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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2026-03-10 저자: 배명훈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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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개념은 사실 꽤 유용하다. 민주주의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라도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26 다 그런 건 아니지만, SF는 세계를 담은 이야기일 때가 많다. 그리고 내가 결국 SF 작가가 된 것은 20대 내내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탓이었다.

36 이 기여가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15년 간 주인공 이름이 ‘김은경‘인 SF를 써서 발표하는 일은 생각만큼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다.

41 10여 년 전 <타워>를 출간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를 좌파로 분류했다. 그런데 정치학적으로 내 위치는 현실주의에서 구성주의로 넘어가는 어느 지점이다. 그게 도대체 어디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좌파와 우파보다 많은 눈금이 존재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 이렇게 어떤 대상을 잘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구분할 범주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45 무에서 유를 만드는 선험적 관념의 역할이 결실을 맺어 그 관념을 닮은 실제 사물들이 마침내 풍성하게 자라나는 시기에, 진정한 사물이란 과연 어떤 사물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정답은 ’눈앞에 놓여있는 그 사물‘이다. 그것 말고 실재하는 것은 없다. 세속의 사물은 늘 불완전하고 성에 안 차지만, 천상의 사물보다 한 가지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59 과학은 소재 자체의 성격이 아니라 소재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 정의되는 사고체계이기도 하니까.

63 SF 작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막스 베버의 책을 막힘없이 읽어내는 독서력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적용하는 말랑말랑한 사고력이다. 책에서 배운 것을 교과서 안에 가둬두지 않고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69 그래도 나는 내 일을 계속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교과서 안에 박제해두지 않고, 본질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잡아채서 내가 창조한 세계에 놓여 있는 재료로 다시 조립하는 일을. 그것이 내가 하는 SF다.

79 작가가 자기 관점을 넣어서 의식적으로 다듬지 않으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엉망진창 덩어리는 거대한 기억의 폐기물에 불과하다.

82 SF는 상상하는 문학이다. 하지만 더는 신기한 아이디어로만 승부를 거는 문학은 아니다. SF에서 가치 있는 상상이란 다른 것과 동떨어진 재미있는 발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통합적 상상을 말한다. 그렇게 진화해왔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상상력을 통해 작가는 언젠가 현실이 될 세상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퍼즐처럼 이어 붙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 설계도를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소설에서 ‘세계’란 작가가 묘사한 객관적 사물의 총합이라기보다는, 그 세계에 대한 작가 고유의 해석에 가깝다.

103 맹점과 관점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같은 책을 보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오독의 자유란 그런 것이다.

117 맨 처음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일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고, 결국은 좋은 작가로 성장하고 살아남는 것만이 유의미하다.

121 ”(…) 그게 바로 의미라는 거였겠죠. 무언가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그런 빛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니.“

147 성실하게 사는 일은 기계와 심리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연습을 꾸준히 하고 글이 계속 잘 써지면 근육처럼 올라오는 자존감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남의 성공은 힘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밝뢰면 나 역시 잘될 것이다. 직관과는 너무 다르지만, 우리는 결국 대체재가 아니니까.

200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누가 어떻게 방해하든 내가 그때까지 쌓아놓은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200 작가란 다음 글을 쓸 계기가 충분히 모여 있는 사람이다.

202-203 글쓰기의 반은 답안을 얼마나 잘 써내느냐이지만 나머지 반은 어떤 질문을 지니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질문이 없는 글은 재미가 없다. 자기 질문이 아닌 질문에 답하고 있는 글도 마찬가지다.

219 이것은 일종의 특수 능력이다.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않고, 어느 순간 한발 물러나서 삶의 한 겹을 살짝 떠내는 일.

223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말에 너무나 깊은 안도의 반응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위안거리다. 적어도 어떤 문제는, 내 인생을 통째로 휘감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224 인간은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모든 괴로움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덜컥 패배를 선언할 수는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은 예측이라도 해야 하고, 예측조차 못 하는 일은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 기록조차 하지 못하고 언어의 수면 아래에 침잠해 있는 고통은 얼마나 처참한가. 섬세한 언어는 뭉쳐 있는 응어리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도구다.

225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투쟁을 하면 된다.

241 SF에 담긴 미래는 현재의 반영이다. 단지 현재가 반영되는 방식이 다소 복잡할 뿐이다.

264 우리가 연대한다면, 우리는 늘 있던 그 자리에 똑같이 서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칸막이에 갇혀 지내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