성된 구절보다는 더듬거림, 주저함을 잡아내는 그물이라고 했다.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심문이라고 했다.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유대계 시인으로서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한 파울 첼란의 경우 “그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의 불가능성과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단을 찾는 작업 사이에서 방향을 잡아갔다”라고 킴은 설명했다.
명미 킴은 백인 시인의 말투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백인 청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내 체험을 “통역할” 필요도 없다고 내게 말해준 최초의 시인이었다. 그 후 다른 어떤 멘토도 명미 킴만큼 그런 생각을 단호하게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판독하기 어렵게 쓰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전에도 아시아인으로서 겪는 체험에 관해 쓰라는 독려를 받긴 했으나 여전히 백인 시인이 쓰는 식으로 썼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백인 시인을 흉내내는 대신 백인 시인이 아시아 시인은 이럴 거라고 상상하며 흉내 내는 방식을 흉내 냈다. 킴이 내 시를 처음 읽고 말했다. “왜 다른 사람의 말투를 모방하죠?” 내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킴이 말했다. “언어에 관한 최초의 기억이 무엇이었나요? 그 기억을 시로 써보세요.”
194 나는 헬렌에게 내 시를 한동안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나 열심히 비공개로 유지했던 것은 그 시들을 나의 사적인 자존의 신전 속에 잘 간직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자신감이 얼마나 순식간에 자기 회의로 전락할 수 있는지, 내 시가 얼마나 순식간에 찬란한 광륜에서 구정물 튄 종이 쪼가리로 둔갑할 수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헬렌에게 시를 안 보여준 이유는 나도 잘 몰랐다. 내가 그 애의 평가를 두려워한 것은 맞다. 내 시가 헬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어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그러나 헬렌이 내 삶에서 그만큼이나 지배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내 시에 그 애의 흔적이 없기를 바랐다. 시는 나의 영역이고 내 것이었다.
203 그때 우리는 경력을 쌓는 모든 단계에서 매번 과소평가 당했기 때문에 각자 능력을 되풀이해서 증명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전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우정으로 배양된 창의적 상상력에 꾸준히 충실할 수 있었으며, 그 상상력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의식의 진실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엄밀성과 깊이에 의해 다듬어졌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예술가가 되라고 촉구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우리였다.
211 혹시 영어가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는 그게 확실히 문젯거리였다. 영어는 단조여야 할 체험을 장조로 바꾸어놓았다. 영어로 써놓으면 한국어에 서린 친밀감과 우수가 사라졌다. 영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세관 직원, 위협적인 교사, 홀마크 카드와 연관 짓던 언어였다. 영어를 배운 지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어도 영어로 글을 쓰려면 아직도 빈칸 채우기를 하거나 남의 원문을 재인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어는 자신의 언어가 아니고, 자신의 의식을 결코 진정으로 반영할 수 없고, 하나의 표현 형식인 만큼이나 자신의 의식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것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차가 구사한 언어는 나의 언어였다.
213 고통을 명명하면, 일어났던 일에서 아픔이 덜어지고, 한계가 그어지고, 그 일을 감당하고 심지어 소멸까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나는 마치 말이 치유법이 아니라 남을 오염하는 독인 양, 자칫 고통을 언급했다가는 정신적 외상을 또 한 번 입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입히게 되는 문화에서 자랐다. 이런 비밀과 수치의 문화에서 성폭행을 고발할 만큼 대담한 아시아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 부정은 항상 상처에 바르는 연고가 되어주지만, 그건 국소적 요법에 불과하다. 겪은 일이 꿈에 나오거나 다른 더 치명적이고 만성적인 형태로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 학자인 친구에게 왜 아무도 차의 죽음에 관해 쓰지 않는지 의견을 물었다. “아마 차의 가족에게 또다시 트라우마를 주고 싶지 않아서일 거야”라고 그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를 포함한 차의 비평가들이 차의 이야기의 일부로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222 침묵의 문제점은 침묵하는 이유를 목청 높여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침묵은 쌓이고, 증폭되고, 우리의 의도 밖으로 자체의 생명을 얻어 무관심이나, 회피나, 심지어 수치심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으며 결국 이 침묵은 망각으로 이어진다.
231 때때로 나는 뉴스 기사에서 범죄 피해자가 아시아인이면 일부러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싫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관하기 싫다. 왜냐하면 분노 속에 방치되기 싫기 때문이다.
247 부채 의식을 지닌 아시아 이민자가 자기들이 이만큼 사는 것을 미국 덕분으로 여긴다면, 그 자녀 세대는 자기들이 먹고사는 것을 고생한 부모 덕분으로 여긴다. 따라서 부채 의식을 지닌 아시아계 미국인은 이상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다. 역사의 무게는 오롯이 내가 짊어지는 부담이고 부모님이 잃은 것을 보상받는 일은 내게 달렸다고 받아들인다. 그러기 위해서 불평은 접어두고 직업전선에서 내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255 깨어 있다는 것은 일회상 자각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평가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 장기적인 서약일진대 “woke”(깨어 있음을 뜻하는 형용사 awake의 흑인 방언)라는 구호는 이제 조롱받는 일개 해시태그로 전락했다.
259-260 나는 “소속되지 못한 상태”와 “중간에 끼인 느낌”이라는 이민자 관련 쟁점이 늘 불만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정확한 GPS 좌표만 있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논리처럼 경직되고 부족하게 보였다. 하지만 남이 우리에게 하는 소리에 영향받아 형성된 거라도 자기(self)라는 어떤 기원 신화를 찾고 싶은 충동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미국에서 느끼는 감정을 뒷받침하기에 더 유리한 지점을 탐색하기 위해서 나는 기억 속의 서울을, 대다수에게는 흐릿하고 극소수에게만 선명한 역사적 사실들을 자꾸만 되짚는다. 서울에서 나는 여전히 자기 분열을 느꼈으나 적어도 그 감정이 미국에서처럼 개괄적 쟁점으로 축소당하지는 않았다.
261 나는 보편성을 파괴하고 싶다.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 우리야말로 지구상에서 다수이므로, 보편적인 것은 백인성이 아니라 우리의 차단된 상태다. 여기서 우리란 비백인을 말한다. 즉 과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자, 조상이 이미 멸망을 겪은 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생존자, 서구 제국이 초래한 기후 변화 때문에 악화된 가뭄과 홍수와 집단 폭력으로부터 피신한, 현재 멸망을 겪고 있는 이주자와 난민을 가리킨다.
265 내가 이렇게 살 수 있기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을까? 이 안락함이 나에게 주어지는 대가로 무엇이 지불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일제와 한국전쟁 때 학습한 방식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한 독재 정권. 나는 그중 어느 것도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역경에서 회복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 성찰할 시간도 없고 성찰을 허락받지도 못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268 우리는 이 나라에 늘 있었던 존재다.
272-273 그러나 비록 작가의 체험과 시각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가 서구에서 소수자로 사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과거에 겪었고 또 지금도 겪고 있는 차별과 편견은 어떤 보편성을 형성하여 작가의 시각으로 가까이 다가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 공감은 완벽하게 동일한 처지에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논점 가운데 하나였다고 나는 이해했다.
273 앞서 말한 대로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차별적인 언사를 듣거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깔린 헛소리를 들어도 내 집, 내 나라에서 타자화되는 체험이 아니어서 상처가 덜했다. 그러나 외국인, 더 정확히 말하면 스위스 국적의 백인 남성과 결혼하고 아시아 여성 이민자로서 백인이 절대다수인 남편의 나라에서 몇 년 생활한 이후로 나의 외부자로서의 촉수는 지극히 예민해졌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위스를 제2의 집으로 삼게 된 이후부터는 은근한 차별, 따돌림, 타자화가 미국 시절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이 문제는 미국에 비해서 유럽이 전반적으로 소수자 집단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덜 익숙하고, 소수자와 관련해 정치적 올바름을 발휘하는 일에 훨씬 덜 예민하다는 점 때문에 한층 더 현저히 발현됐다. (…)
가서 한 마디 쏘아주는 것,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 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끼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