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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2023-10-01 저자: 황선우, 김혼비 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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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황선우 친구 사이라면, 그 사람을 지켜보며 나만 알게 되는 점들이 두 사람의 역사 속에 늘어나게 마련일 거예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면들을 친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들키기도 하죠. 그런데 혼비씨에 대해서 제가 안다고 언급한 점들은 대부분 혼비씨이 에세이가 가르쳐주었습니다. 게다가 글에 붙들린 것은 한 시절의 일부일 뿐, 사람은 계속 흘러 변화하지요.

11 황선우 혼비씨의 글에는 쉽게 단정짓는 판단, 함부로 폄하하거나 낮춰 보는 시선, 때로는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까지도 점검하고 되돌아보게 붙드는 손짓이 있어요. 그래서 읽을 때 상쾌해지나봅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관람하며 팝콘 집어먹고 사이다 마실 때의 시원함을 주는 게 아니라, 읽는 내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그런 글들이에요. 제 안에도 존재하던 어떤 편협함, 치우침, 뾰족함과 완고함이 께어지기 때문입니다.

30 황선우 더위 속에서는 수평 자세로 누워서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렇게 애써 쉬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여러 일들이 사람을 조금씩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살수록 실감합니다. 눈을 꼬옥 감고, 햇살이 스며들면 앞발로 양 눈을 가린 채 어떻게든 하루에 20시간쯤은 수면 시간을 확보하는 고양이들이란 ‘쉼’을 생명체로 형상화한 모양새 같아요.

35 황선우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위해서는 지나친 열심과 부지런을 금지하고 대신 한 템포씩 느리게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저보다 한참 오래 산 선배가 조금 느긋해도 된다고 얘기해주는 게 참 마음이 놓여요.

35 황선우 이렇게 가마~~~ 있다보면 1주일 뒤, 길어도 2주일 뒤에는 이렇게까지는 덥지 않게 된다는 것. 그러다보면 또 금세 바람이 서늘해진다는 것, 나뭇잎들이 초록을 잃어가다가 문득 여름의 선명함이 그리워진다는 것을요.

44 김혼비 제가 ‘얄밉다’는 표현을 쓰는 많은 경우, 사실은 그 대상이 미웠던 것인데 미움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워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밉다’ 앞에 ‘얄’자를 부여 상황을 귀엽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대충 넘어갔고, ‘밉다’보다 한 단계 낮은 ‘얄밉다’로 감정의 수위를 낮춰 또 대충 넘어갔다는 것을요.

44 김혼비 한 번에 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제 말 속에서 얄짤없이 ‘얄’ 자를 없애고, ‘얄’ 뒤에 숨어 있던 미움과 대면하면서, 미움을 미움 그대로 받아들여야 그 미움을 비로소 해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동안 충분히 해소될 수도 있던 미움들이 ‘얄’자에 막혀 오히려 쌓여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미워할 용기는 미워하지 않을 용기, 나아가 사랑할 용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론 미움을 꼭 버려야 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갖고 있으면 있는 만큼 저의 에너지와 감정을 소진시키는 건 분명하니까요. 꼭 품어야 할 미움만을 정확하게 골라내고 나머지는 계속 버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요.

59 김혼비 그것(’I hope it helps you sleep and rest“)은 제가 몇 달 째 간절하게 원하는 것들이거든요. 두 분께 탁구가 그랬듯 저에게도 오래전부터 꼭 배워보고 싶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라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 몰아서 자는 게 아닌 규칙적인 충분한 수면, 그리고 긴 휴식.

63 김혼비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그리고 일에서만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일상 전반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자주 가는 공간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을 누가 말해주기 전까지 혼자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거나, 뭘 자꾸 잃어버린다거나, 반사 신경이 둔해져 평소보다 어딘가에 잘 찧어 다친다거나, 자꾸 말실수를 한다거나 해요.

66 김혼비 선생님 말씀이, 긴 시간 동안 서서히 번아웃에 이른 것처럼 동난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데에도 서서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요. 잘 먹고, 잘 자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일과 전혀 관련없는 새로운 취미생활을 하기.

74 황선우 다만 여태 내가 쾌적하게 운동할 수 있었던 환경에는 타인의 선의를 믿는 신뢰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구나 하는 점을 깨달았죠. (…) 잠시 멈춘 것도 결국은 수영을 완전히 그만두지 않기 위해서라고요. 좀 이상한 말이지만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언제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100 김혼비 어떤 날에는 슬픔에 휘둘려 아무것도 못하는 제가 나약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날에는 변함없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제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온전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이고, 그래야 한다고 학습된 슬픔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101 김혼비 바깥의 사람이라는 이 거리는 온전한 공감을 불가능하게 하겠지만, 이 거리가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하나씩 찾는 게 애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만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서요.

103 김혼비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는, 애도는 실패해야(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한 말을요. 프로이트의 애도가 고인의 타자성을 지워버리는 ‘망각의 애도’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고인의 타자성을 내 안에 기억으로 보존하는 ‘기억의 애도’일 텐데요. 몇 번의 죽음들을 겪으면서, 저는 데리다의 저 말은 ‘이해한다’의 영역이 아니라 ‘(모르고 싶어도) 알아진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슬픔은, 그리고 기억은,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박혀 있는 것이니까요, 가시처럼.

107 황선우 친구를 만날 약속을 잡고 나면 혹시 내가 놓친 근황이 있을까 싶어 SNS에 들어가서 한 번쯤 훑어보며 예습하는 건 저만의 습관은 아니겠죠?

111 황선우 살면서 가장 많은 위로의 말을 들으면서 아주 많이 고마운 동시에 어떤 위로도 와닿지 않아 놀랍던 기간이기도 했어요.

112 황선우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고 있는 사람의 슬픔은 고유한 것이어서 어떤 위로의 말도 뭉툭하게 미끄러지며 둔하게 비껴갈 뿐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영원히 유창해지지 못할 언어로 서툴게나마 이런 것들을 서로 묻고 답해야 할 거예요. 가끔은 입을 닫고 가만히 거기에 같이 있어줄 수도 있겠죠. 터널 속으로 같이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빠져나올 때까지 지켜봐주면서요.

123 김혼비 큰 웃음 끝에 흔이 “10대, 20대에도 듣지 못한 말을 40대에 듣는 것을 보면 요즘 내가 진짜 못나고 못 미덥고 나약해 뵈나보다”라고 씁쓸해하길래, 네가 아니라 세상이 못 미더워진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단계니, 사이비종교니, 보이스피싱이니, 사기 수법이 워낙 고도로 발달하고 다양해지니 무언가를 덥석 믿기에는 너무 많은 걸 걸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요.

132 황선우 못할 거면 마음을 비워낸 채 즐기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승부욕만 비대한 꼴찌의 비애를 아십니까? 그게 바로 저예요…

133 황선우 ”내년이면 잘 치게 될 거야”라는 희망의 말이 아니라, 내년에도 크게 나아지진 않을 테고 10년은 걸릴 거라는 말이, 그러니까 혹은 그렇지만 그만두지 말고 계쏙하라는 말이 왜 더 힘이 되는 걸까요.

134 황선우 장점을 찾아서 칭찬해주고, 시합에 졌다고 속상해하면 “괜찮아, 이게 다 뭐라고!” 말해주면서 말이죠. 그러려면 10년 차가 될 때까지 꾸준히 못하는 나를 견디면서 계속해봐야겠지만요.

149 김혼비 중년이 되어 다시 만화 <슬램덩크>를 완독하니, 진짜 포기를 모르는 게 아니라 실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 말로나마 스스로를 일으켜세운다는 게 보이더군요.

177 황선우 좀처럼 아프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도 굳세기만 할 것을 요구하는 강인함과는 다르게, 이런 꺾임을 여러 번 반복해본 사람이 갖게 되는 내면의 단단함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아프지 않을 때도 언제든 아플 수 있음을 알고, 어딘가 아픈 사람이 존재함을 알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채고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와 같이 위와 장이 튼튼한 사람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임신을 해보지 않아도 임신이 힘든 일이라는 걸 아는 것이, 사람다움일 테니까요.

186 김혼비 이렇게 어떤 마음과 마음을 장난스레 이어붙여 세상이 가끔씩 툭툭 던지는 유쾌한 농담들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왕이면 선하고 어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계속 꾸게 만들어요. 그래서 누가 오해받기 쉬운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왜 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술은 언제나 저를 조금 허술하게 만드는데, 허술한 사람에게 세상이 좀더 농담을 잘 던져서 그렇다고요.

197 황선우 다정함이란 어쩌면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마음을 쓰는 일이겠지요.

202 김혼비 경칩에는 친구와 함께 개구리뛰기! 역시 계절이란 제가 그 시공간으로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인가봅니다.

212 황선우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 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태풍을 안고서 잔잔하게 살아가듯 그 모두를 품고도 되도록 명랑한 소식을 전하려 애썼지만 실패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덜 검열하고 덜 재촉했던 건 모니터 저편에서 기다릴 수신인의 존재 덕분이었다. 무엇을 써 보내더라도 사려 깊게 읽어줄 혼비씨가 있어서였다. 편지 쓰는 사람은,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을 떠올리면 더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다만 이 사람의 안부와 안녕을 묻는 일이야말로 편지의 처음이자 끝이고 전부라는 것을.

216 김혼비 편지를 쓴다는 것은, 쓰는 동안만이 아니라 쓰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편지를 받을 상대방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일이라는 걸 이번에(이제서야!) 알았고, 떠올릴 때마다 웃음과 기운이 나는 사람을 자주 생각하는 게 얼마나 삶을 즐거운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새삼 온 마음으로 느낀 1년 남짓의 여정이었다.

216 김혼비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 것’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텐데, 그중 ‘함께 나눠서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꼭 물리적인 몫의 나눔이 아니더라도 함께 꾸준히 일상을, 웃음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