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몸 2
🔖 책갈피
16 우리의 몸은 견고한 땅을 딛고 서 있겠지만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일렁이고 요동쳐야 한다.
20-21 나와 다른 몸을 볼 때 낯설잖아요. 뭔가 설명되지 않기에 두렵기도 하고요. 그 낯선 몸을 어떤 범주로 분류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은 필요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쉽사리 기존의 정형화된 분류 틀에 기대어 낯섦과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 안도감을 찾으려 해요.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보고 ‘백인이네’ ‘흑인이네’ ‘아시아인이네’라고 분류하는 것은 고정된 틀이고 익숙하기 때문에 상식처럼 나에게 들어오거든요. 그 상식을 거부하는 경험이 필요해요.
낯설다고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출발점에서 자꾸 걸음을 떼어보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외국 아이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에서 예쁜 백인 아이들만 비추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러면 ‘백인 아이가 좋다’ ‘하얀 피부가 좋다’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스며들듯이 주입돼요. 저는 그게 위험하다고 봅니다. 다양한 몸들이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다른 몸도 낯설지 않을 수 있거든요. 가까워지면 낯설지 않아요.
39 그중 기억에 남는 해외 논문이 있는데, 현대인에게 몸이란 게 유일하게 내 뜻대로 조종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아라고 하더라고요. 이 몸에 관해서는 엄청 피나는 노력을 해서라도 내가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한다는 거예요. 제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남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거거든요. 제가 <아워 바디> 시나리오를 처음 썼을 때보다 두 살 정도 더 먹었는데, 지금 훨씬 마음이 편해요.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 얘기가 제일 하고 싶었어요. 남들 신경쓰지 않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는 것이 제일이다.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느껴요.
44 제가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제 신념을 완벽하게 추구하는 동시에 이유 없이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정죄하지 않았겠죠. 그런데 저는 그 정도의 인간은 아니었어요. 그냥 너무 평범하고 하찮은 수준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난 이렇게 잘하는데 너넨 왜 이렇게 못해’라는 식의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 제 안에서 생기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경계하게 되더라고요. 페미니즘과 채식, 그 외 여러 가지 일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게 나를 잡아먹을 만큼 거대하게 만들어서 타인과 세상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미워하지 않도록 하자. ‘말랑말랑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인 거죠.
47 늙는다는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 마음, 정신과 너무나도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면서 배운 것 같아요. 잘 늙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하고 좋은 책,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까 끊임없이 저항해야 할 것 같아요. 안 늙어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메시지에 저항하고, 여러 사람들을 통해 발화되는 옳지 않은 메시지에 저항하고, 나 자신에게도 계속 저항하면서 이 몸과 저인 양쪽을 똑바로 올바르게 지켜가며 저와 여러분 모두가 사는 동안 잘 늙었으면 좋겠습니다.
70 우리가 아무리 나만 잘살면 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풍파에서 누구도 자유로운 수 없어요. 지구 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 나비효과로 나에게까지 영향이 올 수 있고요. 나쁜 역사는 단죄하지 않으면 다시 벌어져요. 일제강정기의 위안부 피해 문제도 같은 경우예요. 그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하는 선례를 만들어야 그 누구도 나쁜 역사를 만들지 못해요. 제가 20년 동안 전쟁을 취재하면서 느낀 거예요.
72 결국 기본은 사람이에요. 제일 밑바닥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 다음에야 그 나라의 경제, 정치, 사회, 전쟁… 이런 어려운 말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요.
80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말하는 몸’이 되어야 해요.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차별이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툭 나와요. 저도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없이 다짐하고 스스로 주의하려고 노력하지만, 저도 이 문화 속에서 차별을 공기처럼 마시고 밥멋듯이 먹으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조심하기에 좋아요.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할 리 없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위험하죠. 우리가 차별적인 언어들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서로 조심하도록 만들더라고요.
81 우리가 이걸 언어화하지 않으면 내가 느꼈던 그 경험들은 없어지는 거예요. 내 안에서 사라지는 거죠. 나는 겪었지만 없는 문제가 돼요. 공식적인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냥 오로지 개인의 몸속에만 남는 경험이 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제 몸속에 남아 있는 이 경험들을 다 꺼내서, 제 몸을 구성하는 차별들을 다 꺼내서 문자로 기록하고 말하려 해요.
82 그러나 말없이 싸우는 것과 언어를 들고 싸우는 것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요. 또 다른 사람을 설득할 힘도 가지죠. 그 언어가 없다면 내가 겪는 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힘들어요. 여성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언어는 참 많잖아요.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언어들이 나를 위축시킨다면 거기에 대항하는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이 폭력적인 사회를 지칭하는 대항언어를 만드는 일.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86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까, 그건 착각이더라고요. 자유롭다고 생각한 저조차도 고정관념이나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럴 그런 상황을 피한다거나 속으로 생각하고도 말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주류의 관념에 포섭되어 있는 거예요. (…)
제 나름대로 그런 차별에서 벗어나려고 굉장히 애를 쓰지만, 애쓴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것을 의식한다는 거겠죠.
90 앞에서 그런 얘길 했잖아요. 반삭, 문식, 그리고 사회적 여성성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는 게 어쩌면 그 여성성을 더 의식하고 신경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요. 제가 되게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저 또한 주류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도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방법을 찾는 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해요.
98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선택하는 것 자체를 대담하고 겁 없고 무모하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게. 마치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으로 여겨지잖아요.
131 ‘아픈 사람이라 돌봄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존재로서의 존중 또한 필요하다’ 그런 인식과 함께 사회제도도 개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을 많이 했어요.
144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비판하는 일. 비판하면서도 무한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일.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능한 일이다. 음악 뿐 아니라 곳곳의 모든 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랑한다고 감추고, 성취하려고 감추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미룬다. 꼭 그래야 할까. 사랑할수록, 더 멋진 것을 성취하고 싶을수록, 그 미래를 가깝게 만들고 싶을수록 우리는 더 말하고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160 좋은 명분을 가졌지만 본질은 저열한 행동들에 속지 말자고. 제멋대로 사는 것 같지만 그 방향이 의미 있는 것에 더 좋은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고. 한때는 목숨까지 희생할 정도의 각오라면 그 이유도 올바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과연 그럴까’ 싶은 것이다. 그보다는 작은 변화들, 할 수 있는 실천들, 오랜 고민 끝에 우러러 나온 해답들에 더 눈길이 간다. 그런 삶을 보며 영감을 얻고 ‘나도 해볼까?’하는 의지도 생긴다.
196 이제는 아픈 것보다 아픈 사람에 대한 사회의 시선, 그것을 내면화한 내 안의 시선 때문에 아무것도 못했다는 사실이 저를 더 힘들게 해요. 아픈 건 아무 것도 아니죠.
205 그보다는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일에 가깝습니다. 자기보다 힘이 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일종의 지위에 대한 욕구, 힘에 대한 확인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예요. 성욕이 아닌 ‘힘 power’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화학적 방법으로, 남성호르몬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성범죄를 막는다는 건 턱도 없고요. 성범죄를 힘과 지위의 문제로 보는 게 더 정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5 성범죄는 힘의 불균형이 초래하는 문제로 보는 게 훨씬 더 실체에 가깝습니다.
207 제가 궁금했던 것, 왜 이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는지를 알아갈수록 ‘불특정’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진다고 느껴져요. 위험을 예견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게 치유라면 치유라는 생각이 들고요. 저의 경우,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그 두려움 속에 푹 빠져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게 도움이 됐습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불안한 분들에게도 권해드리고픈 방법이에요. 그 속에 뛰어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게 해결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43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요, 남성과 여성의 신체가 동등한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게 아니에요. 농구에서 득점할 때 신체 능력이나 신장 같은 것들이 물론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자꾸 그런 걸 강조했을 때 숨겨지는 것들이 있어요. 여성과 남성이 서로 얼마나 다른 신체 능력을 갖고 있느냐에 집중하면 도리어 기회를 얼마나 공평하게 얻지 못했는가를 말하지 못하게 돼요.
283 겁이 나는데도 나서는 건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이 더 싫어서예요.
292 자신감은 아주 잘 알거나 아예 모를 때 생기잖아요. 그런데 어설프게 알고 나니까 항상 자신이 없는 거예요.
308 엄마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월경의 흔적이 묻는 것을 너무 고민하지 마라. 그것이 너의 역사다. 네가 지나온 날이다.’ (…) 그 대신 이게 내 월경의 흔적이고 기록이다, 내 몸을 만난다는 마음으로 생각하면 편해지거든요. 엄마가 저를 설득할 때 그렇게 말했어요. “누구에게 보여줄 거 아니잖아. 혼자 볼 거고 혼자 기억할 거잖아. 부담 갖지 마.” 엄마가 해준 말을 저도 여러분들께 돌려드리고 싶어요.
313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저지르세요. 제가 저지르는 인생을 47년 살았는데요. 큰 사고는 안 나요. 물론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인가, 이것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고민은 충분히 해야겠지만 누군가가 말린다는 이유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고 치세요. 다가오는 해에는 사고 친 여성들의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321 저는 제 몸이 역사라고 생각해요. 제 몸은 제 역사를 담은 그릇이고 제가 어떤 움직임을 취하든 제 삶의 역사로 남는다고 생각해요. 한없이 아름다운 거잖아요. 그게 제 몸이죠.
338 결혼은 다양한 시민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해요. 내가 아프거나 힘들거나 지쳤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지지하고 도와줄 수 있잖아요. 결혼은 그런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안전망이거든요. 이게 이성애자 부부에게 한정되는 건 너무나 큰 문제예요.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만 되고 이후로 진척되지 못하고있어요. 꼭 진척돼서 모든 시민들이 자기가 선택한 인생의 동반자와 살 수 있는 권리를 누렸으면 좋겠어요.
360 나는 이 만남에서 인간과 사회를 향한 낙관을 목격한 것 같았다. 무조건적인 낙관이 아니라 치열하게 임해 결국 쟁취해내고 마는 낙관 말이다. 당장은 너무 견고해 바꿀 수 없을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렇게 세상은 바뀔 수 있으리라고 믿는 낙관을 말이다. 바로 이런 낙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말하는 몸』의 독자들이 그와 같은 낙관을 함께 믿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367 물론 아직도 갈 길은 멀어요. 그런데 저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뭔가 잘못된 것을 바꾸고 틀린 것들을 바로잡아가면서요. 그래서 저는 제 삶이 좋아요. 몸은 힘들고 고단했지만 어쨌든 이런 삶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