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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2023-12-23 저자: 김초롱 출판사: 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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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게다가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을 뿐이지 정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건 이후 우리는 작게라도, 깨우치고 변화한다.

51 “아니에요. 그날 거기를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도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맞아요.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게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겁니다.”

75 ‘착하게 사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아. 위선이나 떨지 말자.’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대신 투명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했다. 실수와 잘못된 행동뿐 아니라 야망이든 욕심이든 질투든 어떠한 형태의 추한 모습과 본능도 솔직히 드러내고 인정하고 반성하며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며 살지 못했고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잘못이 많지만, 그래도 최소한 내 상식과 신조대로 살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다. 그것을 내 자산으로 여기며 살 정도로.

85 우리는 이번 참사를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잖아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각자 다 달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예요.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요.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장 대표적인 노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86 제가 놀림받았으면 좋겠기도 해요, 친한 친구들 중에 웃긴 애들 정말 많거든요. 걔네가 아무렇지 않게 저를 놀려줬으면 좋겠어요.

89 “이기적인 게 나쁘기만 한 것이라고 누가 그래요?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해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96-97 “사람들은 제게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채 혼자 살아남는 것은 다행인 일이 아닙니다.”

97 당사자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고통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무지한가.

98 “그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더라고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떡하겠어’라는 말.”

116 Y는 장장 서른이 될 때까지 15년을 기다렸다. 그 아이가 15년 동안 어른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정말로 어른의 세계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지 기다린 그 마음을 헤야려본다. 마침내 그 어른이 잘못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의 Y의 심정이 어땠을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Y가 한 이야기는 계속 마음에 남았다.

126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가 아픔을 겪어본 의사라서 좋았다. 아파본 사람이라야 아픈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어떤 아픔인 줄 아는, 내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자세히 들여다볼 줄 아는, 건조하지만 깊고 따스한 의사였다.

127 그의 말은 내게 도움을 주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내 반응은 힘들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153 그런데 자아가 강할수록 견디지 못할 큰 사건이 다가오면 더 크게 무너집니다. 줄곧 지금까지 내가 알아서 잘 조절해오던 나의 세계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이에요.

156 “똑같은 사건이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깊이나 정도, 방식은 각자 다른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정말 심각한 사안인데 어떤 사람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이 흔들릴 정도로 힘들어해요.”

172 나는 참사를 향한 사회적 인식이 이렇게 일률적이고 납작한 이유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음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넓은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사람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76 나는 우리 사회가 다른 세대에게, 다른 연령대의 인간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없이 세상에 그저 자신이 사는 방식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다양성에 관심이 없고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문제였다. 참사는 그 행사가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인지 몰랐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나는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183 “(…) 정말 중요한 것, 진짜 문제가 무언지 정확히 모를 때 사람들은 그냥 욕긍ㄹ 하기도 해. ‘그러게 거길 왜 갔어. 그 동네는 어쩐지 옛날부터 별로였어’라는 식이지. 이런 걸 우리는 혐오라고 해. 사람들은 왜 무언가를 혐오할까? 아주 간단해. 세상에서 미워하는 게 가장 쉽거든. 남 탓을 하는 건 편하거든. 그런 자세로는 성장할 수 없어. 우리는 혐오에 지지 않아야 해. 사람들이 자기 시대 문화를 더 즐기고 만끽하도록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우선이지. 본질을 놓치면 퇴보하거나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야. 슬픔은 애도하고 이태원 핼러윈 문화는 안전하고 즐거운 축제의 장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213 슬픔을 비롯해 모든 감정이 아예 소멸하는 것이 우울증이었다.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기쁘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고, 감동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그냥 감정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구멍이 뻥 뚫렸다.

217 내가 세상 저편으로 멀어져갈 때면 나는 언제나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끌려와 현실에 발이 닿았던 것 같다. 그들이 알아차려준 덕에 나는 살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말리지도, 뭐라고 하지도 않을 테니 그냥 있는 그대로 그때마다 말을 해달라는 친구의 말이 나를 살게 했다. 응급처치를 받은 기분이었다.

232 누가 떠먹여야 겨우 먹을 수 있는 일련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이토록 구체적으로 위로를 해준다.

237 그나마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생각에 깊이 파고들지 않고 단순하게 해야 할 일에 몰두한 것이었다고 했다.

259 저는 자살을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은 본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사라져버렸다면, 우리는 ‘왜?’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사회와 무관한, 정신 질환만으로 자살 생각응ㄹ 겪는 분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온전히 정신 질환만을 이유라고 보긴 어렵겠죠. 또 자살을 생각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회 환경과 처한 현실의 영향이 적지 않거든요. 자살이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는 주장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책임이 있는 죽음’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니 사회가 앞장서서 자살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261 “(…)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탓을 하는 것이 너무 습관화되어 있어요. 그게 몹시 안타깝습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 사라지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그 본능을 꺾은 사회적 환경의 책임이 크다고 봐요.”

274 “(…) 우리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꾸거나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내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몇몇 사람에게 작으나마 인식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280 “(…) 문제해결은 지난하고 복잡하기에 어려워요. 반면 협오는 쉽죠. 욕하고 이상한 사람이나 집단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좀 더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 아닌가 싶어요.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면 좋겠어요.”

313 돌아보니 나를 살린 것은 ‘연결감’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내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나를 숨 쉬게 했다. 이 책을 계기로 삶의 무게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과 연결되고 싶다. 내가 살아가듯 그 누군가도 연결감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