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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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59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67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72 노년기에 한 생애를 총체적으로 회고하는 한 편의 자서전이 아니라 삶의 전환점마다 과거가 현재의 글이 되고 그 글이 다시 미래의 씨가 되어 삶을 규정하는 현재 진행형의 자서전인 아니 에르노의 글은 한 개인을 통해 세대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단에 앞서 사회학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아니 에르노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으로 삶과 작품을 구분한 다음, 전기적 사실을 동원해 작품의 이해를 도모하는 양분법적 접근 방식은 유용하지 않다. 작품을 논하다보면 자연스레 삶이 언급되고 삶을 해석하다보면 작품이 근거로 나서는 순환논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84 가난이야 동정과 연대감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이 겪는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이별과 외로움은 그야말로 무익한 수난이다. 그 수난을 겪었던 사람들의 속내를 절절히 형상화한 『단순한 열정』은 이전 작품과의 단절, 배신이라고 단죄될 수 없다. 아니 에르노는 예술, 문학, 소설, 자서전, 나아가 오토픽션과 같은 것으로 호명되길 거부하고 ‘작가’, ‘글쓰기’라는 단순한 용어만 고집한다. 그녀는 기존 장르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개성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만으로도 소중한 작가이다.
85 앞서 말했듯 그녀의 작품이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가족을 상실한 이후에 치르는 애도의 기록이라면 『단순한 열정』은 연인의 상실보다는 자아의 상실을 다룬 작품이다. 부모의 생애를 다룬 전작이 자연스레 작가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기술한 성장소설과 닮았던 반면, 『단순한 열정』『탐닉』『집착』은 한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보여준다. 힘겹게 성취한 지성인의 지위와 자존이 무너져 결국 인간의 원초적 형질, 잔해만 남는 과정을 가혹하게 진술한다는 점에서 이 연작은 독자를 열광시키며 동시에 불편하게 만든다. 『단순한 열정』의 연장선인 『탐닉』과 『집착』은 원제를 따져보면 자아의 상실이란 주제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탐닉』의 원제는 사전적 의미에서 ‘재산, 소유물 따위를 잃다’를 뜻하는 타동사 ‘perdre’의 재귀 동사원형, 즉 행위의 목적어가 주어가 되어 ‘자기를 잃다’를 뜻하는 ‘se perdre’이며 『집착』은 ‘자리를 차지하다’, ‘점령하다’를 뜻하는 동사 ‘occuper’의 명사형 ‘L’occupation’이다. 자아를 상실하고 무엇엔가 사로잡혀 수난에 빠진 여인의 모습은 묘하게도 작가가 그토록 벗어나길 원했던 빈민의 딸, 힘겹게 쌓아온 문화적 자산을 몽땅 상실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퇴행한 것으로 그려졌다.
86 말과 글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소외와 상처를 표현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일 것이다.
87 이 사랑은 그녀의 일상과 몸과 정신과 영혼을 완전히 뒤엎어 놓는다. 넋이 나간 듯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사소한 것이라도 그 남자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온 신경이 쏠린다. 그의 전화를 미친듯이 기다리지만, 막상 그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면 너무도 초조해진 나머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만남의 시간이 끝나고 그가 떠나면 다시 그의 전화만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된다. 한번쯤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이라면 공감이 갈 이야기다.
89 어쨌거나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번역하는 내내 사랑이란 결국 기억이고,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쩌면 기억에 관한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온통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고 환기 시킨다. 하지만 머지않아 모든 게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소중했던 사랑의 기억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는 없다는 듯이…
작가는 어쩌면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잊힐 수밖에 없는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두려 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