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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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찍어서 동그라미를 받았을 때는 안도하기보다는 부끄러웠다. 일화는 “운이 좋았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우수한 성적은 모두 재능과 노력의 결과여야만 했다.
33 뛰어난 작품은 일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35 월화는 소문을 두려워하는 대신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이 더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말과 행동을 꾸몄다. 그것은 연기에 가까웠다. 연기하는 삶은 재미잇었다. 그들이 지어낼 소문을 짐작하는 시간은 흥미로웟고 짐작이 적중할 때는 짜릿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앞서가고 끌어가는 것. 휩쓸리지 않고 관망하는 것. 그들이 싫어해도 월화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싫어하는 자기는 연기로 만들어낸 가짜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 같으면 상처받는 연기를 할 수도 있었다. 슬프고 우울한 연기도 가능했다. 월화는 자기 짐작대로 반응하는 그들이 우스웠다. 월화는 지는 방법을 몰랐다.
76 장미수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임천자도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딸을 위해. 그것이 임천자가 장미수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97 미수는 오직 자신의 것만 겪을 수 있었다. 천자처럼 순응하거나 미수처럼 저항하지 않고 목화는 판단을 미룬 채 우선 경험했다. 자기 경험을 축적하고 미수의 정보를 취합하고 천자의 깨끗한 장수를 목격한 목화에게는 세 가지 목표가 있다.
첫째, 알아내느 것.
둘째, 통과하는 것.
셋째, 증명하는 것.
104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9 목화는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 살리기 위해서는 목격해야만 했다.
112 조언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삶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들어도 자기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목화뿐이었다. 살아봐야 알 수 있었다. 살아본 뒤 깨달을 진실이 부디 엄마와 같은 내용이 아니기를 목화는 바랐다.
117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말했다.
이유를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거고.
목화가 말을 이었다.
왜 사는지 몰라도 계속 사는 것과 비슷하네요.
125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131 아무튼 뭐든 열심히 하다 보면 좋아하게 돼. 좋아하니까 열심히 하는 거 아니고? 그게 그거 아닌가?
134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하찮게 여기는 존재.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무심한 말 한마디의 진의를 의심하는 상대. 그 간극을 만드는 사람은 목화가 아니었다. 한정원의 상황이었다.
139 사람의 탄생이란, 어쩌면, 뿌리째 뽑히는 것. 사랑의 시작 또한, 어쩌면, 뿌리째 뽑히는 것. 화분의 흙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목화는 그 흙에 라일락을 다시 심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흙을 화분에 쓸어 담고 손으로 다졌다. 한 번 뽑혔다가 다시 심어진 라일락이 처음처럼 거기 있었다. 정원은 모를 것이다.
146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라고.
153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원망하지 않는 것. 후회하지 않는 것. 기대하지 않는 것. 미워하지 않는 것…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가두고 싶었던 걸까.
155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173 너는 네 인생만 살면 돼. 남의 인생까지 네 방식에 끼워 넣으려고 하지 마. 남들 사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그건 지금 네 인생이 마음에 안든다는 뜻이란 걸 아직도 몰라?
178 아무리 들어도 직접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잖아.
190-191 예측 불가능하고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 닥쳐오는 것만 같았다. 삶이라는 폭풍. 내일이라는 폭우. 타인이라는 지진.
203 근심이 어떤 이미지나 기운처럼 그 사람한테 붙어 있는데, 근심처럼 해답도 같이 붙어 있다는 게 포인트야. 각자 자기 근심에서 빠져나갈 길도 같이 품고 있는데 당장 너무 힘들고 아프니까 나갈 길은 못 보고 지옥만 보는 거지. 그렇다고 내 동생이 곧바로 나갈 길을 말해주느냐. 그건 또 아니라는 거지. 바로 말해주면 효과가 없대.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서 굳은 것을 풀고 막힌 것을 뚫어서 근심의 기운을 나갈 길보다 약하게 만들어줘야만 한대. 그래야 자기 힘으로 그 길을 걸어간다는 거야. 내 동생의 역할은 나갈 길 쪽으로 그 사람의 몸을 조금 돌려주는 거고. 그게 무슨 말이겠어. 내 동생이 그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구한다는 뜻이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잖아. 암흑이든 미로든 스스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어.
204 산 사람을 살리는 일.
207 그러므로 저승은 선하고 거짓 없이 맑은 곳. 이승은 거짓과 욕심과 이기심으로 탁한 곳. 그 신화에서 목화는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사랑을 느꼈다. 당신이 죽어서 가는 그곳은 맑고 선한 곳이길 바라는 마음. 이곳에서 당신을 괴롭히던 경쟁과 이기심과 욕심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기원.
(…)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힘’이 사람의 세상에서는 중요하겠지만, 그 세상을 만들고 품은 우주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15 이분법으로 나누면 편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고.
(…) 여기 없는 사람이 나를 도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켜줄 수 있다. 그 믿음은 내 안에 있다.
227 장미수는 끝내 임천자와 화해할 수 없었다. 임천자는 장미수가 엄마를 계속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랐다. 장미수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자신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아주 올내 후에야 장미수가 깨닫게 될 임천자의 사랑이었다.
233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238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 또한 많이 목격했다. 목화는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했으며 그와 같은 죽음을 원했다. 그러므로 남김없이 슬퍼할 것이다. 마음껏 그리워할 것이다. 사소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목화가 원하는 삶.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처럼 삶과 죽음 또한 나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