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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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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형의 삶

2024-07-29 저자: 김민철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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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갈피

10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의 이유를 묻는 건 어리석다. 아무리 촘촘히 대답해도 말과 말이 만드는 성근 망 사이로 사랑은 빠져나갈 수밖에 없으니.

17 대단한 무엇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나인 것처럼 거기에서도 나일 것이다. 갑자기 파리에 어울리는 근사한 나로 변모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42년 간 몰랐던 자아를 거기에서 갑자기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떠나야만 하는 때가 있다.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인생의 조각이 나의 남은 시간에 어떤 빛을 비춰줄지는 나만 알겠지. 오랜 후에 나만 살짝 알게 되겠지.

19 어차피 여행자는 오해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 자신이 본 한 장면으로 도시 전체를 오해하고, 자신이 겪은 한 사람으로 온 나라 사람들을 단정 지어버리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28 어제를 너무 다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고정해둬야 했다. 이 일기의 독자는 영원히 나 혼자일 것이다. 하지만 평생 누구보다 열렬히 읽어댈 독자 한 명을 위해 어제의 햇빛과 거리와 치즈와 와인과 성당과 나뭇잎과 꽃과 공원과 반짝인 사람들과, 그들보다 반짝였던 나를 기록한다.

32 파리를 너무 좋아했던 나는 파리에서 늘 그 마음에 걸려 넘어졌다.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다 보고 싶은데 어쩌지. 이 도시 곳곳에 그때의 내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서 있다. 초조하고 조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나를 데려와서 괜찮다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다. 그렇게 애쓰지 ㅇ낳아도 된다고. 이번이 마지막 파리가 아니라고. 지금의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미래의 너는 파리에 와서 두 달의 시간을 보내게 된단다. 그러니 그렇게 애달프지 않아도 된단다.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나는 다시 속도를 높인다. 과거의 나를 지나 지금의 나로 돌아온다. 지금 나는 내 발로 파리의 지면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38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또렷하게 말하긴 조금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나를 좋아했다.

38 20대의 나는 유독 특정 슬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토해내는 슬픔이 아니라 속으로 삼키고 또 삼켜 내장이 너덜너덜해져 버린 슬픔을 잘 알아봤다.

42 강단이 있는 사람이 실력과 상상력까지 갖추면 이런 작품들이 튀어나오는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기어이 구축하는구나, 라는 걸 깨닫는 순간, 또 한 번 기이한 용기가 튀어나왔다. 전시회장 끝에, 온통 남자들만 가득한 당시 조각가들 사이에 당당하게 선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단단한 눈빛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내게 건네는 용기를 양손 가득 받아 들고서.

그날 알았다. 똑같은 그림을 나에게 넣고 섞었는데, 슬픔이 나왔던 시절이 있었고, 용기가 나오는 시절이 있다는 걸. 내가 바뀐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 바뀐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나의 색깔대로 살아버려도 된다는 용기였다. 좋은 롤모델이 없더라도, 좀 이상해 보이더라도, 내 마음의 방향대로 살아버리는 것. 스스로가 나의 롤모델이 되어버리는 것. 내가 긋고 싶은 선을 긋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색을 칠하는 거다. 불안과 싸우며, 의심을 떨쳐내며, 계속 나아가는 거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시작된 거니까.

48 운명이라 믿길 좋아한다. 나쁜 일이 들이닥칠 때 운명이라 생각해버리면, 금방 체념이 되면서 툭툭 털어버리게 된다. 운명인 걸 어떡하나. 나는 한낱 작은 인간일 뿐인데. 받아들여야지. 나아가야지. 이겨내야지. 반면, 잠깐 지나가는 기쁨을 운명이라 믿어버리면, 별거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대단한 무언가가 내게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같이 하찮은 인간에게 왜 이런 선물을 주시나요. 나의 꿈에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답해주시나요. 내가 뭘 그렇게 잘했나요.

54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쏟아부은 표정. 고요하고 강인하다.

58 도대체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곳에 살면서 무엇을 욕심내도 되는 건지, 어떤 것 앞에서 용감해져도 되는 건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65 억지로 틈을 벌려서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어떤 무늬의 여행이 될까. 돌아가야 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억울한 마음이 자라나지 않는다면 여행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살고 싶은 속도대로 살아도 되는 여행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속도는 어떤 걸까. 그 속도를 열심히 찾아보자, 라고 쓰려다가 멈춘다. 찾지 않아도 된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그래도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되는 시간을 내가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69 쓰는 것보다 사는 게 먼저니까. 살아야 쓸 것도 생기니까.

85 여긴 아름다움이 온몸에 직진으로 와서 안겨버리는 공간이니까.

93 어떤 친구와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바뀌어버린 가치관과 뻔한 통념으로 지금의 나와 만나기에, 자연스럽게 만남을 줄이게 된다. 어떤 친구는 과거의 영광에 발목 잡혀 있다. 그때의 자신을 과시하며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기에, 만나고 오면 피곤함이 짙어진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어려움만 끝없이 토로하고, 어떤 친구는 생각이 좀처럼 자라지 않아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은 당연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3 가장 완벽한 상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 자신의 스타일에, 자신의 세계에 맞는 - 작품을 찾는 과정. 그 여정. 그 것이 내 세계를 찾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133 그림 속 세계에는 옳고 그림이 없었다. 다만 화가의 선택이 필연이 될 뿐이다. 이곳은 거대한 성공의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빛남을 쟁취해나가는 세상이다. 내가 창조주인 나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필연을 찾아가는 여정. 마티스 전시에서 유독 내 마음을 울린 건 그 여정이었다. 그의 고민이, 그의 방황이, 그의 선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자극. 품이 넓어 언제든 새롭게 해석되는 자극.

139 혼자 있을 때도 나는 선을 넘지 못한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은 건드리지도 않는다. 결국 들킬 것 같고, 결국 망할 것 같다. 불안한 건 질색이다. 영화를 보다가도 등장인물들이 하지 말라즌 행동을 하면 그때부터 엄청나게 불안해한다. 왜 저래. 하지 마 좀. 하지만 선을 넘어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을 넘어야 예상치 못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선을 좀 넘어야 비로소 인생은 풍성해진다. 20년 만에 회사라는 울타리를 넘는 용기를 내놓고도, 여기서 또 고분고분하게 주변만 알짱거리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친구가 선을 넘었다. 그 순간 나를 찾아온 해방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막혀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 구석구석까지 바람길이 나는 것 같았다. 내내 접혀 있던 날개가 살짝 펼쳐진 것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숨을 아주아주 깊숙이 들이마셨다.

150 핵심은 태도였다. 모른다, 대신에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아는 작은 지식들을 조합해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 이 세계와의 접점을 어떻게든 찾아보려는 것.

162 “그래, 이번엔 나를 위하여!”

이 건배는 진심이다. 나는 더 이상 혼자 남은 동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진심으로 응원할 뿐이다. 내가 중도에 폭기한 멋진 여자 선배의 역할을 동기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현명한 빛을 발휘하는 친구니까. 밝음을 강인함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가진 친구니까. 19년 동안 함께 걸어온 길을 같이 마무리하고, 서로가 갈 길을 응원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기어이 멋있는 응원을 만들기 위해 무리를 한 거다. 우리의 19년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잔을 다시 무딪친다. 끝까지 가보고, 멋지게 그만두고, 그때 다시 파리에 오자고 약속을 한다.

166-167 혼자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야 아침이면 다시 나로 되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깨끗하게 웃을 수 있었으니까.

(…) 일상 속에서도 여행 속에서도 그건 같았다. 새벽에 깨서 잠든 남편 옆에 앉아 일기를 쓰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남편이 자는 동안 쓴 여행 일기가 여행 끝에는 한 권 빼곡했다. 그 시간이 있어야 마음의 부유물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걸 글로 써야 단정한 마음이 찾아왔다. 할 일이 많아서 밤늦게 깨 있었던 게 아니라, 부지런해서 아침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혼자여야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어서. 혼자있는 시간이 있어야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어서 나는 그토록 바쁘고 부지런했던 것이었다.

195-196 언제나 내가 가진 것이 최고의 패라고 생각하고, 내가 한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믿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 그 선택이 실패로 결론이 난다면, 거기서 내가 또 뭔가를 배웠을 테니 괜찮다고 다독인다. 다음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며 스스로를 기죽이지 않는다. 나에게 최선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에도 없다. 지금부터 이곳은 나에게 최선의 장소여야만 한다.

211 마음껏 칠하세요. 원하는 색으로 칠하세요. 그렇게 그렸다면 그 모양이 맞아요. 틀리는 건 없어요. 그런 색깔로, 그런 모양으로 살고 싶나요? 그럼 그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212 끝없는 상향 곡선의 세상. 어린이 된 우리에겐 실패할 기회와 시간조차 쉽지 않다. 한 번의 실패로 영원한 나락에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세상에 떠돈다. 그러니 의도가 필요하다. 실패해도 괜찮은 세상 속에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가져다놓는 기획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처럼.

212 내 마음대로 되고 싶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거다. 실패를 나만의 문양으로 끌어안으며, 이상함을 나만의 색깔로 내세우며.

217 나는 적당히를 모르는 여자. 좋아하는 세상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돈키호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굴러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태양왕.

233 우연히 그 별에 도착하면 행운처럼 여겨졌지만, 그곳이 목적지가 되는 순간 그 목적지엔 뭔가 대단한 게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내가 일부러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나, 그런 거대한 기대감에 부응하는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기대감은 모든 흥을 반감시킨다. 제대로 즐길 기회를 앗아간다. 결국 나는 별을 목적지로 삼기에도 애매하고, 별이 목적지가 아니라면 어디를 목적지로 잡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234 너무 좋은 것 앞에서도 사람은 소진된다. 지친 몸에는 흥이 깃들지 않는다. 눈은 더 이상 새로운 걸 감각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비슷비슷해 보이고, 어딜 가나 심드렁했다.

270 내가 나를 열면, 이런 세상이 열리는 거였나. 내내 혼자일 거라 생각했다. 두 달간 깊은 고독 속에 안착할 것이라 확신했다. 마음을 여는 만큼 누군가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71 회사 안에서 좁게, 아주 좁게 시선을 유지하고 있을 땐 그 삶만이 가능한 줄 알았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 중 최선의 선택지를 뽑은 거라 믿고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모양의 삶들이 있었다. 그것도 무수히 많이 있었다. 짐작조차 하지 못한 뾰족함을 품고 좁은 길을 온몸으로 밀며 나아가는 삶도 있고, 두려움을 마주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삶도 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안전한 울타리가 없어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을 울타리로 세우며 살아가는 삶도 있다. 이런 용기를, 저런 대범함을, 이상한 긍정을 파리에서 만났다.

271 그 밤, 무수히 큰 세상으로 열린 이 질문이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또렷한 답을 내리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게 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은 사지선다형이 아니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끝없이 뛰어야 하는 마라톤도 아니다. 헤매는 걸 두려워도 말고, 답을 못 찾는 걸 조급해하지도 말고, 조급함에 못 이겨 성급한 담을 내리지도 말고, 내 방식대로, 내 속도대로 살아가보고 싶어졌다.

다양한 모양의 용기를 손에 쥐고

나의 방향으로 뚜벅뚜벅.

276-277 다만 상상해보는 것이다. 아예 닫아버릴 수도 있는 아틀리에를 열어두는 그 마음을. 자신이 사라진다면 같이 사라질 하나의 세상을 지키는 그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만 감춰두지 않고, 많은 이들과 나누려는 그 마음을.

285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저울은 오작동하기 마련이니까.

288 파리는 언제나 내게 어려운 짝사랑 상대였다. 너무 좋아하니까 너무 알고 싶고, 구석구석 나만 아는 매력을 더 찾고 싶고, 내가 모르는 매력은 없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늘 이곳에선 열심이었다. 혹시 내가 못 보고 돌아가는 게 있을까 전전긍긍했다.

291 뭐든 열심히 하려는 습성을 내려놓기 힘든 사람.

293 덕분에 웃으면서 걷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지도가 접히는 순간이 너무나도 내 취향이라서. 낯선 동네에서의 모험에 살짝 팽팽하게 당겨진 마음이, 겨우 이거였어? 하고 탁 풀리는 그 순간, 좀 더 가보고 싶어진다. 대단한 모험인 줄 알았지만 겨우 이거였던 거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용기를 더 내봐도 되는 거다. 무서울 건 없으니.

295 하루는 한 문장 안에 간편하게 요약된다. 하지만 그렇게 요약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나만의 작고도 사소한 모험이 있었고, 그 모험 끝에 나는 요상하게 생긴 나의 보물을 꼭 쥐고 돌아왔다. 객관적으로 예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시장에서는 전혀값이 안 나간다고 평가받을지는 몰라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신비로운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나의 하루를 찬찬히 비추는 걸 보노라면, 그 빛 아래에서 드러난 새로운 나의 모양이 나는 참 반가웠다.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참 만나고 싶었지. 이토록 낯선 나를.

301 자연 속에서만 새롭게 깨어나는 감각들이 있다. 바다의 광활함이 주는 사고의 폭이 있고, 자갈의 재잘거림이 깨우는 청각의 예민함이 있고, 작은 들꽃들이 흔들어 깨우는 마음의 진동이 있다. 그것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와서 나는 그곳에서 아낌없이 행복했다.

301 그런 날이 있다. 이만큼 바란 것은 아닌데, 세상으로부터 과한 친절함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의 하루.

305-306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살지마. 지금 나에게 온 오늘을 살아버려. 내일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고, 내일을 위해 참아야 하는 오늘을 끝내버려. 내일을 위해 오늘 너무 많은 걸 감내할 필요는 없어. 오늘도 인생이야. 아니, 오늘이 인생이야. 머나먼 내일 대신 오늘 하루를 원하는 모양으로 살아버려. 그렇게 원하는 모양의 하루하루가 모이면? 그럼 원하는 모양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310 언뜻 보았을 때는 성마르게 생긴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인간은 한 순간에도 여러 감정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 사람 얼굴 봤어?”라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단정 지으며 이야기하는가. 상대에 대해서 얼마나 주저 없이 간편하게 결론을 내리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의 얼굴로 살지 않는다. 한순간에도 정면과 오른쪽과 왼쪽 얼굴은 모두 다른 말을 한다. 로댕의 우골리노가 그랬고, 론 뮤익의 보트 속 남자가 그랬다. 그리고 매 순간의 우리가 그렇다.

311 미술 작품들은 언제나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답을 던져주는 존재다. 내가 그 답이 필요했기에, 작품에서 그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게 객관적인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간절한 답, 내가 기댈 수 있는 답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312 내일은 저 멀리 두고, 아니, 내일을 차라리 잊고, 오늘을 살면 어떨까. 매 순간의 결들을 풍성하게 맛보며. 다채로운 감정을 곱씹어 차근차근 알아채며. 조금은 느긋하게, 조금은 고요하게, 훨씬 더 깊게.

313 결국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정적인 돈 대신 넘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24시간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정된 삶을 지키는 대신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너무 모든 걸 정하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목표 같은 건 당분간 잊는 건 어떨까. 40년 넘게 정해진 모양대로 살았는데, 앞으로의 모양도 정해져 있다면 조금 슬플 테니까. 무정형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 찬찬히 나만의 하루를 완성해내고 싶다.

314 막막한 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고독한 만큼 깊어질 것이다.

불안한 만큼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이제 끝나지만,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333 꽃만 피고 지는 것이 아니다. 우연이 피고 지고 춤추며 모였다가 또 흩어진다. 너무 흥성한 그 우연의 날을 알아버려서, 지난 기억이 다칠까 겁이 나서, 나는 금방 뒤돌아 나왔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행이라는 우연의 축제를 영원의 축제라 착각하지 말 것.’ 여행자 성경 제1장 1절에 실려야 할 것 같은 이 원칙을 깨트렸으니. 나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333 어쩌면 책 속 파리의 풍경은 파리를 바라보는 나의 내면 풍경일지도 모른다.

334 파리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해버리는 것은 참 귀한 능력이라고. 오래전 분명 자신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그 마음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기분이라고. 좋아하는 마음은, 이토록이나 전염성이 강하다.

부디 이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염되길.

그리하여 멀지 않은 어느 날

부디 당신도 당신의 그곳에 도착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