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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2025-11-20 저자: 백온유 출판사: 창비

🔖 책갈피

116 이호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해봤다. 용돈은 거절하면서 몰래 천원씩 훔치는 건 어떤 마음일까. 적은 돈, 없어도 티가 나지 않는 돈을 훔칠 때 느끼는 죄책감이 신세를 지면서 느끼는 부채감보다 가벼운 것일까.

149 그래서 솔직히 나는 죄책감 같은 거 별로 안 들어. 나느 사람 속이려고 아픈 척 연기하지 않거든. 그 순간에 나느 진짜로 아파. 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198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반복되는 일상을 저버리지 않고 평화를 일구는 법은 누가 알려주는 걸까. 그런 게 체득이 되는 인간들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걸까. 동이 틀 무렵 창가에 어른거리는 고양이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우리는 망했다고 홀로 중얼거렸다.

209 집의 자격은 무엇일까. 벽과 지붕을 갖추면 집일까. 아무런 노력 없이 집의 자격을 얻은 공간은 더럽고 황폐했다. 도무지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집이었다. 오랫동안 환기되지 못한 질기고 끈끈한 공기들이 핏물처럼 집 곳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219 내가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인지, 초조함인지, 죄책감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 에너지가 속에서 솟구친다는 사실만을 감각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하루 종일 잠만자던 게 어제인데 오늘은 갑자기 먹지 않아도 기운이 넘쳤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

224 나는 내 말에 취해 걸려 넘어질 정도로 빠르게 말했다. 말이 거미줄처럼 나를 옭아매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228 경우를 향한 내 마음을 채반에 받쳐 거른다면 무엇이 남을까. 너무나 많은 불순물들이 섞여있어 나조차도 내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럴리 없는데도 가끔 내가 경우를 향한 증오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물었다.

255 내가 경우를 어떻게 생각했던 것인지 경우가 살아 있을 때보다 그애가 죽은 후에 더 자주 곱씹었다. 경우가 매번 자발적으로 나서준다고 여겼으나 내가 그애의 등을 떠민 적은 없었는지, 그애의 등 뒤에 숨어서 뭔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종용한 적은 없었는지 생각해보았다.

261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삶이라고 내가 아무리 주장해봤자 나느 살아 있다. 아무리 떨어도 내 체온은 36.5도인 것이다. 이 반성 없는 몸으로 앞으로도 살아가겠지. 이런 내가 이호에게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276 사회적 참사가 남기는 깊은 파장의 시간,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녀야 할 심성의 세계에 대해 예리한 질문의 추를 드리우고 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마땅히 직시하고 품어야 할 공동의 세계를 만난다. 소설은 죄책감과 수치심, 나약하고 의존적인 마음과 더불어 우리에게 누군가를 염려하고 돌보는 마음도 함께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따라가는 혐오와 불안의 정동은 그 자체로 솔직한 기록인 동시에 애도의 과정을 찬찬히 밟아나가는 마음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ㄷ. 이 겸허하고도 신실한 서사의 분투에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77 내가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애쓸수록 미숙함은 쉽게 들통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가만히 멈춰서 살필 수 있는 시선을 주었다.

278 배려를 받지 못한 아이, 좋은 어른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소년이 커서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