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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2024-09-08 저자: 이희주 출판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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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방송국 앞에서, 사람들이 경멸에 찬 눈으로 보거나 욕을 하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라구요.

12 만옥은 지금도 당시의 일기장을 펼치면 눈물 자국을 찾을 수 있으며, 일기장이 누렇게 바랜 것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종이가 그때의 슬픔을 다 삼켜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13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순 있지만 받아들이진 못하는 상태로 한참을 정지 속에 서 있었습니다. 뒤늦게 제 몫을 하려 심장이 뛰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무거워진 피를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렸습니다. 농도가 짙은, 끈적이는 피가 어떤 고통도 희석하지 못한 채, 아니 어쩌면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몰아쳤지요. 빠르게, 무척 빠르게…

15 이런 우리를, 믿기 위해 반드시 소매를 만져야만 하는 어리석은 신도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팬이란 ‘믿는 자’라기보단 ‘사랑하는 자’이며, 사랑하는 자는 끊임없이 번민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던가? 어떤 보이지 않는 기적보다 단 한 번의 접촉이 믿음을 만든다면 구세주는 기꺼이 그 소맷자락을 내미는 게 옳았다. 나는 그것을 만지지 못해 애가 탔다.

15 백 명의 팬이 있다면 사랑하는 백 개의 방식이 존재하겠지만, 멤버들의 개인 스케줄까지 따라다니는 사생팬은 척결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었다.

23 사람들은 소중한 것일수록 기록을 통해 남기려고 하죠. 그러나 어떤 기록도 순간의 모방일 수밖에 없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남겨져야 합니까?

24 하지만 기억 역시 변질되기 마련이더군요. 마치 꽃처럼요. 어떤 순간을 기억해야지, 하고 의식하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서 잘려 나와 뿌리를 잃어버리는 꽃. 나는 두려웠어요. 자주 만지면 금세 시들고 오래 두면 말라버리는 꽃이. 특별한 한때, 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기 위해 내 손으로 죽인 그 기억은 얼마나 오래갈까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을 그 박물관은 얼마나 고독할까요. 거기에선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의 냄새만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겠지요. 시간이 더 지나면 그마저도 익숙해져 맡을 수 없게 되겠지요.

고민 끝에 내가 택한 것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그 안타까움을 받아들이는 쪽이었어요. 한순간을 미련 없이 사랑하자. 그리고 떠나보내자. 사랑을 그냥 사랑 그 자체로 두고 어떤 의도도 개입시키지 않기로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어느 날, 처음에 느꼈던 솟구치듯 사랑하던 감정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62 만약 내가 누군가의 팬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은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71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때 기다리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게 된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83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에 끌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지 나이 때문에 나를 괴벽한 사람으로 본다.

100 네가 해외로 나가는 게 싫지만은 않다. 엊그제, 네가 이곳을 떠나고 나자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이력서를 넣고 전화 온 두 곳의 면접을 봤다. 오랜만에 머리를 써서 책도 읽었다. 네가 여기 있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너는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 닿을 만한 거리로 돌아오면서 괴로움도 함께 가져왔다.

109 그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아주 잠깐의 순간이지만 진실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너를 가진다는 생각만 해도 괴로웠고 네가 누군가를 쳐다보기만 해도 괴롭다면 네가 사라지는 게 옳았다. 내가 너를 포기하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으므로 그게 최선의 답이었다.

109 멀어지기 전 그 친구는 나에게 네가 사랑하는 건지 괴로워하는 건지 헷갈린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만두지 못할 거면 즐겁게라도 해.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하자!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그게 불가능했다. 어떻게 즐겁게 해? 보지 못하는 날엔 눈앞에 없어 괴롭고, 보는 날엔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 괴로운데. 그를 웃게 할 수도 없고 내 이름을 들려줄 수도 없는데.

113 너에게 자주 선물을 주는 사람, 너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서 올려주는 사람,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비공개 행사든 해외든 상관없이 쫓아다니는 사람이라면 너는 그것이 너를 향한 강한 애정의 증거라고 받아들이고 다른 팬보다 그들을 좀더 소중히 여길 터였다. 너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의 카메라를 한번 더 쳐다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내가 그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견뎠다.

113 이런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네가 나를 태우고 말 거라는 예감.

128 밤이 깊었고 얼마 뒤면 진짜 눈이 내릴 터였다. 그러나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으며 나는 아름다운 것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차갑지 않고 아름답다면 그게 더 나은 건지도 몰랐다.


141 나는 그들로 인해 기록하는 것이 나의, 아니 망각하는 모든 인간이 해야 할 저항이라는 걸 알았고, 설령 망각에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의무라는 걸 알았거든요. 또 복잡한 세상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한철과 그 시절 팬의 일상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는 것도요.

143 기다리는 시간도 데이트의 일부잖아. 데이트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은걸.

155 민규를 향해서도 늘 네가 행복했으면 됐어, 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 그래서 모두의 기억 속에서 그가 잊혀질 때 쯤, 그제야 나 혼자 그를 가졌다고 안심할 사람이었다는 거. 저는 가끔 그런 느낌을 만옥씨에게 받았고, 그때마다 소름끼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심정을 완전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어요. 왜냐면 저도 때론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알았고, 언제라도 그 맨얼굴이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주의하곤 했으니까.

165 근데 재밌는 건, 그게 그 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불쾌하게 한다는 거야.

어떤 의미에서?

아닌 척해도 대접받기를 원하고, 자기가 지나가면 시선이 쏠리는 걸 은근히 바라는 게 인간이란 말이지. 그런데 팬들 옆을 지나갈 때는 그런 게 없어. 아무리 슈퍼 꽃미남이 지나가도 걔네들은 자기네 오빠가 언제 올지에만 신경을 손두세우느라고 다른 건 무시하거든. 그러니까 이때까지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인간들은 충격을 받겠지? 요컨대 아저씨들이나 뭐 그런, 자기가 말하면 주목받는 게 당연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이런 사람들일수록 더. 그래서 치를 떨면서 빠순이니 뭐니 손가락질하는 거야. 너네가 감히, 날? 이런 생각에.

174 저는 신이 나서 미친듯이 뛰었는데, 잠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들떴는데, 돌아보니 만옥씨는 그 눈을 차분하게 보고만 있더군요. 손에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쥐었다가, 빈손을 펼치길 반복하면서. 마치 그걸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런데 그게 가능할 리 있겠어요. 인간은 체온이 있고, 따뜻하고, 몸속에 피가 도는 이상 눈을 만지면 녹이길 마련인데. 그렇지만 만옥씨는 그걸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다보면 단 하나의 눈송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176 가끔 팬들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해요. 각자 다른 사람들이 뭉쳐 있는 건데 왜 같은 사람처럼 보일까. 그러니까, 멤버들을 기다릴 때 우리는 언제나 평균치의 인간이지, 개개인이 되지 못하잖아요. 참 이상해요. 우리는 내가 가장 그 멤버를 사랑한다! 이런 걸 주장하고, 팬들 안에서도 최고가 되고 싶어하고, 늘 멤버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런 마음이 강할수록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게. 그저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아낌없이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게. 적어도 멤버들 앞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앞으로도 그 일을 멈추지 않겠죠.


187 글쓰기는 소비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사회가 이미 구획해놓은 틀에 딱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자기 서사에의 욕망을 기반으로 하며, 이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계가 아닌 또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미래의 문학은 거기에 놓인 절박한 의지에 달려 있다.

197 작품을 읽는 내내 이 두 가지 태도, ‘사랑을 기록하려는 태도’와 ‘기록 없이 사랑의 실재를 목격하려는 태도’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200 맑은 것은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게 한다. 손에 닿을 것처럼 깊은 곳이 선연히 드러날 때, 그 깊은 곳을 바라보면서 사람은 ‘맑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희주라는 사람과 이희주의 소설이 내게 그러했다. 이희주는 이 소설을 두고 ‘팬의 사랑’을 다룬다는 게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랑’에 대한 소설은 세상에 많고 많다. 그러나 ‘팬의 사랑’을, 더군다나 이런 방식으로 풀어낸 책을 나는 읽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가에 매혹당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 속에서, 매혹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매혹의 끔찍함과 황홀함을 다시 한번 맛보게 될 것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의 몸부림이 처절하게 드러나는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이 ‘맑다’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몸이 투명하리만큼 맑아져서, 그 사람의 몸안에 있는 장기의 움직임과 피의 흐름과 심장의 두근거림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깊고 선명하게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