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여자들
**소위 ‘이상한’ 여자들을 통해 나의 모순적인 면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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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친애하는 나의 ‘미친 여자’들에게
10 처음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 저래’였다. 이 책에 나오는 27편의 영화와 5편의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결점이 있다. 실수로 혹은 고의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을 파괴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피가 철철 날 것을 알면서도 부딪치고 흔들리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여자들의 서사를 만나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11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여자들, 눈을 똑바로 뜨고 싸우는 여자들, 마음껏 욕망하는 여자들, 경계를 넘어 끝까지 가보는 여자들,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된 여자들의 서사를 통과하며 내 안에는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견고한 벽이 조금씩 무너졌다. 영화 속 여자들이 던진 질문은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왜 이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고민하며 나는 쓰고 또 썼다. 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썼다.
11 숨기고 싶었던 지질한 밑바닥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과정은 이상하고 모순적인 진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습관 같았던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가 옅어졌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다. 영화와 드라마 속 그녀들처럼 그리고 나처럼 조금씩 미쳐 있는 보통의 여자들을. 나 자신에게, 그녀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고 싶어졌다. 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용기와 사랑이 자랐다.
1부 세상과 불화하는 여자
왕따였던 나를 오랫동안 미워했다
영화 <우리들> 속 선이와 지아
17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려 노력하는 눈. 나는 저 눈빛을 너무나 잘 안다.
18 아이들의 세계는 투명해서 더욱 잔인하다. 어른들이라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 뒤에서 몰래 할 말과 행동을 아이들은 앞에서 대놓고 한다. <우리들>은 아이들, 특히 여자 아이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와 감정 변화, 말의 뉘앙스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그저 초등학생의 일상을 그렸을 뿐인데 보는 내내 그토록 공포스러울 수가 없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
20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누구를 따돌려도 괜찮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따돌림은 폭력이다. 왕따를 당할 만한 아이는 없다.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왕따 당할 만해서 왕따 당했다고 믿고 있었다는 걸. 그때의 나를 오랫동안 붙들고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선이의 말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괴로웠다.
21 친구 관계가 이전만큼 어렵지 않아진 건 이 관계가 내 삶의 모든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이제 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살아해줄 수 없다는 걸, 내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22 “상처를 겪으면서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편이다. 상처는 상처로 남는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다. 선이는 상처가 있지만 그 상처를 딛고 뭔가 새로운 행동을 하길 바랐다.”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영화 <다가오는 것들> 속 나탈리
30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며 그때의 내가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걸 나는 안다. 이제는 그 무엇도 쉽게 확신할 수 없어 자주 혼란스럽지만 그만큼 나는 섬세하고 유연해졌다.
그게 나예요, 당신은요?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속 티파니
35 좀처럼 사랑하기 힘들어 보이는 뒤틀린 여성 캐릭터를 애정한다.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38 시작은 번아웃이었지만 상담을 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나와 실제 나는 다랄ㅆ다. 강처럼 잔잔하고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 안에서는 풍랑이 자주 일었다. 비교, 질투, 원망, 미움 같은 감정이 찰랑대도 밖으로 티내지 않으려 했다. 세상 쿨한 척, 여유 있는 척 보이려 애썼다. 타인과 주변 상황에 휘둘리는 건 미성숙하고 멋지지 않다며, 자연스레 생겨나는 감정을 죄악시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자책하며 내게 화살을 겨눴다. 자책은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으로 이어졌다.
38 심리 상담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적어도 나 자신은 나를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39 영화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티파니뿐이다. 나늘 구원한 사람은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
41 햇살은 늘 옆에서 반짝이고 있었는데 나는 어디에서 대단한 빛을 찾고 있었던 걸까.
혼자서는 결코 빛날 수 없다는 것. 손에 닿지 않는 완벽을 추구하며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먹구름의 시간을 통과하며 뒤늦게 깨닫는다.
자기 소개하는 게 싫었던 진짜 이유
영화 <더 브론즈> 속 호프
51 메달만이 삶의 목적이 됐을 때 메달을 딸 수 없는 삶을 무의미해진다.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는 그녀만의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현실을 인정하고 초라함을 받아들였을 때 호프는 비로소 열일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거 아닌 현재를 살기로 했을 때 호프는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을 메달보다 훨씬 크다는 것도.
52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삶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내 삶을 믿기 위해서는 불확실학 불안정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속 리사
58 리사에게 지미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과정은 자신의 평범함을 직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59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질투심과 열패감을 동반한다. 나는 결코 쓸 수 없을 것 같은 표현, 내게선 나오지 못할 것 같은 통찰력이 담겨 있는 글을 보면 ‘그래 이거야’ 싶다가도 금세 마음이 옹졸해진다. ‘세상에 이토로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나까지 글을 쓸 필요가 있는 걸까’, ‘그냥 글을 애호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없는 걸까’. (…)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글쓰기는 예정된 실패를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다.
60 지미도 리사도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은 다른 위가 된다. 우리 안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된다. 나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리사도 분명 그 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운동을 했더니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
영화 <아워바디> 속 자영
68 사회적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는 운동은 쓸데없는 일, 팔자 좋은 일이 된다.
71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참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세상은 속삭인다. 모든 것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정말 그런가?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이미 자영은 8년간 책상 앞에서 혼자만의 달리기를 해왔다. 모두가 열심히 달리는데 모두가 희망을 발견하기 힘든 현실이 온전히 개인만의 책임일까.
더는 서울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
영화 <브루클린> 속 에일리스
78 그의 말처럼 서울은 모든 게 투머치다. 서울에 있으면 자꾸만 지나치게 노력하게 된다. 필요 이상으로 나를 증명하고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고 필요 이상으로 애쓰며 살게 된다. 어딘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에 모두가 올라탄 것 같다.
삶의 빈큼을 견디는 일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속 마고
87 나도 알고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빈틈을 견뎌야 한다는 걸.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 이곳과 저곳 사이에 붕 떠 있는 상태를 말이다.
아무래도 거슬리는 여자에 대하여
영화 <스위밍풀> 속 사라
95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엄격하다. 나도 그랬다. 내가 그어둔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내 기준을 넘어선 사람을 쉽게 손가락질했다. ‘나라면 절대 안 저럴 텐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는 걸까’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했다. 동시에 나와는 너무 다른, 나는 결코 될 수 없는 존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박혜윤 작가는 <숲속의 자본주의자>에서 ‘무언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내가 그것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해준다’라고 말한다. 자꾸만 거슬리는 존재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무엇이 나를 건드리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나의 욕망이 서성대고 있다.
2부 웃지 않는 여자
퇴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너에게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속 히가시야마
108 난 적당히가 잘 안 되는 사람이잖아.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회사가 곧 내가 되면 상처가 쌓이더라.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싶었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109 누군가는 불안해서, 누군가는 인정받고 싶어서, 누군가는 일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는 일이 정말로 좋아서, 누군가는 일밖에 할 게 없어서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해.(물론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과노동을 종용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
110 올해의 사원상이 아니라 올해의 노예상 아니냐고, 이러다 회사 건물에 비석 세우는 거 아니냐고 놀려댔지만 몰입과 헌신의 경험을 통해 너는 분명 성장하고 있었어. 나 같은 사람은 얻지 못할 경험이지. 한 편으로는 네가 부럽기도 했어.
두 여성 형사의 ‘애쓰는 삶’이 구한 것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속 그레이스와 캐런
120 그레이스는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체포의 순간을 생색내지 않고 캐런에게 넘긴다. 여성 후배에게 영광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여성 선배. 나도 저런 여자 선배가 될 수 있을까.
122 나의 ‘애쓰는 삶’은 누구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윤리는 무엇일까. 무거운 질문이 꼬리를 문다.
술에 취한 여자는 죄가 없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속 캐시
돈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어요
영화 <종이달> 속 리카
대체 ‘팔자 좋은 여자’가 어딨단 말인가
영화 <십개월의 미래> 속 미래
147 퐁퐁남 서사는 여성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여성이 일을 하지 않고 있는 현상에만 주목한다.
‘애매한 나쁜 년’ 그만하겠습니다
영화 <미스 슬로운> 속 슬로운
제가 진짜 미친년이죠
영화 <죽여주는 여자> 속 소영
170 늙었다고 해서 병들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여주는 여자>에 나오는 노인들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소영은 그들을 위해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노인들이 ‘저 세상에서는 좀 편해지셨’기를 바라며.
3부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
‘오은영 매직’이 우려스러운 이유
영화 <로마> 속 클레오
‘자격 없는 엄마’를 위한 변명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무니와 헬리
192 어떤 빈곤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벗어나기 힘들다. 핼리가 아이를 방임 학대한 것은 맞지만 핼리 역시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 노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핼리와 무니에게는 훨씬 더 일찍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죄 없는 자, 곽미향에게 돌을 던져라
드라마 <SKY 캐슬> 속 한서진
203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현실을 직시하라고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따져봐야 할 현실은 ‘그렇게 했는데 도대체 어떤 세상’이 등장했냐는 거다. (…)”
204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내어 말한다. ‘현실을 버틸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버티지 않고도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그것이 ‘사람의 육아’라고. 참 쉽지 않지만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엄마가 숙자가 되는 순간
영화 <벌새> 속 은희와 숙자
울면서 가출한 어마, 바로 나였다
영화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과 매리언
219 나이가 들면 저절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어른이 그러면 안 되지, 특히 엄마는 더 그러면 안 되잖아.’
219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어른이라는 걸.
완벽한 할머니라는 환상
드라마 <렛다운> 속 오드리
그 여름, 살벌했떤 엄마의 얼굴
영화 <걸어도 걸어도> 속 도시코
242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그러면서 잘 안다고 착각하는) 부모와 자식은, 필연적으로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다고.
이상하고 모순적인 엄마가 될 거야
영화 <로스트 도터> 속 레다
249 왜 이 관계에서는 나만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건지 억울했다. 비뚤어지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밤에 잠든 아이를 볼 때면 죄책감을 느꼈다.
252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253 이기적인 뒤틀린 모성도 모성이라고. 정말로 나쁜 것은 엄마에게 오직 한 가지 마음만 갖기를 강요하는 사회라고. 이런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254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또다시 지나치게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으며 사람은 직접 겪은 것만을 믿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한다. (…) 다음부터 더 적극적으로 소리 내서 다른 엄마와 아이를 도와야겠다고.
4부 조금 다른 길에 선 여자
부부는 왜 결혼 여섯 시간 만에 헤어졌을까
영화 <체실 비치에서> 속 플로렌스
264 사랑이란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나를 바꿔야 하는 일이라는 걸.
266 입을 크게 벌려 “도와줘”, “고마워”, “내가 변할게”라고 말했을 때 나밖에 없던 세계는 조금씩 넓어졌다. 가난했던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온 세상에서 자신밖에 보지 못하면 자신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력은 빈곤해진다. 빈곤해진 마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세상의 어느 것도 밝게 비추지 못한다.” -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남편 몰래 야한 영화 보다 생긴 일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속 아나스타샤
274 각자의 자취방에 살다 결혼을 하고 함께 살면서 느꼈떤 가장 큰 답답함은 내 삶이 더는 나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남편에게 영향을 미쳤고, 반대로 남편의 결정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275 “함께 사는 사람과 싸운다는 건 도망갈 곳이 없어진 거다. 지금까진 누구와의 갈등도 이렇게까지 깊게 제대로 해결할 필요까진 없었다. 이제 절벽을 뒤에 둔 느낌으로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 제대로 잘 싸워야 한다.” - 김하나,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275 함께 산다는 것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자주 벼랑 끝으로 몰며 싸웠다. 그 과정에서 남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지질한 민낯이 모조리 까발려졌다. 남편은 나를 가장 멀리,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다. 남편은 내가 가장 멀리, 깊이 가본 타인이다.
결혼에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 필요하다
영화 <결혼 이야기> 속 니콜
283 동시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서 헤아려줄 거라는 기대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건 진리다.
284 피곤하고 귀찮고 가족끼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다른 모든 관계처럼 부부 관계에도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런 노력 역시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말이다.
284 최선을 다해 싸우고 최선을 다해 이해해야만 비로소 지속가능한 관계. 결혼을 유지하는 데는 처음 결혼을 결심할 때와 조금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 필요하다.
‘라떼’ 타령하는 어른이 되기 싫다면
드라마 <나의 눈부신 친구> 속 레누
294 과거와 지지고 볶지 않아도 될 때, 과거가 현재와 분리된 과거일 수 있을 때, 과거를 추억하는 일은 안전하다. 추억으로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지는 이유다.
295 글을 쓰다보면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럴 때면 기억을 그저 묻어두고 싶은 유혹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발 물러서서 과거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면 비로소 과거가 나를 온전히 통과했다는 예감이 든다. 내가 조금은 투명해지고 정돈되는 것 같다.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해진다. 내가 계속 글쓰기를 하는 이유다.
295 과거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되 과거를 정확하고 깊게 들여다보고 싶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좀 더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미래의 나는 분명 현재의 나를 곱씹게 될 테니까.
남편이 공유인데 뭐가 불만이냐고?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지영
303 “우리 명절에 여행 갈까? “회사 워크숍 가지 말까?” 애매하게 묻지 말고 “우리 명절에 여행 가자” “워크숍 안 갈 게” 분명하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에 따른 책임은 자신이 온전히 지고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사는 게 너무나 힘겨웠을 때 내게 정말로 도움이 됐던 순간은 남편이 내 짐을 온전히 함께 나눠 가졌을 때였다.
304 나는 남편이 나를 돕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처럼 육아와 가사에서 주체가 되기를 바랐따. 내가 서 있는 전쟁터에서 남편이 어깨를 겯고 같이 싸우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관계가 비로소 평등하고 건강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기를 갖고 싶다면
영화 <컨택트> 속 루이스
309 하나부터 열까지 손에 쥐고 통제해야 안정감을 느끼던 내게, 아이는 내 속에서도 나온 아이조차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다는 걸 알려줬다. 아이 덕분에 나는 쉽게 확신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저 증오는 나와 무관한가
영화 <쓰리 빌보드> 속 밀드레드
319 순결하거나 무해하지 않은 피해자라고 해서 그들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피해에도 자격이 있는 걸까. 영화는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한 우리 모두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피해의 자격이 아니라 피해의 내용과 구제다.
323 “(…) 형사가 되려면 사랑이 필요해. 사랑에서 침착함이 나오고 침착함에서 생각이 나오지. 뭔가를 알아내려면 생각이 필요해. 총도 필요 없고 증오도 필요 없어. 증오로는 아무 것도 해결 못 해. 침착함과 생각이 해결하지. 일단 시도라도 해 봐.”
325 선악을 가르고 분노하고 증오하는 것은 오히려 너무 쉽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에 대한 연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만이 옳다는 확신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바라봤을 때 밀드레드도 딕슨도 희망을 되찾는다. 연민과 노력은 사랑에서 나온다. 윌러비의 말이 맞다. 사랑은 힘이 세다.
325 선문답처럼 들리는 이 말을 나는 한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공통의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326 갈라지고 망가진 사회에 내 책임은 없을까. ‘나만 잘 살면 된다’고 팔짱을 끼고 있었떤 건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어진다.
더러운 강도 아름다울 수 있다
영화 <아사코> 속 아사코
335 그때의 아사코와 지금의 아사코는 달라졌고 똑같다고 생각했떤 이야기는 새롭게 쓰여진다. 어떠한 반복도 정확히 똑같은 반복은 없다. 누군가는 분명 말할 것이다. 결국 다시 돌아갈 거면서 애초에 왜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했냐고.
아사코가 바쿠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사랑하느 사람이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바쿠에 대한 미련과 불안을 내내 끌어안고 살지 않았을까. 끝까지 가보지 않는다면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우리는 눈을 질끈 감고 각자의 선택을 내린다. 맥락도 개연성도 없이 무모하게. 인생에는 때로 그런 선택이 필요하다. 선택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짊어진 채.
336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동일한 반복은 아니며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는 분명히 다르리라는 걸 안다. 경계를 넘어본 경험이 내 안에 남아 있을 테니까.
에필로그 - 나라는 우주 안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을 떠올렸다
339 성격은 급한데 미욱해서 모든 것을 한발 늦게 깨닫는 내게 글쓰기가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따면 나는 더 형편없는 사람이 됐을 것이다.
추천사 -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한 미친 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
341 욕먹는 여자들은 알려주었다. 자기됨을 포기하지 않는 일은 소문과 불화와 고독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미친 세상에선 미치지 않고 살 수 없어서 원치 않아도 영웅이 된 여자들이 있따. 그리고 주변에서는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었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겉보기에 멀쩡하고 부지런하다. 책임감이 많고 친절하며 자주 웃어보인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으며 자기 검열이 심하고 스스로를 어정쩡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대개 그러하다. 미쳐버리기엔 너무나 착한 여자들이다.
341 한계를 품은 채 정확하게 욕망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의 가치를 다시금 이 책에서 본다.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한 미친 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