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리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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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무리 힘주어 눈을 감아도, 눈꺼풀 밖의 빛이 사라지진 않는다. 어둠 너머에서 일렁이는 빛을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도 없다. 선미는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깨달았다.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건 작은 티끌 하나로도 충분했다.
51 뭐가 그렇게 간절하냐고? 함께인 지금에 붙들어둘 수 있다면.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광대가 되어 얼마든지 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더 그랬다.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니 함께하는 동안엔 즐거웠으면 한다느니 하는 이타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즐거운 순간을 계속해서 만들어주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기대였다.
63-64 지친 건 아니었고 작전을 바꾼 거였다. 살아갈수록 맞서 싸우고 물리칠 대상보다 지켜야 할 존재가 더 많아졌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사라지는 사람이 계속 생겼다. 한 몸 같던 친구들이 불쑥 떨어져나갔다. 괴로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멈추지 않고 고민했다. 고민하다 보니 정답일지는 몰라도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도무지 완벽히 공략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상이라는 던전을 헤매는 동안 지치지 않게 돕는 것. 친구들을, 삶을 살아내는 동료들을.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는 회복 물약이 될 수만 있다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쯤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토록 쉽고 확실한 찰나가 자꾸만 삶에 달라붙는 피로를 녹이고 몸을 가뿐하게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애쓰고 간절해지리라 결심했다.
66 그날 꿈에 그 여자가 나왔었다. 어떤 내용의 꿈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온 것만은 확실했다. 잠에서 깬 뒤에도 그 여자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으니까. 여자를 향해 “사라지지 마세요”라고 자신이 말했던 것도.
95 “선택할 수 있다는 거,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권력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잖아.”
은경은 친구가 자신의 연인을 동거인이라고 표현할 때, 그 말에는 분명 자조가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연인 관계를 가장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고작 동거인일 때, 그럼에도 그 말이 아무것도 속이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 영영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고.
119 다른 사람들이 추측하는 이유가 아니라 진짜 이유를. 가경은 아니까.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저 두렵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선미는 깨달았다.
127 “난 많은 거 안 바라요. 내 옆사람. 우리끼린 옆사람이라고 하거든요. 다른 부부들이 바깥사람, 안사람 하듯이. (…)”
172 서로에게 몸을 기댄 연인들이 조금씩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만의 새로운 균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195 한수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부디 그러기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유치한 동화의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아는 얼굴들의 모습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더 많이,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201 누군가에겐 온 생애에 걸쳐 간절했던 일이 어디에선가는 무관심 속에 묻힐 뿐이라니.
224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서로가 함께하는 삶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 이후까지도 맡기겠다고 선택하는 건 어떤 마음일까.
238-239 만약 그 결혼식장에 나란히 서 있던 사람이 이순영이라면 어땠을까. 어딘가에 그런 세상이 있다면. 지금 이 세상과 모든 것이 똑같은데 딱 하나만 다른 세상.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사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세상. 그곳에 사는 송미영과 이순영은 가족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겠지. 쏟아지는 박수를 받으며 입을 맞추고, 꽃가루를 맞으며 행진할 것이다.
239 이제 더 이상 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송미영은 매일 밤 잠들기 전 강박적으로 문단속을 했다. 여러 개의 잠금장치로 꼭꼭 걸어 잠근 현관문을 확인하고 뒤돌아서서 집 안을 바라볼 때면, 익숙한 아늑함에 안심이 되면서도 그 아늑함이 바로 거기에만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억울하기도 했다. 나의 시간, 나의 삶, 나의 행복, 나의 사랑이 오로지 이곳에만 있구나. 참으로 안쓰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