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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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옷을 지킨 적이 있다
13 만들어낸 각본을 숙지하고 강화하며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씩 멀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할 때에만 잠깐씩 자기 자신을 만났다.
15 저 아이들도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16 화영은 자신이 무엇을 재밌어하는지는 몰랐지만, 재밌어하는 아이들을 따라 웃고 있으면 진심으로 좋았다.
24 좋은 사람이 되어갈수록 화영은 없는 사람에 가까워져갔다.
29 석현은 알았다. 행인이 몸을 훑어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세세하게 배려받는 것 같지만 치밀하게 소외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38 사람들은 청력 손실이 화영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 지레짐작했고, 그 지레짐작이 화영에게 상처가 되어갔다.
40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는 게 화영의 진짜 문제였다.
74 다정한 관계였지만 깊이가 없었다. 지속성도 짧았다. 그래서 끝까지 다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큐베이터를 옮겨가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들의 따뜻함을 가식이나 거짓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81 어째서 석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듯, 어째서 석현과 헤어지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을 뿐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했기 때문에 석현과 헤어지게 된 것일까.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현과 헤어지게 된 것일까.
관찰의 끝
111 자신의 비밀을 친구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건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했다. 너무 친밀하게 군 것을, 너무 차갑게 군 것을 후회했다. 친구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알쏭달쏭했다. 친구와 멀어질 때마다 상처를 받았다.
145 곁에 계속 서 있는 것. 그것이 보라가 말한 싸움이었다.
146 그 순간 문득 우주는 말하고 싶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타협하거나 조율하지 않으면서. 명백한 사실을 명백한 사실 그대로. 설명서처럼 자세하게.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154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상한 일이 해선 안 되는 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우주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것을 배워왔다.
166 그들에게 우주는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왜 그만뒀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기다렸다. 말하고 싶다면 할 수 있도록, 말하지 않고 싶다면 하지 않아도 되도록.
167 미래에 대해서라면 이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주는 깨달았다. 무성르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 우선 옆돌기부터 마스터할 계획이었다. 이 사람들은 놀라거나 박수를 치거나 눈썹을 찡그리지 않을 것이다. 나무나 물을 볼 때처럼. 옆돌기를 오직 옆돌기로 볼 것이다.
화롯불 속의 알밤
188 “처음이라는 건 참 좋은 거지. 진실뿐이니까.”
189 보라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아빠는 묻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했으면서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처럼 억울한 얼굴이었다.
190 끌어안지 말고 맞서 싸웠어야 했다. 다 내다버릴 것처럼.
195 조금만 기다리면 보라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아빠가 알던 보라가 보라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빠는 몰랐다.
197 똑같이 생긴 것 같은 멸치들이 사실 얼마나 다르게 생겼는지, 수천수만 개의 얼굴들을 꼭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201 보라는 캡틴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언젠가 점장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곳에 불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202-203 “실수 좀 할 수도 있죠.”
(…) 이후로 보라는 종종 효진을 베란다고 불러냈다. 혼을 내는 척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라가 어째서 효진을 불러내는지 효진도 알고 있었다. 입이 삐죽 나온 채로 혼날 준비를 마친 효진에게 보라는 엉뚱한 말을 했다.
(…) 그러나 보라가 정신없이 바쁠 때면 효진은 슬그머니 곁에 와 음식 플레이팅 따위를 도왔다.
207 좋은 사람이 되어갈수록 진급은 더뎌지고 아르바이트생은 그런 선함을 잘 이용하다 사라진다는 것을.
209 그때의 캡틴 또한 그랬을 것이었다. 자신이 쌓아온 시간 전부를 아르바이트생의 한마디 저항으로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의견을 말하는 자유가 쉽게 얻어지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정직원으로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다급함, 자신에게는 옮겨갈 곳도 없다는 절망감 같은 것들이 사람을 뒤틀리게 만든다는 걸 보라는 이제 알았다. (…) 악역을 맡지 않고는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209 “테스트 내일 하겠습니다.”
보라는 씨익 웃었다. 매니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이들에게는 캡틴이 매니저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보라의 태도에는 너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의미는 매니저에게만 전달되었을 것이었다.
211 그러나 보라는 가끔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그래도 한 사람은 이 싸움을 알고 있다는 안도였다. 매니저조차 알아주지 않았다면 너무 외로웠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무너졌을 것이다. 보라는 이제 매니저와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222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은근히 상대를 하대하는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다.
243 순진함은 곁에 누군가가 있어서 따뜻하다고 느껴질 때에 잠시 잠깐 배어나오는 홍조 같은 것이므로, 보라도 순진한 채로 그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적어도 그 밤만은 그들의 꿈을 바라보고 있고 싶어졌다.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25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지만, 정수의 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감각만은 가짜일 수가 없었다.
255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것을 흉내내는 그 세계 속에서 정수는 환영받았다. 동그라미가 가득한 시험지를 돌려받으며 정수는 이 세계가 자신을 허용해주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57 정수는 무언가를 먹는 것과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이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씹고 삼킨 음식들이 정수의 피와 살이 되듯 귀로 들은 것들이 정수의 내부에 자리잡았다. 그것들을 외부의 자극이라 여길 수는 없었다.
261 엄마는 정수가 지나치게 착하다며 걱정을 했다. 정수는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말을 들었다.
“오버하지 마.”
274 자신이 그림을 그린 시간만큼 상대방도 그림을 봐주길 원하게 되었다. 그림을 훑어보는 게 아니라 그림을 함께 겪어주었으면 했다.
292 들었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스스로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끝끄내 알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293 듣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특권이라는 것쯤은 정수도 알았다.
297 네가 나라고 믿어버리면, 네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부각된다는 점은 생각지 못했다.
299 자근 일이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뇌었다. 더 오래 듣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