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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책 > 소설

혼모노

2025-04-15 저자: 성해나 출판사: 창비

📝 감상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이상의 감상평이 가능할까…

한 편 한 편 마지막 문장 앞에 서서 당혹스러움과 뜨악함, 난처함 등 등골이 서늘하기도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기도 해서 책을 다 덮고 나서는 다소 어질하다…


🔖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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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57 그리고 그 순간…

펑.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예졌다.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65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스무드

혼모노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180 공간을 설계할 때는 요령과 경험도 필요하나 그것만을 불가결이라 할 수는 없었다. 불가결은 상상력이었다. 무형의 공간에 선을 더하고 면을 채우고 종국에는 인간까지 집어넣는 일. 그곳에서 살아갈 인간을 위한 자문자답은 기본이거니와 미학과 독창성까지 살리는 일 그것이 건축가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이었다.

181 여재화 역시 빛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숙고 끝에 창을 넣은 것이었다. 한줌도안 될 인간다움이나마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했기에, 그것은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는 이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공간을 설계하는 여재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우호적 감정

잉태기

289 기억이라는 건 쉽게 미화되고 변질되며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여지를 만든다는 것을, 그 가능성을 믿고 다가갔다간 금세 후회한다는 것을 일전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시부는 몇마디 말에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메탈


335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가 결말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독자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37-338 소설은 건물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으로 어떤 종류의 일을 존재하게 만드는지를 추적한다. 소설이든 건물이든, 인간이 무언가를 ‘짓는’ 과정은그 자체가 언제나 창안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를 담지하기 마련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 이 하나 없고, 만들어진 무언가는 어떻게든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지을 것이며 무엇을 위해 지어야 하나’와 같은 문제는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나.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가 짓고 있는 게 무엇인지 우리 자신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도 쉬지 않으며,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 분투하는 편보다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편이 따르기 쉬운 삶의 관성에 가까울 것이다. 소설은 후자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조명함으로써 역으로 인간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짓는지, 무엇을 위해 짓는지를 알기 위한 노력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편에 힘을 싣는다.

339 이는 짓는 행위의 향방을 결정하는 ‘목적’의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없을 때,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그에 대해 사유하기를 고의적으로 미룸으로써 자신이 택한 길을 상투적으로 걸으려 할 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거대한 폭력에 열정적으로 복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340 인용한 장면에서 구보승은 “견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여재화의 지도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란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용감하게 강단을 발휘하는 존재이지만 불안과 공포를 극단적으로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 희망을 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절망에 내던지며 쉽게 무기력해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용한다.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을 활용함으로써 자신이 설계하는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치로 올리고자 했던 것이다. 구보승에게 ‘빛’은 흔히 알려진 대로 희망에 가닿는 교두보와 같은 비유로 고정되지 않고, 도리어 희망과의 낙차를 감지하게 만드는 매개물이라는 의미에서 애매성을 띤 상징으로 해석된다.

343-344 필연적으로 한정된 시야만이 주어진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택한 만큼 우리가 움직인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결말 자리에 남겨진 독자는 그 누구도 특별하게 옹호하거나 비판한 필요도 없다. 다만 소설 속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러한 이해를 시도하는 우리는 어디로 움직일 것이며 무엇을 만들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당도했음을 깨닫게 될 뿐이다. 여기서 선택이란 주어진 보기 중에 하나를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써나가야 하는 주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개인의 사사로운 범위에서 행해지는 게 아니라, 시대와 역사가 우리와 더불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한 과업이 끝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347 이와 같은 시간은 성해나의 첫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분투하는 과정이란 곧 그것을 시도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이야기로 드러난 바 있다.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 이르면 이는 개개인의 관계에서는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이해로, 더불어 그 이야기가 읽히는 동시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해의 요구로 확장되어간다. 성해나의 소설이 상대하는 세상의 범위가 한뼘 더 넓어진 셈이다.

348 하지만 성해나는 주류를 향한 야망을 발휘하는 사람의 속내보다, 주변부의 쇠락을 온몸으로 겪어나가면서 주변부와 중심부의 경계가 분명하게 나뉜 상황의 타당성을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의 속내를 비추는 일에 공을 들인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가늠했을 때 남들이 부러워할 법한 잘사는 삶이라 할 순 없을지라도, 투박할지언정 제 몫의 현실을 감당하려는 이로부터 소설은 세상의 진실을 비끄러맨다.

351 소설이 단지 세태를 드러나는 일에만 복무하고 마는 게 아니라, 작금의 세상에서 우리가 택하고 가꿔나가야 할 진짜 삶의 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354 어떤 현실은 그 현실을 지탱하는 비밀이 버젓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관성을 발휘하고, 유지되는 현실 자체가 어쩌면 우리에게 아직 와닿지 않은 진실의 다른 형태일 수도 있음을 알린다. 비밀과 진실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는 허구의 형식은 성해나의 단편소설에서만큼은 끝내 누설되지 않는 비밀을품은 이야기를 지켜주는 귀로 작동한다. 이 귀는 그러므로 비밀을 품은 진짜를 가려내면서 듣는 일에 활용된다기보다, 진짜가 무엇인지를 묻는 과정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때 구성되는 진실을 섭수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358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떠나간 뒤에도 우리는 변형된 스스로를 받아들인 우리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진짜’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360-361 「혼모노」는 “바나나맛이 나지만 바나나는 아닌 우유”가 친근한 얼굴로 진실한 가짜 맛을 퍼뜨리는 시대, 진실을 허위로 가리는 데 능란한 이들이 목청을 높이는 가운데 진짜 그 자체를 감별하기 어려운 시대, 학습을 통해서라도 ‘의심’을 늦추지 말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해야만 하는 시대에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빌려 ‘참’으로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지, 진실을 중시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일러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진실이 어딘가에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에 있으며, 물리적 실체로 증명되듯 한가지 면모로만 다가오지 않는다고.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느끼는 ‘나’의 자유는 어쩌면 진짜를 ‘믿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진짜로 ‘있고자’하는 노력으로부터 빚어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