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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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케이팝의 안팎에는 무언가 이상한 게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더 알고 싶었다. 왜 케이팝을, 아이돌을 싫어하는 일이 이렇게나 쉬운지, 싫어할 이유들이 왜 계속해서 생겨나는지 궁금했다. 이토록 주류적인 문화가 어떻게 주변적이기도 한지 알고 싶어졌다. 케이팝을 시끄럽게 하는 네트워크를 보고 싶었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7 나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경험을 하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버릇이 있다. 나에게 찾아온 팬심과 덕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케이팝을 싫어하던 사람으로서, 나아가 케이팝이 어떤 면에서 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팬심을 인정하거나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마음이 복잡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열정과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부딪힐 때, 나는 어떤 태도로 덕질에 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둘 중 무엇이 맞다고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덕질의 시작부터 내게 케이팝은 사회에 대한 나의 생각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나의 마음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 그 자체였다.
8 유치하다고 무시당하고 현생을 살라고 욕먹으면서도 덕질을 포기하지 않는, 낙인을 견디게 하는 마음이 궁금했다. ‘연예인 걱정이 제일 쓸모없다’는 말에 가려지는 마음이 궁금했다.
8 팬과 아티스트가 주고받는 마음이란 단지 아이돌 산업이 만들어내는 상품이라는 말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대상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팬심이라는 것은 각자의 삶의 과정 안에서 각기 다르게 고유한 형태로 솟아나는 마음이다.
9 ‘논란’을 경험한 팬들을 만나며 내가 발견한 것은, 팬심을 뒤흔들고 나아가 탈덕으로 우리는 떠미는 고통스러운 시간 안에서도 팬들이 그저 굴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티스트를 마음에 안 들면 치워버릴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복잡하고 고유한 인간으로 대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이를 위해 윤리적 고민들을 놓지 않는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그 마음을 그저 철없는 짓이나, 나잇값 못하는 짓이나, 마케팅에 넘어간 한심한 짓으로, 시간 낭비로 치부할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마음을 굳이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다소간의 낭만화를 수반할지라도, 그말이 상기하는 어떤 찬란함과 이 마음들을 연결하고 싶었다. 어떤 열정도, 어떤 사랑도 경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6 이처럼 ‘팬덤 정치’라는 말은 최애를 묻어놓고 지지하는 ‘무지성 팬덤’과 ‘합리적 대중’이라는 이분법에 기대며, 이 이분법은 팬덤은 대부분 여성이며 여성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편견의 순환 안에서 탄생했다.
17 매혹 그 자체는 좋거나 나쁘지 않다. 그것은 다만 우리를 추동하는 힘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매혹에 따라 움직이는 ‘비합리적인’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매혹에 열려 있는, 타인을 느끼는 존재들이기에 변화할 수 있다. 나에게 중요한 부사는 언제나 ‘설령’이다.
19 나는 개별 논란 자체의 사실관계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논란에 대한 팬들의 판단에 동의하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특정 아티스트나 팬덤을 변호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이 책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논란 안에서 갖게 되는 태도와 그 태도가 줄 수 있는 시사점이다. 불확실한 믿음도 얼마든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23 각기 다른 사례들을 하나의 단어로 묶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마땅히 제기될 수 있겠지만, 그 사례들이 전부 논란으로 불리고, 또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되면서 더 깊은 고민과 문제의식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1부 논란의 네트워크
39 연예계에서 발생하는 논란은 종류를 막론하고 그 논란의 당사자들을 거의 매장하는 방식으로, 사건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당사자들의 인성과 노력을 깎아내리거나 성희롱을 일삼는 방식으로, 즉 “그 사람의 존재를 깎아내리기 위한 비난”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대중이 논란이 된 행동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당사자를 비난하는 프레임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정작 개별 사건의 진실은 관심의 영역에서 사라진다고 지적한다. 아이돌이 엮이는 순간 논란은 개별 사건의 특성과 무관하게 삽시간에 ‘인성’의 문제로, 즉 아이돌 아티스트 개개인의 문제로 치환된다. 무수히 많은 이질적인 사건들은 그렇게 논란이라는 단어로 묶일 수 있게 된다.
70 그는 대화를 의견의 교환보다 암시와 최면이 발생하는 장으로 이해한다. 대화에서 순수한 정보나 의견만을 교환하기란 불가능하다. 표정이나 말투, 그날 입은 옷과 외모, 공간의 분위기까지 모든 요소가 대화에 영향을 끼친다. 대화는 “사람들을 대면하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저항할 수 없는) 작용을 통해 의사소통 하게” 만든다. 따라서 대화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합리적인 판단’보다 ‘매혹’으로 이끌고, 모방을 촉발한다.
71 이때 전달되는 것에는 정보를 넘어 감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소셜미디어 네트워크에서 사람들은 관계적 욕망을 바탕으로 접속하며, 이때 중요한 것은 “연결, 사귐, 자기 표출, 인정의 정동”이다. 고립될수록 무력해지는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며 인정받고자 한다. 여기서 생겨나는 것은 마음들 사이의 원거리 작용이며, “사용자들은 지속적으로 전염되는 연결 정동의 수용자이자 전달자”가 된다. 이와 같은 연결과 모방은 사람들을 소셜미디어에 집결시키고, 또 거기 모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72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집단 감응이 “서로 침범하고 오염하며 변용하는 가능성”이라고 말하며, ‘공론장의 회복’이나 ‘합리적인 토론’이라는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런 식의 수사는 남성 중심적으로 상상된 공중만을 공론장의 구성원으로 사유함으로써 공론장에서 감정의 문제를 제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중이란 “애초에 감정적인 단위”이며, 그들에게 “’토론의 장’은 합리적인 토론을 가장한 채 다양한 정동적 부대낌을 바탕으로 ‘등질적’으로 상상”된다.
73 따라서 “공론장은 ‘회복’될 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상상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닌 감응, 특히 집단적으로 벌어지는 감응이다.
75 김신현경은 이러한 지형의 배후에 존재하는 “타인의 불행과 추락을 바라고 기뻐하는 마음”, 즉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를 지적한다. 이는 손실이나 고통을 의미하는 ‘schaden’과 환희나 기쁨을 의미하는 ‘freude’라는 두 독일어 단어를 합친 말로,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세계의 도래 그리고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개인들의 삶”에서 비롯되는 대중심리로, 유명인의 추락에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80 그런 상황에서 작품의 의미에 대한 논쟁이 가능하지 않으며, 논란 안에서 사람들이 그저 아티스트 개인만을 물고 늘어진다고 느끼고 있었다.
81 이처럼 개인을 비난하고 퇴출시키려는 움직임의 배후에는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이 존재하며, 이는 소셜미디어의 잉여 문화와 관심경제의 연동 안에서 생겨나는 캔슬 컬처로 표면화된다. 여기서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화를 내는 이유는 특정 대상이 자신이 가졌던 “좋은 느낌을 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때 행복은 대상들이 “어떤 식으로 인상을 만드느냐의 문제”인 만큼 불안정하고 모호하다. 그럼에도 논란은 ‘좋은 느낌’의 정체에 전혀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무언가가 빼앗겼다’는 감각일 뿐이다. 이런 구조는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만 동시에 관심경제 속에서 쉽게 돈을 번다는 비난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언제든 배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다른 아이돌들의 논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81-82 아이돌 아티스트에 대한 대중의 배신감과 응징 시도는 ‘정서적 평등주의 affective egalitariansim’와 ‘집단적 도덕주의 collective moralism’라는 개념으로 포착된다.
83 특히 그는 문제제기가 사회 변화보다 개별 아이돌 그룹 혹은 아티스트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때 그것이 정당한 비판이 아닌 정서적 평등주의로 귀결될 수 있으며, 창작물에 담길 수 있는 다양한 의미에 대한 해석이나 비평은 도외시한 채 특정 단어나 표현을 여성혐오라고 단정 짓는 것은 집단적 도덕주의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83 여성학자 김주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대해 소셜미디어와 해시태그를 타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가해자 단죄 및 캔슬을 속도의 페미니즘이자 관성의 정치라고 명명하며, 사실관계 파악과 별개로 이뤄지는 재빠른 판단과 단죄가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과 페미니즘을 통한 논쟁을 차단했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이미 정해둔 채 옳음을 향해 내달리는 관성의 정치와 ‘도덕이 된 페미니즘’의 속도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일 수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86 아이돌 아티스트는 ‘진실’이나 ‘사과’보다는 ‘퇴출’이나 ‘탈퇴’를 요구받으며, 그런 요구의 기저에 놓인 것은 ‘정직할 책임’보다는 ‘사랑받을 자격’이다.
89 이렇듯 아이돌 산업은 아이돌 아티스트를 즐거움 내지는 행복을 약속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랑을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즐거움과 행복에 도덕적 가치로서의 인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라 아메드가 분석한 행복이라는 관념의 작동 방식을 상기한다. 아메드는 행복의 관념이 행복할 자격이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별한다고 지적하며, 따라서 행복해지는 방법에도 올바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이 있음을 간파해낸다. 이를테면, 이성애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올바른 방법이지만, 동성애는 올바르지 못한, 불행한 방법이라는 식이다. 이처럼 행복은 “세상을 소위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즉 행복의 약속에는 언제나 도덕성과 옳음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90 이때 대중은 합리적 이성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 행복할 자격을 갖춘 도덕적 존재로 구성된다. 즉 대중은 이성적이기보다 정동적인 집단이며, 대중과 팬덤을 가르는 구분 자체도 특정한 상황에서 이들이 느끼거나 느끼도록 요구받는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93 (특히 남성인) 아이돌 아티스트들이 실제로 사건사고를 일으킨 선례들은 이러한 감정의 배경이 된다.
94 팬과 대중의 차이는 ‘어떤 콘텐츠’를 ‘몇 번’ 보는지보다,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무엇을 느끼며’ 보는지에 있었다.
95 이처럼 아이돌 사이버렉카는 가십을 즐기는 대중, 자기 최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불안한 팬들, 유튜브라는 영상 중심 플랫폼, 관심경제가 결합해 작동하는 네트워크다.
106 달리 말해, 퇴출은 시장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도태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 논란이 발생했을 때 관심이 회수되는 것은 시장에서의 자연스러운 도태이지만, 아예 복귀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108 이 과정에서 “아이돌이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히거나 의도적으로 비가시화”된다. 이는 “아이돌이지만 동시에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인이자 개별적 인격체라는 당연한 명제를 ‘아이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당위적 시각으로 눌러버리는 폭력적 방식의 의사소통”이다.
110 아메는 인터넷 여론이 사건에 집중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논라이 되는 당사자를 비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지적하고, 히비는 “확실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말을 쉽게 얹는 사람들”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113-114 이러한 모방의 연쇄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즉 알고리즘은 단지 사람들의 삶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함께하는 중요한 행위자이다. 알고리즘과 함께 만든 사회가 좋은지 나쁜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119 다시 말해 논란의 네트워크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알고리즘 안에서 우연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얽히는 대중-사이버렉카-언론-팬덤 등의 상호 생성과 상호 모방 안에서 만들어진다. “개인을 세상에 연결하는 것은 비의식적이고 암시 감응적인 모방 행동”이다. 이처럼 모방은 필연적이기보다 우발적이며 습관적으로 일어나며, 모방의 연쇄를 통해 모종의 네트워크가 건설된다.
121 그리고 우리는 “자신들과 무관한 곳에서 느닷없이 자신을 삼키고 흘러가는 행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비로소 행위”한다. 그렇게 논란에 휘말림으로써 우리는 그 논란에 감응하고, 흔적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책임을 공유한다. 네트워크에 연결된 이들은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모두 논란의 생산과 증폭에 공동의 책임을 지닌다. 이처럼 의도적이기보다는 습관적으로, 계산보다는 감정이나 느낌에 따라, 정동적이고 우발적인 방식으로 어떤 네트워크에 휘말리는 과정,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책임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연루다. 이때 대중과 팬은 각기 다른 특정한 방식으로, 다른 강도의 정동으로 논란에 연루된 집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악의에, 그리고 논란에 연루되어 있다.
125 이처럼 서로 공통된 지향을 갖지 않은 의견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좌표 찍기 혹은 수배의 기술로 묶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논란에 관련된 개개인의 비난과 퇴출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126 따라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피해와 가해가 지독하게 중첩된 학교폭력의 구조와 복잡성,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새로운 관계를 출현시키는 일이며, 그에 대해 모든 사회구성원이 진지하게 논의하는 태도다. 정도와 형태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교폭력은 기본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가 얽혀 있는 형태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돌 아티스트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학교폭력 논란들은 논란 속 아이돌 아티스트의 사과, 자숙, 은퇴 정도로 일단락된다. 성찰이 결여된 일단락은 또 다른 학교폭력 논란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배경이 된다.
131-132 논란은 그 원인이 되는 것들을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한다. 논란이 일단락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논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집단적 도덕주의가 논란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대중은 논란을 중립적 위치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기보다 논란의 실제 내용에 별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논란을 만들고 증폭시킨다. 중립적인 대중과 편향적인 팬덤이라는 이분법은 대중의 편향성을 은폐한다.
133 사람들은 아이돌 아티스트에게만 매혹되는 것이 아니며, 폭로글의 정동에도 매혹되고, 사이버렉카가 만드는 영상의 시청각적 효과에도 매혹된다. 이러한 것들과 함께 아이돌 논란에서 음모론적 확신을 구성하는 주된 동력은 다름 아닌 도덕이다.
134 그리고 ‘걔네는 네 이름도 몰라’와 같은 말에는 팬심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애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행복을 추구하기에 부적절한 대상을 사랑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도 부적절하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추구하는 행복 역시 마찬가지로 비도덕적이다. 이처럼 아이돌 아티스트는 수많은 대중에게 인기를 얻으면서도, 애중의 시선에 의해 언제든 비도덕적인 대상으로 추락할 수 있는 존재다. 아이돌 아티스트가 약속하는 행복에 대한 불신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음모론적 확신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140 그런 이들은 팬심을 소거하거나 감춘 채 대중의 문법에 동참하기도 한다. 팬덤은 문화적으로 비주류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공인된, 혹은 다수에게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가치를 병합해 이미지 개선을 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때로 팬덤 내부의 갈등이나 분열로 이어지기도 한다.
2부 매혹과 윤리
166 “주현이 편”(하늘), “그럴 사람이 아닌데”(홍대)와 같은 말은 무조건적인 지지나 응원을 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 혹은 그 사건을 자신의 삶과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을 수반했다.
(…) 그러나 그 과정은 빠르게 처리되는 판단이기보다, 수많은 정보를 꼼꼼히 확인하고 정리해 자기 나름의 진실을 만들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에 가까웠다. 아티스트에 대한 사랑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해 엮어낸 ‘조각보’로서의 진실이다.
169 법은 분명 중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법 또한 하나의 기준일 뿐이며, 각종 논란에서 거듭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혐의’라는 모호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181 피자 아이돌은 아무래도 사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뭐 음악성이 좋아서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냥 그 진짜 그 사람 자체를, 나는 물론 그 사람을 잘 모르지만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진짜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특수성이 있는 것 같긴 해요.
182 피자의 말처럼 아이돌은 노동과 휴식의 경계 없이, 언제나 일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일해야 하는 존재다. 무대를 하지 않을 때조차 무대 바깥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다보니 그 사람의 노동이 팬들에게는 노동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팬은 아이돌 아티스트를 사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이 산업이 만들어내는 노동이자 상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196 논란에 말을 얹은 공인이 자신의 말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듯, 논란이 된 공인은 문제가 생긴 이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는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198 관심경제에서 관심은 보통 돈으로 환산되지만, 온라인에서 우리가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공간을 관심경제가 관통하고 있기에 여기서 관심은 관계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관심경제에서 관심을 주고받지 못하는 것은 어떤 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심을 주고받는 것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즉 우리는 관심을 받을 때 비로소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관심을 윤리적 문제로 이해하는 한 논문에서는 우리가 관심 경제 안에서 관심을 받음으로써 다른 이의 인식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식적 행위자 epistemic agent 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누군가에 대한 관심을 회수하는 것은 그의 인식론적 역량을 빼앗는 일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타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즉 인식론에 영향을 주거나 그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매 관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특히 소통을 위한 공통 기반이나 상식으로서의 인식론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행위자로 거듭난다. 관심경제 안에서 이것은 관심을 매개로 이뤄진다. 누군가 관심경제 안에서 인식적 행위자가 되려면 적정 수준의, 적절한 형태의 관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관심을 끊는 일은 단지 그가 돈을 벌 수 없게 하는 일을 넘어, 그가 인식적 행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인식적 부정의 epistemic injustice이기도 하다.
215 논란 속 팬들의 망설임은 아이돌 아티스트 개인을 상품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려 노력함으로써 그를 인격체로 구성해내려는 윤리적 실천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윤리적 실천이 또 다른 윤리적 실천, 즉 자신의 덕질이 돌판 안팎의 불평등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하는 실천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투의 장면이기도 했다. 이는 아이돌 산업의 전략이 성공한 바로 그 지점에서 팬들이 아이돌 산업의 문제를 알아나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224 퇴출이 아니라 사과와 변화의 과정에 주목해야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해력과 사회적 변화에 대한 팬들의 판단과 실천을 뒷받침하는 것은 팬이 아이돌 아티스트에게 느끼는 깊은 감정적 유대이기도 했다. 이때 팬들이 빠르게 떠난다면, 그런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241 그의 원망은 아티스트 개인이 아닌 그를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을 향하고 있다.
243 이런 고민은 타협과 합리화로 나아갔는데, 그는 이것을 ‘정당화를 위한 논리의 구축’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정당화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라기보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논리에 가까웠다. 아메가 이 과정 자체를 길티 플레저라고 말한 이유는 최애에 대한 자신의 팬심과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가치관의 충돌을 스스로 제대로 다루지 못해 그 모순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45 덕질이란 여전히 ‘어디 나사 하나쯤 빠져서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지금만 생각하는 얕은 즐거움’이나 실제 연애에 드는 시간이나 감정과 같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선택하는 불충분한 유사연애로 여겨지곤 한다.
245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논란 속에 있는 팬들에게 덕질이란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심지어 자신이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팬심이라는 상황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가치관이 흔들리고, 팬덤 내부와 대중의 관심 감찰 때문에 고립되는 경험에 가까웠다.
247 논란이라는 계기 속에서 덕질은 현생으로부터의 도피보다 현생의 윤리를 고민하는 과정으로 점차 변모한다. 물론 덕질 자체가 본래 돈과 시간 같은 현생의 자원을 사용하기 때문에 현생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지만, 덕생과 현생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이었던 ‘순수한 즐거움’마저도 사라지고 즐거움이 죄책감과의 끝나지 않는 협상에 놓일 때 덕생은 그야말로 ‘현생을 갈아 넣음으로써’ 유지되는 무엇이 된다. 따라서 길티 플레저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태도일 뿐 아니라, 어떻게든 구분하려 했던 두’생’의 경계가 흐려질 때 만들어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24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양가성을 직면하는 태도다. 무언가가 다소간 석연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힘을 인지한다는 것.
279 논란 속에서 팬들이 보여주는 문해력은 합리성보다는 매혹과 절박함에서 비롯된 주의력에서 나왔다. 지극히 이성적인 능력이라고 여겨지는 문해력조차 사실은 감정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특정한 배치가 자아내는 매혹은 특정한 관심과 주의력을 출현시킬 뿐 아니라, 이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강호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의력 혹은 관심은 제로섬이 아니며,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가변적인 대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일정하게 배분할 수 있는 균질적 ‘자원’이 아니라, 매 순간 다른 강도와 질을 지닌 ‘상태’에 가깝다.
이처럼 내가 만난 팬들에게 덕질의 경험은 논란의 네트워크를 겪어내는 일이었으며, 겪어냄의 전제에는 매혹에 대한 인정이자 굴복으로서의 팬심이 있었다. 이들의 윤리적 고민이 어느 방향으로 종결되지 않고 이어지면서 이들이 끊임없이 문제에 놓이는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매혹과 윤리가 이들 안에서 계속해서 경합했기 때문이다.
281 우리가 아이돌 논란 안에서 마주하는 것은 단지 아티스트 한 사람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때로는 구체적인 얼굴조차 알기 힘든 익명의 타자들이 있다. 매혹과 고통이 만나 매혹이 흔들리는 지점에서 탄생하는 것은 망설이는 주체다.
290 행위능력 agency이 언제나 능동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팬덤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은 주로 팬덤의 행동주의 activism에서 드러나는 능동적인 형태의 행위능력에 주목하곤 한다. 팬덤이 그저 자신의 최애를 쫓아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최애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자기 주변의 환경을 바꿔나가는 주체적인 존재라고 강조한다.
291-292 나는 이 논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가고 싶다. 망설임은 반드시 끝나야만 하는가? 나는 내가 만난 인터뷰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떤 망설임은 끝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망설임 자체에 대해서도 망설인다. ‘이렇게 계속 망설여도 괜찮은 걸까? 내가 망설이는 동안 여전히 논쟁들은 진행되고 있고,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어쩌면 실제로 피해자가 존재할지 모르고, 지금의 상황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 망설임이란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길티 플레저라는 윤리적 태도는 홍대처럼 ‘답을 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려보내면서’, 즉 망설임을 선택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는 ‘편함’이나 ‘무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 과정은 자신의 판단이 피해자에게 더 큰 해를 끼치 않으려면 자신의 가치관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망설임은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나의 사랑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충돌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이자, 다른 누군가의 정동에 계속해서 열려 있기를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망설임 자체에 대한 망설임을 놓지 못하면서, 타자들 사이에서 망설이며 머물기를 선택하는 시점에 죄책감과 즐거움의 단단한 얽힘을, 그 안에서 내가 감수해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열러 있다는 것은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수능력이 빛을 발한다. 망설임은 윤리적 고민을 해소하는 대신, 그것을 놓지 않거나 놓지 못하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그것에 사로잡히는, 그럼으로써 문제에 계속해서 놓이는 일이다. 그렇게 문제에 놓이면서, 망설이고 기다리면서 만들어진 감수능력이라는 역량은 다시금 망설임이라는 태도 혹은 행위로 나타난다.
293-294 어떤 형태든 망설임이 지니는 의의는 그것이 논란으로 이익을 보는 네트워크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자, 논란의 속도에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는 데 있다. 망설임이 그 자체로 어떤 진실을 산출하지는 않을지언정, 그것은 우리 나름의 진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름의 속도를 발명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정동에 열린, 정동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발휘되는 주의력이 정보와 감정들을 종합한 결과를 감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마련해준다. 이는 사이버렉카-대중-언론-알고리즘-소셜미디어 플랫폼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여론에 휩쓸리기보다 어딘가에 우선 머무를 역량이 된다. 공론장을 다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먼 곳이 아닌, 때로는 우리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머무를 때 발견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난 팬들의 망설임은 공중에서 같은 자리를 지키며 떠있는 정지비행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벌새는 사냥을 하거나 꽃에서 꿀을 빨아먹을 때 정지비행을 하며, 이를 위해 1초에도 수십 번의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벌새는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공중에서 머무르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같지 않다. 논란을 겪으며 덕질의 안정적인 지반을 잃고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망설이는 팬들은 내게 추락하지 않고 어떤 행동을 취하기 위해 공중에서 안간힘을 쓰는 벌새처럼 보인다.
298 그 역동적인 머무름은 아이돌 사업의 전략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응의 힘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상되는 것은 ‘반성하고 나아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윤리적 인간이다. 당장 무언가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기다림으로써 자기 자신 또한 변해간다.
299 팬들의 이런 감수능력이 대중과 팬덤 모두로부터 당하는 소외를 견딤으로써 형성된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이 힘은 본래 빠르게 전염될 수 없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느리게 만들어 지는 힘인 만큼, 그 힘 자체도 느리다. 이 느림은 어떤 열림을 보여준다. 외부의 정동에 감응하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매혹에 열려 있고, 매혹을 인정하는 정동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매혹될 수 있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것이고, 매혹을 인정한다는 것은 쉽게 결론 내리지 않는 태도와 연결된다. 나는 빠른 속도로 논란들을 증폭하고 처리하는 네트워크가 지닌 폭력성에 대항할 도구가 바로 그 폭력과 속도 안에서 웅크린 채 매혹과 고통을 겪어내고 있는 이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302 그러나 우리는 논란에 반대하면서도 제대로 된 비평과 토론을 전개할 수 있다. 비평과 토론은 폭력이 아니다. 비평과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고 다른 이야기를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이 폭력이다. 재빠른 수배와 무조건적인 보호 양쪽 모두로부터 단절할 때, 비로소 서로를 인식적 행위자로 만들 수 있는 논쟁이 가능해진다. 망설임은 바로 이 단절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310 팬들에게는 그런 사랑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무언가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나의 인생이 이 순간을 향해 달려온 것처럼 무언가를 사랑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있다고. 설령 그 덕질이 허무하게 끝날지라도,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남는다. ‘보기만 하여도, 생각만 하여도 울렁’하는 경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남긴다. 기다리다 지쳐 떠날지라도,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마음은 또 다른 약속을 할 용기와 힘을 남길 것이다.
312 망설이지 않을 때, 무엇이든 빠르게 처리하는 속도는 변화의 기회도, 윤리적 고민의 시간도 지나쳐서 내달려 나가버린다. 망설임을 통해 비평과 토론이 가능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관심경제와 논란의 속도를 벗어나 더 나은 윤리를 고민하며 더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속도를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확신에 맞서야 한다. 그러니 우리, 망설이기를 망설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