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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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가 유능해질수록 나는 무능해지고 있었지만, 좋을 대로 그 평균치를 나의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20 그건 또다른 기만이었을까요, 아니면 일말의 참회였을까요?
30 저는 그 사람의 반복된 거짓과 위증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그 시작과 끝을 알고 싶어요. 단순한 흥미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65 그녀 스스로 그런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굳이 오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83 그녀는 종일 오늘밤에는 물건을 팔거나 인내심을 팔거나, 웃음을 팔거나, 아무튼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다 팔고, 고시원에 돌아와 문을 닫고, 드디어 혼자가 되어, 정말 혼자라는 것을 즐기기 위해 손바닥만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맵고 짠 음식을 먹으면서 땀을 흘렸다 .그러면 머릿속이 멍해졌고, 오직 숨이 막힐 만큼 배가 부르다는 생각만 남았다. 매일 그 사앹로 겨우 숨을 고르고, 잠을 청했다.
87-88 지금도 저는 젊은 여자들을 보면 남자한테 너무 잘해주지 말라고 충고해줘요.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바라는 법이거든요. 어제와 똑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루하다는 말입니다.
91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중경이 있지요.”
“뭐라고요?”
“죄의 무겁고 가벼움이 다르다고요.”
101-102 남편은 내가 부탁할 때, 간청할 때, 정확한 지령을 전달할 때에만 아이를 돌봐주었다. 그런 식으로는 어떤 파트너십도 생길 수 없었다 .아이는 결국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온종일 작은 아파트에 갇혀 아이를 돌보면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 존재가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젊음, 내 자질, 내 영혼, 위대한 것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시간이 아이라는 구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애가 미웠고 아이가 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성을 내며 울 때도 조금의 연민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이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도록 짓뭉개버리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어머니가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104 그 여자는 한때 자신에게 있었던 생기와 아름다움을 남편과 아이에게 빼앗겼다고 믿으며, 그들을 남몰래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그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그 여자의 이름이고, 집이고,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매일 그들을 죽이는 꿈을 꿨고, 한밤중에 일어나 잠든 그들의 얼굴을 손으로 쓸며 안도했다. 그 여자는 삶이 이미 자기를 스쳐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132 “(…) 그 사람도 나도 이제 늙었고 이렇게 하나둘 고장이 나다가 죽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견딜 수가 없는 거야. 한 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늘 꼼짝도 못하게 나를 짓누르며 살았는데, 이대로 끝이 난다면 내 인생은 대체 뭔가 하고 말이야.”
133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135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반듯함이 나의 난잡함을 드러내고, 그의 여일함이 나의 광기를 불러내고, 그의 밝음이 나의 어둠을 일깨운 것은. 나는 그에게 포섭되는 대신 더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외도는 그 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141 돈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욕심이 그녀를 자꾸만 무리한 사칭으로 몰고 갔다.
148 결혼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개입된다. 사랑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자체가 결혼의 동인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결혼한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낯선 사람과 함께 평생 살아가는 일조차 감수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167 그녀는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죄책감이나 후회 따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녀가 품고 온 삶에 대한 증오, 그것이 전부였다.
184 “그곳은 모든 게 희박해요. 공기도, 빛도, 소리도 형체를 가지지 못하고 뿌옇게 무리 지어 머물다 사라져버리죠.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도 점성이랄까 강도랄까, 그런 것들이 약해져서 풀어지고 주변으로 흡수되어버리는 거예요.”
“두려울 것 같아요.”
“아니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감정조차도 흐릿해지거든요. 다만 무료할 뿐이에요.”
“무료하다고요?”
“혼자니까. 절망적으로, 끔찍하리만치 혼자니까요.”
198 그런데도 왜 이 짓을 계속하고 있느냐. 그건 제가 이 일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결국 세계 속에서 그 무기력함, 무능함을 자각한 사람이 아니고는 평생 작가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입니다. 자신의 등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주먹을 날리는 시인의 분노란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227 그의 얼굴은 시시각각 낯설고 친근하게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누구의 용서도 받을 수 없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233 만약 그들에게 구원과 회복이 가능하다면, 나 역시 그러할 것이므로.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240 우리는 좀 더 노력해볼 수도 있었다. 시간을 두고 흩어진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볼 수도 있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인생자 과정이었다고 추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 모든 삶의 가능성을 단번에 잘라내고, 차라리 민둥산처럼 헐벗는 쪽을 택했다. 삶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는 처음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다시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47 아마도 그것은 생에 대한 어떤 증오가,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검고 커다란 구멍이, 우리 두 사람 모두 닮은꼴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한때 저는 제 앞의 모든 길이 막혀 있다는 생각에 주저앉아버린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가 나타나 다른 길을 열어준 이후, 막힌 벽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제야 비로소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미래와 꿈에 대해, 그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죠. 한 번도 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사기든, 모략이든 술수든, 그걸 무슨 말로 부르든 간에, 어쨌든 저는 그로 인해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먹고, 마시고, 손을 잡고 잠드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됭ㅆ지요. 그게 바로 엠이 저에게 준 선물이에요.
247 지금껏 저는 늘 어머니를 속이며 살아왔어요.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저를 기쁘게 하는 게 뭔지, 단 한 번도 정직하게 드러내지 못했죠. 그래서 정작 저 자신도, 어머니도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다시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248 우리는 곧 이곳을 떠날 거예요. 다음에 벌어질 일을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기분이에요. 이제야 알겠어요. 행복이란 이해할 수 없는 낙관과 희망에 가깝다는 것을요.
250 결국 딸애는 나를 앞서갈 것이고, 지금처럼 그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인생이 될 것었다.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이, 그애는 곧 나에 대해 잊을 것이다.
250 그들과 나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모른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