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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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모두의 아픔이 보다 자세히 말해졌으면 좋겠다. 엄살이라는 말이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적게 말하고 듣는 일이 원활해졌으면 한다.
정확히 똑같은 아픔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각자 개별적으로 고유한 아픔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고유성을 내밀하게 털어놓을 때, 우리는 더 깊게 공명하게 되는 보편적인 지점을 찾는다.
17 메르스 확산의 원인으로 꼽는, ‘병원 쇼핑’이란 신조어를 떠올렸다. 마음 맞는 주치의를 만나지 못하고, 낫지 않는 통증을 안은 채 이곳저곳 떠도는 것도 지치는데 그 모든 과정을 납작하게 만드는 새로운 낱말의 조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24 나는 병명을 갈망하는 동시에 질병에 속박당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떤 병명으로 인해 세상이 나를 배제하고 외롭게 만들까 봐 초조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급박한 것은 고통스런 통증을 조금이라도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답이 없을지도 모를, 병명 찾기는 계속되었다.
25 피로감과 통증 때문에 못하게 된 것들이 있다. 몸이 꾸준히 아프고 난 뒤 나의 활동이나 공간이 완전히 재편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46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그것은 모두가 수모를 쓰고 비슷한 얼굴이 될 때 느껴지는 안정감과 비슷했다. 누군가의 차림새를 보고 멋대로 추측하거나 판단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 일명 ‘야쿠르트 아줌마’가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미묘한 감정이 요동치던 순간이었다. 체온 유지실은 내게 느슨한 공동체의 공간이다. 가끔은 지겹도록 끈끈한 유대를 제쳐두고, 서로 간의 역사와 현재를 모르는 이들과 약한 유대를 이어나간다. 수영복을 모두 입거나, 반쯤 입거나, 혹은 맨몸인 채로.
95 어린이 시절의 나는 미움도 사랑도 받고 싶지 않다고 자주 생각했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 내 앞에 앉은 친구의 말을 들으며 비교적 먼 거리에 앉은 누군가의 말도 동시에 듣는 재주가 생겼고, 낯선 사람 앞에서 쉽게 속이 얹히거나 손을 덜덜 떨고는 했다.
102 어딘지 어색한 모습과 솔직한 빈틈을 보이는 자들만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이다.
120 불안은 아직 닥치지 않은 일에 미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고, 공포는 실제로 닥친 일에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했다. 나의 두려움은 늘 전자에 가까웠다.
137 세상의 어떤 혼잣말들은 가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홀로 떠도는 것 같다. 정처 없이 부유하다 누군가의 귀에 우연히 들어오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날까”. (…) 그런데 나는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혼잣말과, 말로서 불쑥 튀어나오는 옛 기억의 모습이 그 속담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으로 삼켜지지 못한 말들이 침과 함께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음속 아궁이에서 뜨거운 불을 때다 결국 입으로 피어오르는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158 그녀의 속옷 상태를 감별하고 훈계하는 일명 ‘프로브라감별사’들이 판을 칠 때에야 이것은 초라해질 문제가 아니라 화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59 불안한 사람을 보는 것은 아주 불안한 일이었다. 위태로운 나를 돌보았던 류의 심정을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160 혼나고 초라해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몸을 보다 자유롭게 해주었던 이와 그녀를 훈계하던 이들을 떠올리면서.
165 쉬엄쉬엄이라는 말이 점점 싫어졌다. 아프지 않을 때를 빠르게 누리고 싶었다. 언제 또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정체 모를 통증과 우울감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176 추상화는 내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모조리 삭제한다.
177 그러나 나는 이름 없는 통증과 감정의 기복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붙여지는 나의 병명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성분의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더 많은 상상을 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184 공공의 공간을 생각한다. 특히나 몸이 아프고 소득이 적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한다. 나의 동네에서 그 많은 가정용 의자나 시계, 평상이 사라진다면 아쉬울 것이다.
189 우리의 산보 시간은 모두 구매 행위로 채워졌다. 산보를 통해 자본의 틈을 발견하고자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248 우리는 노스탤지어에 관해 말했다. 미화된 추억과 그에 관한 동경이 우리를 얼마나 기만하는가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살게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했다.
259 어떤 압도적인 슬픔 앞에서, 어떤 압도적인 죄책감 앞에서 위로의 말은 부서진다. 눈물은 갈피를 찾지 못한다.
271 무조건의 돌봄과 사랑은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 지나치게 크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276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모르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었다. 무디는 매번 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몸보다 한참 작은 상자에 들어가려 애쓰거나 밥그릇에 꼬리를 넣어두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은 정말 웃겼다. 무디를 보는 일은 종종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과도 같았다.
277 익숙한 것들은 종종 낯설어졌고 그 낯섦은 신비감과 공포를 선사했다. 하지만 무디의 익숙함과 귀여움은 크기가 아주 커서 그 사실을 자주 잊고는 했다.
294 안정적이지 않은 삶은 불안감을 주지만 적어도 질병을 가진 상태를 버리는 시간이라 여기며 나중을 위해 삶을 유예하는 일을 멈췄다.
295 4년간 아픈 몸으로 살며 나름대로 터득한 노하우들이 있다. 그것은 먼저 내 몸을 잘 관찰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여름에는 ‘쉬엄쉬엄이라는 말이 점점 싫어졌’으며 ‘아프지 않을 때를 빠르게 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분명 쉴 땐 쉬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밤을 새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같은 시간에 약을 먹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땐 우선 메모로 그것을 대신한다.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보면 걸러야 할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