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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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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2025-06-24 저자: 백온유 출판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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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갈피

17 엄마는 나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야단을 맞거나 꾸준을 들은 기억이 없다. 아빠도 엄마와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온화한 성격인데 나는 누구에게 화를 배운 걸까?

19 아빠를 다그치고 의심하고 압박한다. 먼 밈래의 어느 날, 혼자 이 모든 일을 떠맡게 될까 봐 두려워서 아빠를 감시하는 것이다.

51 해원은 쉽게 사과했다. 약간 비굴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지만 일단 사과하고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상대를 더 기분 나쁘게 하는 줄도 모르고.

52 재작년부터 가족을 간병하는 시간도 노동 시간으로 인정되어 나는 최저 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5일. 하루 최대 7시간까지만 인정되지만 그래도 내겐 큰돈이었다.

56 내가 이만큼 컸어도 아직 엄마가 나보다 커서, 엄마를 안아 옮기거나 씻기거나 업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눈으로만 보고 있을 땐 엄마 몸이 깃털만큼 가벼울 것 같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지만, 기저귀를 갈거나 몸을 돌려 눕힐 때엔 엄마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중학생 때까지는 엄마가 빨리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조금만 인내하면 건강한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내가 얼른 간병에 능숙해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하다 보면 엄마를 돌보는 일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점점 더 힘에 부친다.

59 내가 깜빡 존 사이에 엄마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쫓는 마음을 넌 모르겠지. 해원의 빡빡한 일정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한 후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낙오되어 있는지 실감했다. 보통 사람들의 진도를 죽을 때까지 따라잡지 모묘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 미래에 실망하게 되었다.

98 문득, 엄마도 엄마의 좁은 몸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의 유일한 딸이라서 모든 마음을 다 받고 자랐다. 염려, 걱정, 사랑. 엄마를 사랑하면서 엄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낭비로 여긴다는 게 미안하다. 엄마는 나를 키우는 동안 자신의 삶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을까.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칠 때, 기저귀를 갈 때, 우유를 먹일 때.

98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릴는 썩을 것이다. 아빠가 썩든 내가 썩든 누구 한 명이 썩기 시작하면 금방 두 살마 다 썩을 것이다. 오염된 물질은 멀쩡한 것들까지 금세 전염시키니까.

100 아빠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싫었다. 우리 집이 병원이 되면 어떡해. 아빠 방이 병실이 되면 어떡해. 엄마가 우리 집을 장악할 거야. 우리 삶을 장악했듯이.

121 해원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비약이겠지만 더 이상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면 뭘 원하는데?

저 애가 내가 느끼는 고통의 일부의 일부라도 이해하는 것.

과거를 잊고 편히 사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겠다는 것이 고약한 마음이라는 건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누구의 인생은 망했는데 해원의 행복은 보장되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155 “너무 슬퍼하지 마.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한평생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결국 누구 한 명은 우리 손으로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 될 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너는 조금 일찍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 봐.”

(…) 이런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182 아프면 위로받아야 하는 거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그 말이 해원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해 주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를 돌봐 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편히 아플 수 있다는 것을 해원은 깨달았다.

187 환자는 스스로 청결해질 수 없다. 스스로 단정해질 수도. 혼자서는 자신의 손 하나 가지런하게 놓아둘 수 없다. 그 정도는 해원도 알았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손, 반질반질 윤이 나는 손톱, 좋은 향이 나는 이불, 물이 가득 찬 가습기, 푸른색 커튼, 이모각 눈을 뜨면 보이는 자리에 걸려 있는 사진, 브람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까지. 시안이 얼마나 이모를 잘 돌보고 있는지 느껴졌다.

188 해원은 너무나 익숙하고 안정적으로 이모를 간호하는 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이모의 필요를 알고 채워 주기까지 시안이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대책이 없느냐고 말한 겍 미안해졌다.


214 감염병을 겪으며 사람들은 우리 안에 도사리는 무수한 두려움을 공유했고,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은 회복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 마음을 한 번 더 믿어 보고 싶다. 우리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불안을 나눈다면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면서 일상을 지속하는 삶과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작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