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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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6 비행기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나의 도시와 멀어지는 그 속도에 맞춰 조금씩 숨통이 트입니다. 마침내 도착한 여행지에서는 한결 차분해진 호흡으로 출근길의 발걸음과 다르게 한껏 여유로이 걸어봅니다.
무거웠던 책임과 부담을 내려놓고 잠시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시간.
잊고 살았던 나를 가까스로 찾아내 후후 불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시간.
수신지, 비행기를 타기 전에
대한민국, 김포공항
이연, 태양계 여행
인도네시아, 발리
54 누군가와 기억을 나누지 않으면, 즉 누군가의 마음에 살지 않으면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을 자신이 스스로 이해해주고 바라봐주면 이내 괜찮아지지만 모든 순간을,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55 사람 속에 파묻혀 지낼 때면 느끼는 고유의 멀미 때문이다. 웃고 있지만 지겹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끔찍하다는 생각, 그냥 홀로 누워 완전히 고립되고 싶은 생각. 그게 내가 늘 홀로 떠난 이유였다. 내게 여행은 낭만이 아니라 도피에 가까운 행위다. 여행지에서는 연락도 안 오고, 내가 이연인지 누구인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약속을 잡을 가까이 사는 친구도 없다. 그러면 모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사람 사이에서 지칠 때쯤 그런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57 내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내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었다.
58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 허지웅,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나의 셈은 틀렸다>, <살고 싶다는 농담>
김신지, 잠시 다른 인생을 사는 기분
태국, 치앙마이, 빠이
64 모르는 도시에 가서 모르는 거리를 헤매고 모르는 숙소에 도착해 실망하는 대신, 아는 도시에 가서 아는 골목을 걷고 아는 숙소에 묵으며 멍하니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66 살다 보면 별게 다 설레네 싶은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렇다면 그땐 그게 ‘별 게’ 맞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 나에게만 특별한 일.
67 입국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환해지는 얼굴, 포옹을 나누는 사람들 뒤로 오랜 비행에 지친 커다란 동물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캐리어들.
68 “이제 집에 가자!”
여행지에서 언제든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걷는 순간이 좋다. 잠시 머무는 숙소를 ‘집’이라 부를 때 우리는 여기에서 만날 순간을 잘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되니까.
72 마중, ‘오는 사람을 나가서 맞이하는 일’. 요즘 들어 평범한 말들이 자꾸 좋아지는 건, 그 말의 참뜻을 이제야 비슷하게나마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까. 사는 동안 마중 나가는 다정이 자연스레 몸에 밴다면 좋겠다. 버스나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 흔들고 배웅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멀리서 누가 온다고 했을 때 먼저 나가 맞이하는 사람이고 싶다. 혼자에서 이르게 벗어날 수 있도록. 기대치 못한 곳에서 반가울 수 있도록. 같이 걸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여행지라는 낯선 곳에서 마중 나가는 설렘을 다시 한 번 경험하려면 아무래도 내가 먼저 집을 뜨는 수밖에 없겠네. 이번엔 어디가 좋을까. 하릴없이 항공권을 검색하며 마중, 마중, 다정한 모국어를 중얼거려본다.
73 아, 이게 나였으면…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곳에 나를 데려다놓기 위해 먼 길을 나서기도 한다.
79 내가 이런 삶을 원했던가? 싶어지는 순간, 사는 일이 끝없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순간 우리에겐 고요하고 평화로운 여행지가 필요할지 모른다. 아, 눈앞의 이 삶이 전부가 아니지, 느끼게 해줄 여행지가. 슬픔과 후회에 너무 오래 발목 잡혀 있기엔 그래, 삶에는 다른 좋은 일도 많지, 생각하게 만들어줄 여행지가.
80 이제 여길 좀 알 것 같은데 떠날 시간이네. 여행이 글너 건가 봐. 내가 답하자 친구가 이어서 말했다. 인생도 그렇긴 하지. 그 말이 사뭇 연극 대사 같아서 우린 마주보고 웃었다. 그치, 인생도 그렇지. 어느새 사는 법을 좀 알 것 같을 때 끝나겠지. 그런 얘기에 웃어버리는 우리는 어린 것도 같고, 이젠 좀 어른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임진아, 혹시 한국 분이세요?
일본, 도쿄
94 이건 내 마음이 아닌데, 졸지에 그렇게 행동해버리면 이상하게 주눅이 든다. 이런 순간들은 나를 놀리듯이 바람처럼 흘러가버려 수습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95 누가 더 가게를 잘 알고, 누구는 일회용 경험만 하고 마는 게 아닌데. 내가 아닌 타인을 뻔히 보는 시선, 이 시선 또한 타지에서 한국인을 바라보는 필터였다.
96 같이 시원하게 웃어버리고 말면 되는데 기어이 진지해졌던 내가 두고두고 싫기도 했다. 속마음을 좀처럼 숨기지 않는 나였지만,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은 있었다.
나는 너랑 도쿄 어디에서라도 서울에서처럼 한국어로 웃으며 떠들고 싶어.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왜냐면 우리는 늘 그렇게 놀았으니까. (…)
102 그간 살며 챙긴 관심사들로 언제든 바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점이 닮은 한국인이었다.
서한나, 카페 사이공
태국, 끄라비
121 꿈은 우리 뇌가 우리에게 특정한 감정을 경험하게 하려고 인물들을 섭외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거래요.
말도 안 되는 인물들과 말도 안되는 잡스러운 상황이 모여서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니. 이것은 내가 좋은 글에 기대하는 것이었다. 꿈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보다도 거기서 느낀 감정이 중요해요.
123 여기에 왔구나, 하는 것을 느끼려고 하면 할수록 여기 같은 건 없다는 사실만 아렉 되었는데,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껐다.
123 지금까지 나는 여행보다 대화, 인터뷰 글 읽기,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 공항까지 가지 않아도 여행할 수 있으니까. 언제나 현실보다 상상이 나았으므로. 그럼에도 종종 홍콩과 니스, LA에 가볼까 하는 것은 기억 때문이다. 나에게는 지루함을 가시게 할 기억이 필요하다.
123 교토에 가는 것은 기대되는 일이지만, 기대와 같은 일은 아니다.
오하나, 쓸쓸한 마음 그럼에도 밝은 쪽으로
일본, 센자키, 시모노세키
14 시인의 시를 멀리 퍼뜨리려는 씨앗 배달부가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쓸쓸한 마음, 그럼에도 밝은 쪽으로 벋어 나가려는 마음이 우리 모두의 본성일 테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을 미스즈의 시에서 발견하고 감동하여 절로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진 것뿐이니까.
고수리, 돌아보면 반딧불이 같은 추억일 거야
대한민국, 숲
157 어떤 빛은 가만히 지켜봐야만 보이지. 자려고 누웠다가 희귀한 빛을 함께 목격한 밤에, 지금이 추억이 되리란 걸 알았다. 가만히 돌아볼수록 작지만 따뜻하게 빛나는 추억. 정말로 그랬다. 숲으로 떠난 모든 밤에 우린 반딧불이 같은 추억을 발견했으니까.
158 흙먼지 날리고 우둘투둘하고 어두컴컴하고 조금은 불친절한 세계. 그러나 단 하루, 숲속 우리 텐트에서만큼은 마음껏 자유로운 세계로.
159 우리에게 캠핑은 새로운 여행이라기보단 반복되는 일상의 연장이었다. 삼시세끼 지어머근 평범한 일과를 주말엔 숲으로 가져갔다. 우리 집을 작게 접어 자동차에 이고 지고 떠나선 땅 한 뙈기에 꾸려보는 주말의 일상이랄까. 하룻밤 숲속에서 살며 노동과 고생과 낭만의 경험치를 쌓아보는 일이 내게는 작은 인생처럼 느껴졌다. 주말이면 한 뙈기 땅에서 하루치 인생을 살아보아싸. 온몸을 움직여 열심히 일하고 먹고 자고 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땐, 어쩐지 잘 살아본 것 같은 뿌듯함이 차올랐다.
165 힘들 걸 알면서도 또다시 떠나고 싶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건 어쩐지 인생을 닮았네.
167 동그란 얼굴들 마주 보고 푸하하 웃어버리고 나면 정말로 다 괜찮아졌다. 고생담이 모험담이 되는 한 끗 차이는 결국 웃음이란 걸. 어쩌면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고생스러워도 다 같이 이고 지고 떠나는 이유를 잠드는 밤과 깨어나는 아침마다 깨닫는다. 새 아침이 쨍쨍하다면 해처럼 기쁠 일이다.
서해인, 구글 지도와 어떤 돌봄노동
대한민국, 하남
181-182 실제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가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매끄러움’이었다. 이것은 이 시대가 운명 지어준 여행을 구성하는 어떤 일붇. 나와 동년배들은 궁금한 게 생기면 주저 없이 검색해 볼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처음 가보는 곳으로 가기 전부터 일말의 불안함을 덜 수 있다. (…)
궁금증을 궁금한 상태로 두지 않는다.
검색 가능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태도.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할 때는 검색어를 조금만 구체적으로 바꾸어보면 결국 궁금증이 깔끔하게 해소되리라는 믿음.
평소에 변수 앞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 말하는 이들도 결국 스스로 돌발 상황을 그럭저럭 대응해나간다. 현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건 인터넷뿐이며 그것은 구글로 대표되는 검색 엔진이다.
183 걷고 또 걷고, 길을 헤매고, 골목을 가볍게 우회했지만 아까 지나친 거리로 다시 돌아온 일까지 크게 개의치 않게 될 때의 즈러움이 있다. 특히 여행 중에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더라도 그곳에 닿기 위한 경로가 현장에서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다.
187 혼자서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정말 그가 혼자서 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걸 발견할 때만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조금만 거들어주면 동생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봉현,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쿠바, 아바나
192 낯선 여행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배낭을 메고 혼자 걸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감정, 바로 해방감이다.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아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여기 머물렀다는 흔적도 없이 훌쩍 사라져버릴 수 있는 이방인의 자격. 자유롭고, 단순하고, 선명해진다. 온전히 나 하나뿐이다. 이름 모를 거리의 어느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있노라면 숨통이 트인다.
여기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도 아무도 필요 없어.
그러니 여기서 뭐든 해도 되겠지만,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무 것도.
196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기를 바라고, 나 또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199-200 하지만 이제 내 손에는 메모지와 종이 지도가 아닌, 스마트폰 속 구글 지도와 전 세계 맛집이 검증된 앱이 쥐어졌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그곳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다. 아무리 낯선 곳이어도 상관없다. (…) 그렇게 찾아가는 여정에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다. 목적을 향해 직진할 뿐이다 .그런 길에는 실패가 없다. 하지만 우연도, 행운도 없다.
실패가 없는 도전.
검증된 방법.
누군가가 가본 길.
202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조심하고 준비하면서 산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경험과 도전에도 모두 검증과 계획이 필요한 세상. 위험한 사건 사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겠지만, 그 조심스러움이 지나치면 우연과 새로움이 들어설 곳이 없다. 간접 경험이 너무 쉽기에 마치 해본 것 같은 기분이 들면 호기심도 쉽게 사라진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경험하고, 적당히 깨달아가며 내 감각은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203 쿠바에서의 시간은 자유롭고 단순했다. 실시간으로 사진을 올릴 필요도, 사람들에게 자랑할 필요도, 지금 어디인지 뭘 하고 있는지 알릴 필요가, 아니 방법 자체가 없으니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제야 여행의 순간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205 검증된 리뷰도, 계산된 일정도 필요 없는 여행. 그래서 완벽했던 여행.
205 결국 모른다. 가봐야, 해봐야, 경험해봐야만 안다.
206 타인의 과거가 나의 현재에 똑같이 적용될 리가 없다. 텍스트와 이미지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날의 날씨와 기분, 컨디션을 비롯해 함께 하고 스치는 사람들과 풍경은 각자 다를 터. 타인의 경험에 책임을 전가하고 한 발만 슬쩍 디뎌보는 일은 반쪽짜리 같다.
206 “알고 싶은 것의 대략 절반쯤은 인터넷이나 책을 찾아보면 알 수 있어.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아. 스스로 생각해내든지, 체험하는 수밖에.”
그에게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어떠했냐고, 달 표면에 내리는 촉감은 어땠는지 물어보아도,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이야기를 백날 듣더라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는 수밖에.
이다혜, 사라진 감각과 선호에 대하여
대한민국, 서울
214 영원히 굳건한 마음은 내게 이런 생김새를 하고 있다. 여행하고 싶다는 기분의 모양새. “다른 도시에서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걷고 싶다.”
216 일상을 여행처럼,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그럴싸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상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노력은 한다.집 근처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애쓴다. 애써야 가능한 일이라면 애초에 그러하지 않다는 진리 또한 받아들일 뿐이다.
217 그런데 그거 알아요? 여행지에서는 이어폰을 꽂고 다니면 여행의 즐거움이 감소한답니다. 여행의 즐거움을 ‘낯섦’에 있다고 믿는 여행자라면 특히 그렇지요. 귀로 접할 수 있는 여러 여행지다운 정보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218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된 소음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순간. 하루 3만 보를 걸으면서도 조금더 걷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반짝이는 여행의 순간들.
225 내가 우리 안에 갇혀서 사육당하는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여행을 다니니까 ,그렇게 다른 존재를 착취하는 방식으로는 여행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하면 여행은 탄소발자국을 열심히 남기는 일이니 뭐 대단한 진보를 이룬 척 하기는 어렵다.
오늘을 더 적극적으로, 여행자로 살아본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곤 한다. 세계의 안녕이든 나의 안녕이든, 이렇게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며 낯선 세계와 부딪히는 여유가 얼마나 남았을까. 이런 심산한 마음을 털어버리려고, 여행 짐을 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