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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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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2024-07-29 저자: 이승원 출판사: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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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나무 아래 의자

16-17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쉼이란 단지 개인의 행위나 결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의자’를 만들어야 하고, 함께 쉼을 상상해야 한다. 이 의자는 힘 있는 자가 독점하거나 힘이 없다고 해서 밀려나는 자리가 아닐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 ‘정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지, 즉 멈춘다는 것은 그냥 힘을 빼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멈추기 위해서는 관성에 대한 반작용만큼의 힘, 습관처럼 나아갔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뿐더러, 새로운 힘을 모으는 운동이기도 하다. 멈추는 힘은 새로운 방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멈추는 힘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게서 나온다기 보다는, 지금 자신을 어디론가 밀고 가는 어떤 힘의 속도와 방향에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서 비롯된다. 그렇게 가던 길을 멈추고자 하는 이들은 함께 길을 걷던 서로에게 기대서야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관성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의, 내가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의자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경쟁의식과 의심보다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순간, 정지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정지 운동과 함께, 우리는 그동안 왜 제대로 쉴 수 없었는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왜 정해진 방향으로 가속화되면서 밀려가기만 했는지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는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빈 의자들이 곳곳에 있기를 바란다.

왜 잘 살려고 할수록 불안해지는가?

25 문제는 로봇 공학 3원칙이 잘못되었거나, 로봇을 제대로 제작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로봇과 태양광 자율주행차를 누가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28 이런 통계 수치만 보더라도, 가난과 불평등은 자원 부족이나 기술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 의지가 투영된 전 세계 정치·경제 구조와 실천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30 알제리 출신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자살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결국 왜 살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오늘날의 저 화려한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고백일 수 있다.

33 어떤 이유로든 자살이 끊이지 않고 늘어나는 사회는 불안이 잠식한 사회다. 이 불안은 웰니스라는 욕망의 좌절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웰니스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지금 죽는 것보다, 그리고 지금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믿음 위에 있다. 그러나 건강하고 여유로운 삶이라는 웰니스가 자기성찰과 마음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많은 상품들과 이 상품을 구매할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웰니스에 대한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삶은 불안해지게 된다.

50 공공재가 상품이 되고 누군가가 버킷리스트 목록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 간 차별과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과 의료는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어떤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가족의 삶은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52 잘 갖춰진 좋은 질의 공공재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편리하게 제공되는가의 문제는 한 나라의 복지 수준과 시민의 행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다. 공공재가 과도하게 낭비되지 않도록 적절한 관리와 제도가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이 공공재가 빈부격차나 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불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3 공공재가 상품화되면 공공재 이용의 ‘권리’는 무의미해진다. 상품 구입 능력, 즉 소비 능력만 의미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자기계발을 통한 ‘스펙’은 소비 능력을 키우는 열쇠가 된다.

54 그래서 공공재를 누가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가는 그 사회, 그 나라에서 유지되는 삶의 수준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59 소비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삶에 대한 의지, 삶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66 부채사회에서 실업자는 미래의 노동을 더는 담보해서 쓸 수 없는 상태가 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부채조차 상환할 능력이 없는 상태로 전락한다. 결국 소비 능력이 마이너스 상태가 된 실업자는 사회가 잉태했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실업’을 뜻하는 영단어 ‘unemployment’는 접두사 ‘un’이 내포하는바 정상에서 일탈한 비정상적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67 실업은 사람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조건에 도달할 수 없는, 실패의 상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업은 소비 능력이 전혀 없을뿐더러 사회적 자산과 국가 재정 측면에서 ‘마이너스’로 간주되고, 노동윤리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상태다. 그래서 일을 쉬고 있는 실업은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긴장이 가장 극에 달해 있는 상태다. 실업자를 호모 사케르처럼 취급할수록 불안은 점점 사회를 잠식한다.

74 개인이 부담해야 할 생계비용을 절대적으로 증가시키는 공공재의 상품화와 복지예산의 삭감, 기업규제의 완화 및 불안정노동의 양산 등으로 우리는 항시적으로 불안한 삶에 노출되어 있다.

80 죄책감과 무능력에 따른 현실 도피든, 분노에 따른 개입과 저항이든, 자살은 현실에 대한 모종의 대응이며, 독백이나 방백이 아니라 현실에 혹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거는 행위다. 공교롭게도 자살자는 말을 건 뒤 살아 있는 자들 사이에서 사라져버린다. 말을 걸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중단한다. 그런데 오히려 말을 던진 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더 많은 해석이 오가고, 드디어 살아 있는 자들끼리 대화를 시작한다.

82 (…) “말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되는 이유는 현실의 질서와 법적 담론에서 자신들의 호소가 소음으로 왜곡되고 있다고 느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살을 선택한 자들은 어쩌면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대화가 불가능하구나. 이제 더 살 이유도 방법도 없구나.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하나뿐인 내 ‘생명’을 사용하는 것이구나…’

92 세상을 순전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이미 생물학적으로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면 나눔은 선택적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이 나눔이라는 상호관계적 행위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의지를 전달하고 합의와 협력이 가능하도록 하는 대화를 필요로 하는데, 벌써 이 대화는 ‘언어’라는 커먼즈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전제는 커먼즈가 인간 삶에서 새롭거나 낯선 것이 아니라, 삶과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 존재 형태에 속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98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 제품, 서비스, 이용 규칙과 사회적 관계망을 스스로, 커먼즈의 방식으로 만들고 관리할 수 있다면, 불안을 극복하고 삶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과 차별의 관계를 우정과 환대의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과 소비에 대하여 착각하는 사람들

104 노동은 생명을 유지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외부환경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 환경을 변화시켜나가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노동 혹은 노동의 기회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105 노동(일)이 욕망의 완성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어떤 믿음, 어떤 욕망의 실현을 위한 시작이고 과정이다. 어떤 바람과 욕망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지만, 노동하는 것 자체가 욕망의 완성이나 종착지는 아니다. 따라서 노동을 예찬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 혹은 어떤 욕망의 체계를 앞에 두고 있는지 한번쯤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 노동을 하는 동기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성장과 발전이라는 집단적 목표를 위해 동원될 뿐이라면, 그 노동은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형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108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지 못하는 노동 그 자체는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뿐더러, 불안을 동반하며 또 다른 고통의 원천이 되고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를 만들지도 못한다.

111 이런 현실을 뒤로한 채 외치는 노동 예찬은 주어진 노동이 욕망을 실현하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방법이라는 ‘착각 노동’이라는 판타지를 퍼트린다.

112 이 결핍을 채우는 데 필요한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 욕망이다. 하지만 이 결핍을 채우려는 어떤 시도도 가능하지 않거나 그 시도가 그 무엇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실패할 때,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113 ‘착각 노동’이라는 판타지는 사람들이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면서도, 실업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노동을 충실히 되풀이하도록 하고, 노동에 중독되도록 한다.

114 이러한 강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공부’하도록 이끈다.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사실은 충족시킬 것이라고 믿게 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바로 ‘자기계발’이다. 자기계발을 연마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관한 관심에서 멀어지며, 끝없는 노동의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를 자청하게 된다. 착각 노동이 맞이하는 최후일지도 모른다.

124 그토록 욕망했던 ‘타자’가 사라지거나 ‘타자’가 나를 속였음을 알게 되면, ‘타자’의 사라짐은 이 타자를 좇앗던 나 자신의 사라짐이고, ‘타자’의 기만은 사실 내가 나를 기만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하더라도 무력감에 빠지면서 한탄할 뿐이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조적으로 성찰하거나 저항하기를 감히 시도하지는 못한다.

124 이 불안은 현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대안을 만들 확신이 없을 때 더 커진다. 우리의 육체적 삶은 디지털 세계처럼 포맷만 하면 초기화하여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불안은 허무감과 상실감과 만나면서 더 깊어진다.

125 더군다나 월급이 기대 이하거나 원하는 것을 사기에 턱없이 부족하거나 노동의 결과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을 때, 불안감을 고통과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불안을 털어내고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 듯하다는 판타지를 버리지 못한다.

128 첫째, 과잉 노동은 곧 노동하지 않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비노동 시간(쉼과 여가의 시간)을 줄어들게 한다. 여기서 비노동 시간은 실업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업은 노동과 비노동 시간, 노동과 휴식 모두의 상태에서 추방당한 불안의 상태다.

노동은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려는 목적 행위다. 그래서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감수한다. 하지만 노동이 소외되는 과정은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을 제약한다. 이것은 노동이 욕망 실현의 수단이었지만, 타인의 목적을 위해 강요되고 통제되어감을 의미한다. 결국 결핍의 충족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은 그 목적 범위 내에서 제약될 수밖에 없다.

129 과잉 노동은 일을 더 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고 행복을 추구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전제로 한다. 불안이 커질수록, 현재의 사회적 생산물을 어떻게 정의롭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말할 것도 없고, 상품화된 공공재를 원래대로 복원하고 삶의 존엄성을 보장히가 위한 협력(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은 어려워진다.

130 과잉 노동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바 일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실은 쉬지 못하는 인간을 양산할 따름이다.

130 저소득자들, 여러 이유로 일의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일할 수 없는 사람들, 부채조차 낼 수 없는 ‘소비 무능력자’는 호모 사케르처럼 인간적 가치를 삭제당한 채 이른 바 ‘일반인들’이 결정하는 원조 대상이 되어 막연하고 수동적인 지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132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사회적 연대와 책임의 상징인 복지가 점점 줄고 공공재의 사유화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은 각자도생과 자기계발, 소비 능력의 극대화를 시도하는 생애주기를 낳는다. 이러한 생애주기가 일상의 동선을 변화시키고 있다.

136 무상의료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관련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예방의학을 정책 기조로 삼게 마련이다.

137 치료의학 중심의 유상의료제도에서 질병 예방을 책임져야 할 최우선 주체는 개인이다.

140 과도한 노동과 부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쉼의 시간조차 또 다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적 소비 문화로 변질되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소비 문화 속에서 점점 고립되고,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서 자기가 원하는 관계망을 형성한다.

우리는 언제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

146 통증은 내 몸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면서 내 몸을 지키는 데 필요한 신호로서, 고통과 방어의 경계에 놓여 있다.

147-148 통증의 원인을 모를 때만 불안이 커질까? 그 원인을 알고, 통증을 해결할 방법을 알아도 불안이 커질 수 있다. 바로 통증을 제어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다.

148 삶에서 겪는 일상의 문제, 즉 ‘아픔’과 ‘통증’을 해결할 능력과 자원이 없다면 우리는 소소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불안의 늪이다.

149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아픔을 모두 관리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아픔은 신체적인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을 아우르고 있으며, 이는 정치·사회·경제적인 문제들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153 그래서 진정으로 쉰다는 것은 단지 일을 하지 않는 상태를 넘어, 불안 대신 어떤 기대와 믿음, 설렘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 쉼의 상태는 개인이 느끼는 통증을 가족, 이웃, 사회, 일터의 동료, 공동체가 함께 느끼는 공감의 상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무언가 필요할 때, 주변에서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혹은 엄살을 부린다고 무시한다면, 그가 느끼는 통증은 이내 불안과 고통으로 변할 수 있다.

155 쉴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을 낯설게 느낀다는 수준을 넘어 세상과 항시적 긴장 관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일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고, 개인과 사회의 통증은 결국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불안과 고통이 된다. 우리는 나와 타인의 통증을 공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쉼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쉴 수만 있다면, 함께 느끼는 통증은 함께 살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통증을 치유해내면 함께 살며 즐기는, 공생공락의 삶을 이룰 토대가 마련된다.

156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리와 보존의 노력이 필요하다. 통증 역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신호체계로서 잘 관리되어야 한다.

157 비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즉 죽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은 존재하기 위한 의지,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다.

158 하루살이에게는 입이 없다. 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 자원을 몸으로 투입하는 신체기관이다. 또 서로 협력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내 신호를 보내는 데도 입을 이용한다. 인간의 소리 신호는 언어로 발전했다.

162 그러므로 쉰다는 것은 외부의 강제성을 벗어난 상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기존엄성과 연결된다. 자기존엄성이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 즉 ‘자기결정권’이 보장된 상태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이 자기결정권은 그저 단순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한테 필요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자우너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커먼즈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174 쉼이란 그저 가만히 있는 수동적 상태가 아니라, 쉼을 방해하는 장벽을 허무는 적극적 행위로 나아가야 함을 행동으로 말한 것이다.

184 쉰다는 것은 서로의 아픔과 통증에 공감하면서, 그 아픔과 통증을 해소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우정, 사랑, 연대, 환대와 같은 사회적 관계의 핵심은 바로 이 ‘공감’, 그리고 저 사람의 아픔과 기쁨은 곧 나의 아픔과 기쁨이라는 감정의 교류를 통한 공동의 행동양식을 마련하는 데 있다. 그래서 쉼은 삶을 향한 의지를 함께 만들고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공생공락을 포함한다. 이반 일리치는 산업사회에서 강조되는 전문성보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우선시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과 도구를 직접 이용하고, 행복을 공유하고,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자유를 먼저 생각하는 삶을 공생공락과 연결한다.

186 쉼이 있는 사회는 숲과 같아,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따로 또 같이 차별이 아닌 평등한 차이 속에서 유기적 관계를 이룬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 기반이자, 존재의 의미가 된다. 우정, 사랑, 환대, 연대는 쉼이 있는 사회의 소중한 자양분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187 우리는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당당하게 부정할 수 있어야 쉼이 있는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그 부정은 곧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공생공락의 쉼을 회복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빼앗긴 쉼을 되찾기 위하여

194 장소가 얼마나 안전하고 편안한지, 무엇과 연결되고 무엇을 보호하는지에 따라, 그 장소는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몸이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면, 쉼은 불가능하다. 몸이 있는 장소에 따라 몸의 상태는 달라진다. 장소는 단지 몸이 유지되는 조건일 뿐만 아니라 몸을 규정하는 힘이기도 하다.

196 쉴 때는 쉴 만한 장소가 필요하고, 쉼의 장소는 개방되고 서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 쉼의 장소에 모이고 연결된 존재들은 모두 평등하다. 각자의 삶의 리듬과 속도,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존엄하게 대우받는다. 마치 뭇 생명들이 공생하는 숲과 같다. 쉼의 장소는 중심과 표준이 지배하지 않을뿐더러 단일한 목적과 힘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곳이 아닌, 여유롭고 편안한 곳이다.

198 소외되고 폐쇄된 곳이 아닌 마주침의 공터는 고유의 공간적 특성을 지워버리는 이소토피아isotopia에 맞서, 이 주류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일종의 대항 공간counter-space이 된다.

198 앙리 르페브르는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란 자본주의 도시 공간에 이질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가능케 하고, 이소토피아의 질서와 사람들의 일상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이자 운동이라고 했다.

202 낯설어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들과의 마주침을 거부하고, 그 마주침이 던진 질문을 피한다면, 그리고 행복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선과 가식에 불과한 오멜라스 같은 곳에 남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진정 자유롭고 서로를 존엄하게 대우한다고 말할 수 없을뿐더러 헤테로토피아도 아니다. 여기서 삶의 리듬은 변주가 일어나지 않으며, 그래서 쉼의 가능성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똑같은 리듬이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이소토피아로 남을 뿐이다.

211 하지만 정지는 관성이 작용하는 힘에 대한 반작용이기 때문에 기존 힘의 크기와 방향에 대한 대항 운동이 된다. 불안과 고통, 착각과 과잉을 확산하는 현재의 리듬과 속도를 멈추기 위해, 우리를 일방적으로 끌고가는 힘에 대항하기 위해 ‘정지 운동’이 필요하다. 과중한 경쟁과 무리한 노동은 죽음과 같은 삶을 강요할 뿐이다. 이제 여기서 벗어날 ‘정지 운동’을 시작할 때다.

책을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