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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소설

체공녀 강주룡

2024-04-23 저자: 박서련 출판사: 한겨레출판

🔖 책갈피

29 혼인이란 것은, 부부가 된다는 것은 동무를 갖는 일이구나. 죽어도 날 따돌리지 않을 동무 하나가 내게 생긴 것이구나. 주룡은 문득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36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내 손으로, 어서 그래하고 싶었습네다. 동무들하고 약조한 바도 약조한 바이지만은.

39 다정하나 쓸쓸하게 말하는 전빈을 보면서 주룡은 속으로 이름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생각했다. 왜나라 다케시면 어떻고 청나라 왕서방이면 또 어떻냐고,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당신이 당신인 것만이 중하다고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전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전빈을 슬프게 하는 생각은 주룡도 하고 싶지 않았다.

65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72 스스로 그러시면 아니 되오. 부엌데기이고자 자처하면 부엌데기 취급을 받고 독립군 행세를 하면 독립군 취급을 받는 거요.

79 전빈에게도 말 못 할 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부대 결속을 해칠까봐 저와 제 아내를 업신여기는 말을 듣고도 웃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따위 결속이 다 무어란 말인가. 여자 하나를, 어린 남자애 하나를 우스개로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 없는 결속이라면 그따위 것 없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저들이 아무리 찧고 빻고 까불어봐야 졸개일 뿐 백 장군처럼은 될 수 없는 건 그래서라는 걸 저들은 언제쯤 깨달을까.

121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낯을 하고 살 것이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번진 먹물을 손으로 가리고 주룡은 집으로 간다.

132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

140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140 구남성의 박해를 받았으니 이는 도리어 모단 껄 되기의 제일보에 진입한 것이다.

153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주룡은 평생 처음으로 제가 고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153 앞으로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163 이상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가슴을 주룡은 어루만진다. 윗가슴에서 돋아난 뼈들이 선명하게 손에 집힌다. 우리처럼 생긴 뼈 안에 뭔가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172 마음대로들 하지. 왜 내가 잘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하는 수 없이 그러는 것처럼 말하는걸까. 원래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을 슬쩍 내 탓으로 떠넘기는 이유가 뭘까.

177 한 사람 나가구 한 사람 들어가는 거이 머 기렇게 큰 차이가 있니?

차이가 크다. 내래 보통 단원이 되지 아니할 거이간. 삼이 니, 내 우에 계속 가입 미뤘는디 모르갔어? 내래 일생을 걸 결심이라야 가입하는 거이 마땅하다 여겨서 여즉 가입 안 한 거이야. 기런데 니가 나간다니 내가 들어가지 않구 배기갔니. 내 니 때문에 조합 들어가는 거이구, 니가 나 가입시킨 거이다.

179 여태껏 자기가 무엇을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제 온 열과 성을 다 바쳐 파업에 참여하는 것이 삼이를 위하는 길이고 옥이를 위하는 길이며 저 자신을 위한 길인 것을 왜 몰랐을까.

180 내 배운 것이라군 예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네다. 여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 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 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얏다는 것.

181 내 동지, 내 동무, 나 자신을 위하여 죽고자 싸울 것입네다.

195 평시에도 우리 여공들보담은 사람 같은 대우를 받고 사이까네 몰랐을 거입네다. 나머지 우리들이 얼마이나 절박한 심정으루 쟁의를 하구 있는지.

199 얼싸안기라도 할 듯이 감격하고 고마워하는 달헌을 보니 또 기분이 묘해지는 주룡이다. 이까짓 여공 하나가 뭐라고 그 모진 말들을 다 견디고 기뻐하는가. 만약 내가 이 사람의 기대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을 끝내 들키고 나면 이 사람 나에게 얼마나 실망하려나. 달헌에게 말한 바와 같이 충분히 숙고하여 내린 결정인데도 재차 삼차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든다.

202 주룡이 말할 때는 미심쩍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회원들이 달헌의 말에는고개를 끄덕인다. 이에 슬그머니 짜증이 나려 하는 것을 꾹 참으며 주룡도 달헌에게 박수를 보낸다.

205 말마따나 사는 내내 손가락질을 받을까,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왔으나 실로 손가락질을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다. 일면 그것은 달헌의 탓이다. 허름한 차림의 여자 하나가 홀로 걷고 있는 것은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하는 일이다. 혼자 있을 때 주룡은 그 자리에 있기는 하나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흙먼지 같은 것이다. 흙먼지는 흰 빨래 같은 데에 앉아야 비로소 눈에 띈다. 보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달헌이 그런 것이다. 희고 고고한 두루마기 같은 인간이 괜히 내 곁에 서가지고 가만히 있던 나를 손가락질받게 한 것이다.

211 주룡은 누구도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더 배웠다고 잘난 것이 아니고 덜 배웠다고 못난 것이 아니다. 저 자신부터가 더 이상은 그런 식으로 평가받지 않기를 주룡은 원했다.

216 내래 언시에 싸우구 싶다 했습네까. 세상에 싸우기 좋아하는 이가 있답데까? 싸우구 싶다는 거이 순 거짓입네다. 싸움이 좋은 거이 아이라 이기구 싶은 거입네다.

217 주룡 씨. 사람은 소진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끼시오. 아껴야 제때에, 쓸 곳에 쓸 수 있습니다.

222 결의를 일단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227 주룡은 다른 조합원들이 따라 하기 좋도록 말을 한 번 접는다. 조합원들 또한 경찰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서도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떨림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240 이어지는 기사들을 읽어가는 동안에 달헌의 가슴은 뜨거워졌다가 식기를 반복한다. 단련되는 무쇠가 극도로 달구어졌다가 이내 급격히 냉각되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이라서, 인간의 정신이라서, 달헌의 마음은 무쇠처럼 단단해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