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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2023-08-13 저자: 천선란 출판사: 현대문학

🔖 책갈피

9 태어나는 것과 만들어 지는 건 그렇게 다르다. 태어난다는 건 목적 없이 세상으로 배출되어 왜 태어났는지를 계속 찾아야 하는 것이기에, 오로지 그것뿐이기에 그 해답을 찾는 시간만큼 심장의 시계태엽은 딱 한 번 감겼지만 만들어진다는 건 분명한 목적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이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것.

12 의식이다. 진실과 상관없는 위로의 행위.

13 감정에는 효율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조가 떠난 뒤 랑이 방패처럼 말했다. 그 감정은 언제 소거될지 모른다. 예정도 없고 기약도 할 수 없다.

16 불현듯 재생되는 것은 마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리움 같아서 나는 그것을 흉내 내고 싶다. 감정을 훔칠 수 없으니 베끼는 것이다.

19 ‘그림에는 감정이 들어가고 사진에는 의도가 들어가지. 감정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의도는 해석하게 만들어. 마음을 운직인다는 건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정지해 있는 그림을 보고도 파도가 친다고, 바람이 분다고, 여인들이 웃는다고 생각하지. 사진은 현상의 전후를 추측하게 하지만 그림은 그 세계가 실제한다고 믿게 돼.’

21 거치지 않은 감정은 지나가는 게 아니라 몸에 쌓인다.

27 “아무도 없잖아, 여기에는”

그 말을 반대로 하자면 여기에 무언가가 있었기에 머물렀다는 말이다. 여기에 있기에 다시 돌아올 거였따면 지카는 왜 떠났던 걸까. 두려워하는 랑을 두고.

28 “어림잡아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아. 인간은 대체로 많은 일들을 어림잡아 생각해서 망친다.”

32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과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건 같은 말 아니겠니? 지키기 위해 죽여야만 한다면.”

35 그렇지만 자격이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이라고, 모든 게 다 준비된 채로 들어가도 생과 사의 줄다리에게서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한다고, 이태 전 사막에서 동료를 잃은 인간이 말했다. 동료는 전조 없이 쓰러졌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왜 죽었는지 알지도, 알아낼 수도 없는 채로 그들은 시체를 그곳에 두고 떠났다. 죽은 동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사막이 자연스럽게 그를 품기를 바라면서.

38 “인간은 헛된 희망을 품는군.”

“완벽한 희망을 품어야 하나?”

41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이걸 고고가 가져.’

‘마음에 드는 걸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마음에 드는 걸 선물해야 해. 그래야 너한테 준 걸 내가 보고 싶어서 자꾸 너를 보러 오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랑은 내게 내민 조개껍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랑이 준 조개껍질을 받아 다시 랑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그럼 랑이 이걸 가져야지. 나도 이게 마음에 들거든.’

44’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49 ‘랑은 스스로를 다시 맞추고 있는 거야, 진짜 자신의 형태가 무엇인지, 어떤 형태가 자신과 더 잘 어울리는지 알기 위해서.’

56 ‘의자 들으라고 하는 소리겠어? 내 마음의 문제야, 이건.’

59 “인간이 왜 사막을 무서워하는 줄 아나?”

(…) “조용해서야.”

60 그건 꼭 토라질 때마다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하는 랑의 고집과 닮았다. 나에게 화가 났음을 몸으로 말하던 행위. 내가 알아차릴 때까지. 그렇다면 이 사막도, 사막인 적 없던 이 땅도 인간에게 화가 났음을 침묵으로써 표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비유를 해본다.

60 “사막이 조용하다고 느끼는 건 인간의 청각 기능의 한계일 뿐이다.”

“그럼 더 무섭지 않겠나?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공간이라니.”

63 “크흠, 흠… 감사함을 여기는 것과 그것만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은 다르지.”

70 “힘이 된다면,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면 진실 따위 다 무슨 소용이겠어? (…) 여러 의미로 대단하지 않나?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

70 버진은 내가 보지 못하는 자신의 삶 한편을 들추고 있다. 마모되지 않은 기억의 모서리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날카로움에 손끝이 베이지 않길 기도하는 것뿐이다.

85 하지만 우주에 갈 수 있던 시대의 사람들이 별을 알 수 있었음에 감사하지 않았다는 건 안다. 도시의 불빛은 낮의 태양처럼 밝아 밤에도 별이 보이지 않고, 그렇게 사라진 별을 아무도 찾지 않고, 세상의 범위가 우주로 확장되며 지구를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취급하지 않았던가. 이 마을 하나쯤은 사라져도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라고 착각하며.

93 이것이 이 로봇이 만지는 법이라구나. 두 팔이 없는 로봇은 이렇게 사물을 만지는구나. 멈추기 위해 몸을 던진 것처럼. 버진에게 당신의 말을 이제 이해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97 “만들어준 인간만큼 의미 있는 인간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인간을 만났지만 저를 만든 ‘카일’보다 의미가 크고 소중한 인간은 없었습니다.”

100 집을 침략해 식량을 훔치는 저들의 행동도 살아남기 위한 일이므로 고귀한 것인가. 생존에 모든 추를 놓으면 인간은 존엄성을 잃고 만다. 나는 그때마다 조가 느끼지 않는 두려움을 꼈다. 이상하리만치 생경하게, 저 인간들을 저렇게 보내면 언젠가 다시 찾아와 조와 랑을 죽일 것만 같은 두려움.

103 “중요한 건 결과보다 행위입니다.”

106 “그럼 상관없지 않습니까? 설령 고고가 정말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죽여야겠다는 판단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행위입니다.”

113 그러니까 인간에게 0.001퍼센트는 불가능의 수치와 맞먹는 것일지라도 내게 그 숫자는 ‘존재한다’이다. 불가능과 가능의 기준이 아니라 존재의 유무이므로, 존재할 확률이 랑의 머리카락 한 개만큼이라도 있따면 그것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한 점으로도 남지 않은 새를 좇던 눈을 거두고 검은 벽을 향해, 폭풍이 있는 방향으로 걷는다.

119 버진이 했던 행동 같지만 버진의 행동이 ‘관찰’이었다면 지금 이 인간의 행동은 ‘분석’에 가깝다.

121 진정한 슬픔은 평범한 하루 속에 깃들어 있는데 자꾸 특별한 절망을 만들려고 했으니까.

126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건 언제든 사라질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은 그런 식으로 기억을 유지시켰따. 인류 탄생 이래 계속해서.

130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건 결국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거 아니야? 알 수 없는 건 안다는 것과 달라, 그렇게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없는 거야. 식물도 서로 상호작용을 해. 나는 식물을 오래 관찰해서 알아. 식물도 제 곁에 있는 다른 식물들의 존재를 느끼고 공생한다고.”

133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139 그리움 속에. 그리움은 시효가 기니까.

143 “너는 그곳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했어!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을 했어! 너는 사람을 끌어안아야 하는 로봇이었어. 두 팔로! 네 팔은 다른 로봇의 팔과 달라. 인간을 안았을 때 안정감을 줬어. 너는 그 팔로 인간의 마음을 안았어! 고고, 너는 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네 마음은 진짜야!”

144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가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146 길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존재를, 풍경을 만나 변화한다. 사람들은 실제로 여행을 통해 자아를 찾거나(求하거나) 심지어 돕는다(球한다.) 삶을 담기 위해 발명된 것이 이야기이므로, 삶과 여행이 닮은 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153 로드무비의 형식을 띤 많은 동화와 영화 속 비인간들은 결국 인간의 정수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에 도달하는데 이는 고고와 동일하다. 그러나 선배들과 달리 그곳에 닿는 동력은 랑에게서 왔다. 인간인 랑에게 받은 사랑과 랑에게서 배운 오지랖을 그저 성실히 복습하고 실행한 결과였다.

157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적을 알지 못했던 고고만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목적을 정하고 그렇게 스스로의 이유를 만들어가는 애도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랑과 나의 사막>을 건넌 우리는 기억해내야 한다. 세상이 나빠지는 속도를 그렇게 늦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