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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사랑

2023-12-23 저자: 고수리 출판사: 유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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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내가 살던 곳, 진정으로 마음 두었던 자리. 비단 장소뿐일까, 사라졌어도 추억 속에 사라지지 않는 존재. 그때의 기억으로 일평생 살아가는 위로를 받는 누군가, 무언가. 결국 사람과 사람이 살던 흔적. 그게 진정한 고향 아닐까.

35 아름다운 순간에는 어째서 울고 싶어지는 걸까.

47 ‘한 사람이 어른이 돼서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과 지지다. 사랑받고 존중받고 보호받았던 기억. 그 기억이 살면서 겪어야만 하는 힘든 고비를 넘게 한다’던 김중미 작가의 말처럼, 오늘 우리는 보호받는 존재였지만, 훗날 우리는 틀림없이 누군가를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존재가 될 것임을 믿는다.

51 마주치는 타인들에게 되도록 다정하고 싶다고. 미처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애써 읽어주고 싶다고. 모르는 사람의 그늘은 이다지도 고단하고 슬퍼서, 한여름에도 서늘하게 미안했다. 기대어 머물고픈 그늘이 유난히도 간절한 여름이었다.

62 우리는 저마다 생의 무게를 버티며 걷고 있구나. 누군가의 뒤꿈치에서 문득 그 사정을 알아채는 순간이 있기에.

69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이러주시오.”

객차 안 어린이가 들어야 할 말은 비난과 욕설이 아니라 자세한 타이름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드는 어린이였다. 어린 시절 버스와 기차를 타고 다니며 일러주었던 부모의 말과 공공장소에서 보여주었던 어른들의 태도를 배우며, 타인을 배려하고 관용을 베푸는 어른으로 자랐다. 더 많이 알고 경험한 어른이 방정환 선생의 말처럼 ‘자세자세’ 타일러주고 지켜봐주기에 어린이는 공공예절을 배운다. 크고 작고 다른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91 있지, 사람도 식물 같아서 햇볕도 쬐고 비도 맞고 눈도 맞아야 쑥쑥 자란단다.

92-93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내 몫의 삶을 야무지게 살았다. 어린이가 혼자 한 것들이니 잘하거나 멋지거나 풍족하거나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 손으로 내 것을 만들고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언제나 뿌듯했다.

95 혼자인 나는, 조금 외롭고 쓸쓸하고 어쩐지 슬프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뭐랄까 그건 뭉클함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102 세상에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03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단다. 결국 안아주는 것도 사람이지.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단다.

108 엄마는 그때가 행복했다 한다. 엄마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엄마가 낯설었지만 특별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젊은 나의 엄마는, 가만히 홀로 아름다웠다. 젊을 때 젊은지 모르던 엄마는, 아직도 자기 젊었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113 하고픈 말이 많을수록 말문이 막혀버리는 마음을, 주고픈 마음이 넘칠수록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아서.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설명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전해주고 싶을 때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안아줄 것이다. 아이를 안을 때, 그리고 엄마를 안을 때. 나는 더 잘 살고 싶어진다.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보고 싶어진다.

123 “살아봤자 얼마나 오래 살겠니. 우리 미워하지 말고 웃으면서 지내자.”

128 살아보니 행복도 불행도 겪어볼 만은 하다.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렴.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너무 싫어하지도 마. 왔다가도 간다. 다시 오더라도 다시 가. 오고간다, 삶이라는 게. 오고 가는 일들 모두 겪어보자면 마음이 잔잔해지는 때가 온단다. 오늘 평온한 바다처럼.

129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거리는 가늠되지 않고, 간격은 측량되지 않으며, 속도는 확실치 않고, 횟수는 알려지 있지 않다. 그래도 되풀이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주나 지난해 마음이 겪었던 것을 지금은 겪지 않으나 다음 주나 다음 해에 다시 겪을 것이다. 행복은 사건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의 밀물과 썰물에 달려 있다.

139 기억이야말로 한 사람을 고유하게 만든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기억 더미에서 나를 만든 기억을 찾는다면. 신기하게도 떠오르는 기억들 대개는 사소하고 소소하다. 오래 살아보아도, 자주 추억해보아도 결국 남는 것은 모래알만큼이나 작게 반짝이는 기억들. 소소소 흩어지는 기억 알갱이 중에서도 끝내 남는 기억 하나는 무엇이 될까.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작은 기억이자 가장 소중한 기억.

133 이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하면 할수록 좋은데 슬프네. 언젠가 나는 아주 많이 울게 될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나는 그렁그렁한 마음이 된다. 그래도 사랑을 미루진 말아야지. 우리가 언제 영영 그리워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136 언제고 내 삶에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기도 한다는 걸, 한참을 뒤척여도 잠들 수 없던 어느 새벽에 깨달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걱정이 되더니 잊고 있었던 근심들마저 하나둘 바닷물처럼 스며들어 차올랐다. 나는 기어코 불안해졌다. 깊고 깜깜한 물속에 가라앉는 사람처럼 온몸이 푹 젖은 듯 무겁고 숨이 막혔다. 제대로 숨 쉴 수가 없었다. 사람이 불안해서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그 순간 나는 흡, 숨을 참아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이상하게도 그때 떠오른 건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 물숨이 든다는 게 이런 걸까요. 마지막 한 번만 더 참을까, 불안 밖으로 나갈까. 할머니가 휘파람처럼 대답했다.

호오이 호오이.

139 다만, 그 와중에 나 자신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딱 나의 숨만큼만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보고 싶다. 어떻게든 해낸다는 엄청난 각오 말고, 할 수 있는만큼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143 사는 동안 몇 번이나 꽃을 볼까. 순간 피었다가 저버리는 꽃은 꼭 오늘 하루 같다. 우리는 오늘이 생애 단 하루인지도 모르고, 금방 저버릴 줄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보내곤 하니까. 무럭무럭 자라서 애씀 피어난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사는 거 바쁘다고 힘들다고 바닥만 보다가 하루를 지나쳐버린다.

154 잊어버리고 살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159 거기에, 아무것도 있을 거야.

우리의 순간이었던 그 어떤 것이.

168-169 돌멩이를 주워본 사람은 안다. 돌멩이의 아름다움을. 돌멩이는 독특하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어도 또같은 돌멩이는 하나도 없다. 사람들 얼굴처럼 다 다르게 생겼다. 돌멩이는 고유하다. 깨끗이 씻어 말린 돌멩이인데도 코에 대면 흙냄새가 난다. 강가 냄새가 난다. 숲 냄새가 나고, 바다 냄새가 난다. 돌멩이를 주웠던 장소가 떠오르고 비슷비슷한 돌 틈에서 나만이 알아보았던 돌멩이의 예쁨이 생각난다.

정말로 돌멩이는 예쁘다. 돌멩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사람의 지문 같은 독특한 무늬가 보이는 것도 같다. 쓸모없고 하찮다 여겨지는 돌멩이 하나에도 애정이 솟고 뭉클해지는 것은, 어쩌면 바닥을 내려다보는 마음, 예쁨을 발견하는 마음, 가치와 쓸모를 따지지 않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돌멩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꼭 아이의 마음과 닮았다.

194 말하자면 도토리 같은 행복이었다. 쓸모를 구하지 않아도 귀엽고 즐거운 것들. 별거 아니어도 소소하게 좋은 순간들. 가만 보면 도처에 그런 행복이 굴러다니는데 줍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건 아닐까.

213-214 그리움이란 거, 절절하게 뜨거운 마음인 줄 알았는데 저릿하게 쓸쓸한 마음이었구나.

“그냥, 생각이 나서.”

이 한마디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너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붙잡고 싶은 우정이야.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야. 나는 오랫동안 친구를 생각했다.

217 좋은 사람이란 뭘까. 여전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나다운 나’가 되고 싶어. 나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227 나는 믿는다. 책 한 권으로도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책 한 권으로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

231 “시간이 지나면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더 오래 남더라. 그러니까 너도 너무 깊게 상처 주지 마라.”

231 그러나 상처받아본 사람은 상처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상처 주지 않는 법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내 상처 아픈 걸 아니까 다른 사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단순한 진심. 나도 모르게 실수처럼 주고만 상처에도 오래도록 힘들어한다. 상처받아본 사람일수록 자기가 준 상처를 더 오래 기억한다.

232 실금이 간 흰 돌 같은 내 삶을 바라본다. 실금이 번져갈수록 짙어질수록 헌 마음이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새 마음이 태어나려 한다는 걸, 이제는 믿을 수 있다.

여전히 나는 덜 미워하고 덜 상처주려 애쓰며 살고 싶다. 예전엔 두려워서 그랬다면 이제는 내 마음 지키기 위해서. 바라건대, 모두가 제 마음 잘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깊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너무 깊게 상처받지 않으면서.

236 사랑을 시작하는 마음은 실로 근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마음의 말들. 견디다. 삼키다. 애쓰다. 이런 멈춰 있는 것 같은 말들이 서서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좋아하다. 아끼다. 사랑하다. 앉아주고 싶은 말들로 이어지기까지 우리는.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지키다’. 지켜야 한다. 너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너무 달려가지고 뒷걸음치지도 않는 마음으로.

240 배려는 얼음 세 알만큼이어도 충분하다. 너무 뜨거우면 다치니까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어 한여름에 시원한 물이 절실한 사람이 있고, 따뜻한 물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얼음 세 알만큼의 배려를. 불볕더위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마음의 체감온도는 따뜻할 수 있다.

256 봄 오기 전이 가장 춥고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지. 아무리 춥고 깜깜한 날들이 이어져도 어김없이 해는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