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고 싶은 기분
**일상을 담담한 듯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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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떤 공포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33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해’라는 말은 주인공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한다. 사랑을 할 때 세계의 주인공은 ‘나’와 내가 택한 ‘당신’이므로.
47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그(신형철 평론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인 것 같다’는 말도 정직함과 정확함이라는 미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너무 빈번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빈번하게 애매하기 때문이다.
48 이런 애매모호함의 영역을 맡고 있는 모든 표현이 새삼 소중하게 여겨진다. 뭔가, 왠지, 좀, 막, 그냥…
그것은 인간 소통의 연골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만 같다. 뼈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말들이 중요한 세상이지만 그런 말들은 연골과 함께 비로소 굴곡하며 다른 뼈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이 간으해진다. 멀리까지 달려나갈 수도 있고 말이다.
55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결심과 선택에 따라, 눈물과 웃음에 따라 우리의 이름은 우리답게 변한다. 그렇게 원래 가진 모양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 이름은 우리 각각의 선두에 서는 것이다.
59 너무 사소하고 일상적이어서 <아무튼, 떡볶이>에 쓸 글감조차 되지 못한 순간들, 사실은 그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60 지금은 음악을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실제로 한동안 작업을 쉬기만 해도 기분이 이상해요. 뭐 불안하고 죄책감 느끼고 그런 게 아니라… 외로움을 느껴요. 외로워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나 생각해보면 그건 함께했던 시간들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시간들을 거치면서 이제는 음악을 한다는 것이 내 일상의 완벽한 일부가 되어버린 거죠.
71 “단어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아가씨가 항상 말했잖아요. 그러니 ‘여자 노예’는 저 쪽지들에 적혀 있는 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가씨가 어릴 때부터 아가씨와 ‘연결된 여자 bondmaid’였어요, 에시메이. 그리고 난 그 매일매일이 기뻤어요.”
사전에서 누락된 ‘여자 노예’라는 단어는 오랜 우정과 신뢰의 시간을 거쳐 리지의 입을 통해 더 위대한 정의를 획득한다.
72 옥스퍼드 사전은 완성되기까지 7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한 사람의 평생과 맞먹는 시간이다. 전국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전문가들의 노고를 촘촘하게 거쳐 그토록 정확에 가까운 단어들의 세상이 건축되었지만 어떤 단어는 에즈미와 리지라는 단 두 사람의 세상 속에서 더 생생한 생명을 얻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단어는 카를라 브루니가 말한 대로 그저 주위를 뱅글뱅글 돌게 하면서 영원히 실패하는 방식으로 반짝이며 실재한다.
79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익숙하게 싫어하던 대상에 낯설게 임해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묘연해질 때가 있다.
87 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의지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다고 믿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87 “우리는 보통 마음이 몸에게 말하잖아요. 몸이 마음을 따라야 하고요. 그런데 달릴 때는 마음이 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반대죠.”
“그렇게 몸과 마음이 다 말하고 듣는 상호 소통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계속 마음의 말만 듣게 되면 우리는 피폐해질 거예요. 몸의 말을 마음이 제대로 듣게 되면 그다음붜는 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죠. 달리지 않는 상황에서도요.”
89 해오던 일들 중 몇 가지를 강제 중지하면서 사적인 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도 많이 했다.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멍도 자주 때리게 되고 팔자도 좋아 보인다.
116 손이 두 개나 있고, 손가락이 열 개나 있고, 젓가락질을 아무리 능란하게 잘하더라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따는 사실과 그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라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나는 깻잎절임으로부터 배웠다.
163 그림을 그리는 일은 결국 혼자 해야 해서 별수 없이 외로워지곤 한다고. 그래서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이렇게 그림으로 불러들이게 되고, 그것들이 나를 덜 외롭게 만들어준다고.
165 궁금한 게 많아지는 것은 좋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대표적인 현상.
179 그때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더 근사하고 아름다운 옷이라기보다 찾아들어가 숨고 싶은 내 볼품없는 육신의 은신처였을 것이다.
181 내가 그동안 해온 사인의 횟수만큼 글도, 노래도, 그 무엇도 반복해본 적 없다. 그 반복이 준 완벽함 속에서 나는 잠깐이지만 쉬는 것도 가능하다.
203 “나를 길들이고 싶다면…”
매일 찾아올 것. 기왕이면 같은 시간에 올 것.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 것. 처음에는 멀리서 지켜볼 것. 시간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올 것.
204 당신도 그렇군요. 각별해지고, 그립고,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면 당신도 그렇게 다가가서 만지고 싶어지는군요. 저도 그래요. 저도 정말 그래요.
211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살면서 꼭 배워야 할 체념의 개념을 자연으로부터 배울 테니 말이다. 나는 늘 체념을 나로부터 배워야 했다. 나는 왜 해도 해도 안 되지? 왜 나는 늘 부족하지?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내가 그동안 학습한 체념에는 그래서 언제나 자기혐오라는 나쁜 버릇이 동반되곤 했다.
나는 책방에서 비가 추적거리는 낮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 옥수수 어떡하지’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하늘이 주는 건강한 체념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래, 어쩌면 옥수수 농사를 망칠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235 ‘미지 未知’는 ‘지 知’가 되면서 꼭 조금씩은 별수 없이 시시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시시함이 상쇄될 만큼 얻는 것이 있다. 그 문을 넘나드는 모두에게서 보여지던 빛나는 멋. 그것이 나에게서도 어설프게나마 감돌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240 좋은 사람이 되고싶은 것보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258 “그러니까 우리가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끝맺었다.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더 열심히 해볼게, 라는 말은 언제나 잘잘못과 무관하게 더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숙연해진 마음으로 조용히 공연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