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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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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2026-07-05 저자: 정세랑 출판사: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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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갈피

14 마음껏 섣불러도 좋다. 끌리는 영역을 여기저기 내키는 대로, 진중함을 버리고 탐색해보자. 그 탐색이 긴 호흡을 지닌다면 더욱 좋겠다. 잘하는지, 재능 있은지 판단하고 싶겠으나 판단의 시점을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뤄보면 어떨까? 평범한 사람이 아는 단어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어들이 발밑에서 무빙워크처럼 움직이는 감각은 겪어보면 경이롭다. 그 감각을 공유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15 밋밋한 이야기를 쓴다고 여겼던 이가 어느 날 역작을 들고 나타난다. 그 작가가 어떤 매일매일을 쌓아왔을지, 어떻게 몰두하고 궁리하고 돌파하고 견뎠을지 문장마다 느껴져 큰 박수를 보내게 된다. 재능, 개성, 독창성… 뭐라고 부르든 그 반짝거리는 것은 시작 선에서 주어지기보다는 원고지 몇천 매를 넘어설 때마다 조금씩 얻게 되는 뜻밖의 것이 아닐지 싶다.

24 여러 분야를 즐겁게 오가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나서야 고정관념을 버릴 수 있었다. 과거에는 단단히 분리되어 있던 경계들이 점점 유연해지고 투명해지는 것 또한 긍정적인 현상일 듯 하다.

28 창작하는 삶에 대한 오해가 많이 풀리셨는지 모르겠다. 오해와 함께 긴장도 푸셨으면 한다. 좋은 창작물은 이완된 상태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다. 글쓰기를 떠올리실 때 절벽 위 목숨을 거는 도약 말고, 아침의 여상한 스트레칭 정도를 그려주시면 적절할 듯하다. 매일 부담 없이, 각오 따위 없이 바로 할 수 있는 맨몸운동에 딱 들어맞는다.

31 작품들은 언제든 작가의 내면을 생생한 과거로 데려가준다. 그 자신과는 상관없는 내용이더라도 그렇다. 그러한 재경험은 회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헤쳐가고 미래를 당겨오는 힘을 준다. 문학이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도 비슷하리라 상상한다. 언뜻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보이는 이들도 삶의 밀도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흐르는 시간이 흩어져 유실되는 것에 제동을 걸고 싶다면 창작을 택하자.

35 채개을 탐욕스럽게 끌어모으며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읽는 이들이 결국 직접 쓰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건강한 삶의 방식이냐 하면 아닐 테지만, 그 정도의 쏠림이 있어야 안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아닐까? 균형을 잃고 난 상태에서 그 다음의 변화가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9 그에 반해 문학은 슬로건의 반대 지점에 있다. 느리게 세상을 소화하는 일에 가깝고 요약할 수 없음에 방점을 둔다. 사람에 대해서도, 집단에 대해서도,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한 단면만 있지 않음을 말하는 데 온 목표가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복잡한 것을 복잡하다고 그대로 인정하며 천천히 쓰는 글에 대단한 힘이 실리지는 않을지언정 다른 종류의 가치가 깃들지 모른다. 가끔 작품 속 한 문장만 슬로건처럼 따로 돌아다닐 때, 과하게 많은 부분을 생략해 쓰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단정 짓는 방식의 말하기는 선동가적 말하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당신이 웬만해서는 단정 짓지 않는 사람이라면, 빠르고 거친 요약을 내키지 않아 하는 성향이라면 문학과 잘 맞을 확률이 높다. 마음껏 느릿느릿해질 자유가 여기에 있으니 초대하고 싶다.

41 자아가 적당한 크기여야 작가마다 세상을 비추는 손거울이 있고, 한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그 작은 거울에 전체를 담을 수는 없으며, 조각 거울들이 저마다 빛내며 만드는 모자이크가 중요하다는 점을 수월히 체화한다. 평범한 한 사람이 거울을 놓치지 않고 여러 각도고 움직여보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담지 못한 부분은 곁의 사람이 그의 거울로 담을 것이다. 우리의 거울은 각자의 형상과 색채를 품을 것이다. 손바닥의 거울, 감당할 수 있는 크기와 무게일 뿐이다.

45-46 지난 실패들을 살피니, 오로지 실패였다보기다는 공허한 로망들을 효율적으로 제거해주었다는 점에서 성과이기도 했다. 공기 방울들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시원히 터진 모양새와 같다. 만약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잘 맞을지도 몰라. 잘할지도 몰라”하며 이때까지도 근거 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넓힐 대로 넓혀봐야 큰 줄기를 걷어내고 소거하는 게 가능하다. 입구에서 돌아나오더라도 그 길을 직접 가보는 것이 제일 능률적인 방법이다. 한껏 넓혀보기에 용이한 시대를 누비곡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대면으로 비대면으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배우고 접해볼 수 있는 곳이 지철이라니, 과거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49 이때 버티고 고집부려야 할 것 같아도 힘을 빼자. 휩쓸려버리는 상황이 도리어 이상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장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장르가 당신을 고르는 것이다. 항의하고 싶다 해도 항의할 데가 없고, 애호의 대상은 애호의 대상으로 남겨두면 된다.

활개 치듯 넓힌 다음에 정교하게 좁히는, 마치 반죽을 얇게 폈다가 도로 뭉치는 것과 닮은 과정을 거쳐 당신이 꼭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쥐어야 할 것을 쥐길 바란다. 다다라 획득한 것이 애초 목표한 바가 아닐 수도 있으나 그래서 더 즐거울지도 모른다.

70 성긴 평에서 드러나는 것은 저쪽의 바닥이며, 다행히 정교한 쪽이 비교할 수 없이 다수다. 부정적인 정보를 한층 강조해 저장하려는 뇌의 본능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면서 정교한 쪽에 집중해야 하겠다.

88 아름다움과 괴로움이 뒤섞여 그리는 세계의 명암을 자세히 보면서 어떤 그림자들은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소화해내야 한다. 복잡한 것을 복잡한 대로, 이상화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마주 보는 일은 만만할 리 없다.

90 우리가 예사롭게 간주하는 지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예사롭지 않아질 것이다. 나아짐과 나빠짐에 대한 해석조차 강렬히 갈릴 테다. 변화를 고스란히 감지할수록 메스꺼림 비슷한 것을 느끼겠지만, 그 길하고도 불길한 예측들 사이에 당신이 찾는 주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95 어떤 일도 직선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모사하는 데에도 소재 조사는 도움이 된다. 현실의 편린들을 발판 삼아 현실에서 벗어날 때의 해방감을 느끼시길 바란다.

99 아이디어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만인의 것에 가깝고, 먼저 완성하는 쪽이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점에 관해 곱씹게 된다.

  • 인물의 유년은 어떠했나?
  • 인물의 타고난 기질은 어떠하고, 그 기질에 대해 인물과 주변 인물들은 어떻게 느끼는가?
  • 인물은 어떤 집단들에 속해 있고, 집단 내 관계는 어떠한가? 집단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인가, 이견을 드러내거나 반발하는 사람인가?
  • 인물의 자연스러운 장점은 무엇인가?
  • 고치고 싶어 하지만 고치지 못하는 인물의 단점은 무엇인가?
  • 인물의 신체와 정신의 건강상태는 어떠한가?
  • 인물의 일상은 하루, 일주일, 한 달, 분기, 1년 단위로 어떻게 구성되나?
  • 인물이 자신의 일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나?
  • 인물이 작중에서 일어난 비일상적 사건에 대해 어떻게 느끼나? 사건에 대한 정보는 얼마만큼 가지고 있나?
  • 인물이 다른 인물들과 영향을 끼치고 받는 양상은 어떠한가?
  • 인물은 신뢰감이 있는가?
  • 인물에게 비밀이 있는가?
  • 인물의 욕망은 무엇인가? 그 욕망은 얼마나 강한가? 그 욕망이 충족되거나 되지 않으면 어떤 변화가 생기나?
  • 인물은 무엇에 절망을 느끼나?
  • 인물이 사랑하는 대상과 증오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 인물에게 습관이나 기호품이 있는가?
  • 인물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품은 궁극적인 의문은 무엇인가?

107 일관성이 깨질 때야말로 그 인물이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드러난다.

113 결말부에서는 주인공의 간절한 의문이 해소되었는지, 그토록 찾고자 했던 답을 찾았는지 보여준다. 긴 이야기를 통과한 후 주어진 그 답은 주인공과 우리가 예상했던 것에서 멀찍이 벗어난 형태일 수 있다. 바랐던 것을 얻지 못해도 삶을 이해하고, 뜻밖의 평정에 다다르는 일은 가능하다. 이야기가 어떤 경로를 택하든 납득이 가는 결말부를 쓰는 일에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한다.

114 발상을 소멸시키지 않고 완성까지 다다르는 데는 조각나지 않은 시간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다. 조각나지 않은 시간이라 함은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연락도 알림도 없는, 방해받지 않는, 주의가 분산되지 않는, 분절 없이 통으로 이루어진, 질이 높은, 감미로운 고요와 고독과 침잠의 시간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나에게는 적어도 이런 시간이 두 시간은 되어야 글쓰기가 가능하다. 동일한 두 시간이라도 30분 단위로 쪼개지면 소용이 없다. 현대인이 이런 두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는 거의 싸우다시피 해야 한다. 산만한 스스로와, 은근한 듯 요란하게 집중력을 갉아먹는 스마트폰과, 도무지 글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과, 체력을 남겨주지 않는 생업과, 어떨때는 슬프게도 사랑하는 대상과… 전방위로 거절하고 밀어내지 않으면 시간과 주의를 다 뺏기고 마니 어쩔 수 없다. 이기적이고 유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로 조각나지 않은 시간을 획득해야 한다.

121 “좋은 조언자는 작품의 색깔을 지켜주는 조언자예요. 어떤 곳을 바꿔서 그 작품의 핵심이 변형되어버린다면 좋은 조언이 아니죠. 뼈대와 방향성을 어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고쳐서 대폭 좋아질 만한 부분을 짚어줄 수 있는 조언자는 그리 흔하지 않아요. 신인에게 무리한 수정 요구가 오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하세요.” (배명훈 작가님)

129 우리가 내면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사실 몸과 분리할 수 없는 형태라는 것을, 몇 년 전 겨울 독감에 걸렸을 때 체감한 적도 있다. (…) 마음만큼이나 몸도 함께 창작하고 있으니 양쪽을, 결합된 혼란을 잘 돌봐주도록 하자.

130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할 수 있도록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을 과감히 제거해볼 만하다.

149-150 쓰는 일에 의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겠으나 그럴수록 대화 상대를 믿고 써나가자. 쓰는 이쪽보다 읽는 저쪽이 넓고 깊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근래 좋아하며 들여다보는 단어는 ‘삼가다‘이다. 지나침을 경계하고 싶을 때 삼가고 또 삼가야지, 하고 중얼거린다. 동시에 대화 상대를 충분히 믿으면 삼가면서도 대담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읽는 이의 상처를 경솔히 대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영역으로 향하는 일은 가능하다. 기왕이면 웃게 하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문장으로만 이끌어낼 수 있는 웃음이 있으니까. 실없는 종류라 해도 그 웃음을 끌어내 수집하고 싶다.

153 진짜 읽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읽고 싶어 찾았는데 발견되지 않거나 수가 적어 아쉬웠던 경우가 있었는지. 그런 다음 스스로 간절한 것을 써내면 설령 누가 그 결과물에 실망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다.

154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과연 누구에게 닿을지, 스며들 수 있을지 막막할지라도 그 막막한 방향으로 계속 걷자. 길도 없는 곳 같지만 목적지에는 그 이야기와 운명처럼 딱 맞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테다.

159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절 때문에 틀어질 사이는 어차피 언젠가 틀어지니 거절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163 무너진 상태에서는 어디가 무너졌는지 잘 보이지 않기에 혼자서는 헤쳐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나니 동료들을 한층 떠올리게 된다. 타고난 예민함으로 삶을 포착하곤 하는 창작자들이, 취약한 부분을 안고도 죽지 않고 살아가면 좋겠다. 안쪽을 들여다보고, 도움을 받고, 쉬고, 회복하길 바란다.

쓰는 사람들은 쓰는 일에 매진해도 좋다. 노출을 줄이고 적막한 곳에 있어도 좋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처럼 존재감을 발휘해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은 과감히 밀어내도 괜찮다고 꼭 써두고 싶다.

167 사람들이 부주의해 실수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들지 않고 가끔은 귀엽기까지 한데, 사람 아닌 것이 저지르는 실수는 거북하기만 해서 신기하다.

180-181 어떤 일을 선택하고 또 어떤 일을 거절해야 할까? 유행하는 키워드를 소모적으로 뒤따라가는 기획보다는 시대를 타지 않는 본질적인 주제의 기획을 택하는 쪽이 좋다. 제안의 내용이 한 번에 명료하고 정연하게 설명되는지, 마감일과 원고료가 명시되어 있는지 기본적인 부분을 경시하지 않도록 하자. 그 일을 함으로써 궁금했던 영역의 문이 열리거나 만나보고 싶었던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도 유효하다. 당장의 보상만큼 접촉면이 넓어지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창작자에게 추진력이 된다. 단발적으로 스치는 프로젝트인 줄 알았는 한층 근사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일들이 있다. 완수되고 나서야 판가름 난다는 것이 늘 어렵기는 하다.

181 그때 그 일을 할걸, 그 일을 하지 말걸, 하는 후회는 어떻게 해도 생길 수밖에 없다.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데 결실이 맺히지 않는 경우가 흔하지만, 실패한 프로젝트에서 만난 인연들과 그다음에 놀랄 만큼 재밌고 풍성한 결과를 얻기도 하니 판단을 지연해도 좋다. 실패는 실패로 고정되지 않는다. 가끔은 숨기고 싶었던 실패가 눈길을 끄는 경력으로 반전되기까지 한다.

196 유쾌하고 재밌는 꿈들보다 반복되는 악몽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묻어두고 눌러둔 어둠들을 마주하고 분석한 후 이야기에 녹여보자. 쌉쌀한 향신료처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202 쓰는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주섬주섬‘인 듯하다. 기대만큼 멋들어진 모습은 아니겠으나 헤매고 주워모으며 우리 발걸음이 그리는 점선이 종종 겹치면 좋겠다. 서로의 채집통을 들여다보고 환히 놀랄 수 있도록.

203 바깥의 온갖 현란함이 진정 하고 싶은 일들로부터 살마들을 멀어지게 만들지는 않는지 경계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당신의 약간 어두운 방에 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안쪽으로, 안쪽으로 잠기기를. 막 써낸 이야기의 움직임으로 발이 약간 뜨는 순간을 느껴보기를. 그 찰나의 경험을 거듭하기 위해 지지부진한 나날도 통과해내기를. 아름다운 문진처럼 일상 위에 창자가이 자리 잡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