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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기, 소유되기

2026-05-25 저자: 율라 비스 / 김명남 역 출판사: 열린책들

🔖 책갈피

17-18 루이스 하이드는 이렇게 적었다. <소비에의 욕구는 일종의 욕정이다. 하지만 소비재는 이 욕정을 미끼로 쓸 뿐 그것을 충족시켜 주지는 않는다. 상품의 소비자는 열정 없는 식사에 초대받는 셈으로, 이 소비는 충족으로도 열정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20-21 슬럼가 탐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유한계급 여성들의 도락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갔고,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곳 여자아이들에게 부자들의 세탁물을 삶고 치대고 다리라고 시킴으로써 그들을 노동으로 정화시키는 동안 자신들은 옆에서 시를 읽어 주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빈자들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빈자들이 그들에게 봉사했다. 앨리슨 라이트에 따르면, 여자들은 <잘 갖추어진 자기 세계의 좁은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슬럼가 탐방에 나섰다. 달리 일에 접근할 기회가 없었던 여자들에게 슬럼가 탐방이 직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들은 고아들과 가난한 가정의 소녀들을 데려가 훌륭한 하인으로 길러 내는 집을 운영했다.

38 로런 콜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케아 덕분에 손쉽게 자신을 발명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스럽지만, 이토록 값싸게 삶을 만들거나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일 수도 있다.>

39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소비자가 아닌, 사람을 위한 설계>라는 문구에서 좋아하는 점, 살짝 웃게 되는 점은 소비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암시다.

49 이 집은 내것이 아니다. 나는 이 집을 소유한다기보다는 보살피는 것에 가깝다. (…) 내가 받는 선물이 아니라 미래가 받는 선물이다. 이 집은 내 손을 거쳐 갈 뿐이다. 이것은 구입이 아니라 살림이다.

49-50 나는 집에게 봉사한다. 이 진실은 또 다른 진실과 결합해 있으니, 집도 내게 봉사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고, 만약 매사가 순조롭다면 이 자산의 가치는 계속 커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집을 사기 전에 할아버지가 내게 경고했다. 집은 사는 곳이라고. 투자가 아니라고.

58-59 나는 원했다. 부엌을 <무아르 골드색>으로 칠하기를 원했고, 뒷마당에 정원을 만들기를 원했다.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 무엇보다 원한 것은 집이 제공하는 영속성의 환상이었다. 견고한 기반, 날아가지 않을 벽돌담, 안전하다는 감각.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67 기다리는 동안, 내내 돈 없이 살았던 20대 시절이 떠오른다. 돈이 없다는 것은 시간이 드는 일이다.

75 셔먼은 착한 부자와 나쁜 부자를 나누는 일은 부자에게나 다른 모두에게나 한낱 시간 낭비라고 주장한다. <개인의 행동을 기준으로 부자를 평가하는 것 - 그들이 충분히 열심히 일하는지, 충분히 합리적으로 소비하는지, 충분히 남에게 돌려주는지 - 은 엄청나게 불평등한 부의 분배의 도덕성을 묻는 다른 종류의 질문들에서 시선을 돌리게 만들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부자에게 착할 것을 요구하는 대신 우리의 경제 체제에게 더 나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82 <시장은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선택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게다가 사람들은 규칙을 바꿀 수 있다.> 아펠바움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반드시 분배보다 축적을 우선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우리의 일과 놀이를 관장하는 것은 그런 규칙이다.

95 하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삶이 무엇으로 정의되는지 모르겠다. 그 기준은 생활 양식일까, 아니면 버는 돈의 액수일까, 아니면 하는 일의 속성일까? 존은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 쓰지도 않는다. 존이 자신의 배경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는 <쓰레기>다. 한번은 존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논의를 제안할 의도로서 말이야, <계급>이라는 단어는 아무 뜻도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어?”

98 라이트가 관찰한 바, 사람들은 대부분 계급을 통제나 배제의 수단으로 여기기보다 재산이나 교육처럼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여기기를 선호한다. 이 접근법에서 어떤 사람의 계급은 그가 경제 자본,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이라는 세 종류의 자본을 각각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달리 표현하자만 그가 무엇을 소유하는가, 무엇을 아는가, 누구를 아는가다.

122 요즘처럼 시간이 곧 돈일 때, 자유 시간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비싸다. <유한계급론>에서 소스타인 베블런은 여가란 과시적 소비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이때 소비되는 것은 시간이다. 베블런은 봉건주의하에서 귀족이 육체노동으로부터 면제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하에서 상류층은 일상적 고용으로부터 면제된다고 말한다. 여가란 일할 필요가 없는 계급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방법이다.

<풍요한 사회>에서 갤브레이스는 미국에는 더 이상 유한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부자들은 일한다. 적어도 바쁘게 활동한다. 여가의 유행은 끝나고 새로운 계급이 등장했으니,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계급이다. 그들도 급여를 받지만, 급여가 핵심은 아니다. 그들은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일하며, 일 자체를 보상으로 여긴다. 급여는 부수적인 문제인데, 하지만 갤브레이스가 지적하듯이 <위신의 지표>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 계급 사람들에게 위신은 존경과 더불어 만족감의 원천이다. 그들은 급여를 많이 받고 싶어 하지만, 돈이 동기냐는 말을 들으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갤브레이스에 따르면, <그런 것이 바로 새로운 계급의 노동이다. 귀족이 봉건적 특권을 상실할 때 느꼈을 슬픔도 이 계급 사람이 오직 급여만이 보상인 평범한 노동으로 전락할 때 느낄 슬픔에는 댈 수 없다.>

139 요즘은 많은 언어에서 고된 노역을 뜻하는 단어와 만족스러운 일을 뜻하는 단어의 경계가 흐려지는 추세다. 영어에서 노동자는 곧 일꾼이고 노동은 곧 일이다.

148 페데리치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늘 도둑질과 폭력에 의존한다.

148 마녀사냥은 미신이나 종교의 문제라기보다 여성의 반항을 억압하려는 일이었다고 페데리치는 주장한다.

149 마녀는 나이 들어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 산아 제한을 돕는 산파, 평생 출산하지 않은 무자녀 여성,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문란한 여성, 그리고 자신을 판매하는 창녀였다. 마녀들은 유난히 가난했다. 그녀들의 범죄라고 기록된 항목 중 하나는 음식 적선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욕한 행위였다.

150 중세의 그림이나 이야기에 묘사된 여성은 억세고, 사납고, 정력적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올라타서 채찍을 휘둘렀다. 줄줄이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고, 여섯 번째도 기꺼이 두려고 했다. 여성은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고압적이었다. 적어도 그 시적의 만화에서는 그렇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마녀사냥 이후 역사의 이쪽 페이지로 넘어온 뒤, 여성은 이제 온순하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졌다. 그리고 <무성적이고, 순종적이고, 유순하고, 예속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했다. 자본주의하에 여성은 더 이상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여성은 이제 무력한 존재였다.

173 “정말로 그런 기분이 든다면 그런 일을 왜 하나요?” 그 학생이 묻는다. <예술을 꼭 해야겠다면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에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녀의 질문은 이 일의 즐거움이 어디 있느냐는 뜻인 듯하다. 즐거움은 만드는 과정에 있다는 것, 이것은 내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 자체가 즐겁기만 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과정은 작곡가가 잘 기록했듯 이 까다로운 질문의 연속이다. 그런 질문들에 응답하는 데는 일과 노동이 둘 다 든다. 어쩌면 나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고민한 끝에 나는 <서비스>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우리는 예술을 섬기는 거예요. 우리는 예술에게 굽히는 거죠.” 나는 학생에게 말한다. 즐거움은 바로 이 자세에, 일로써 우리가 더 나아지는 자세에 있다. 이것은 지배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즐거움이다.

204 사람들이 일에서 바라는 것은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일용할 의미>라고,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터클은 말한다.

205 이들은 어떤 직업을 좋은 직업으로 만드는 한 가지 요소는 자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감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11 생각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거리보다 살짝 더 멀리 있고, 나는 책상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낸 뒤에야 그것을 붙잡아서 종이 위에서 작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은 여기 잡초들 사이에 존재한다. 안 가꾸어진 채로 존재한다.

242 조사에 따르면, 더 안락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환경을 더 많이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아무리 세상을 염려하고 문제를 의식하더라도, 당신이 환경에 가하는 영향을 가장 잘 예측하는 지표는 당신의 소득이다.

243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가 유엔에 지속 가능성을 조언하기 위한 전문가 집단에 참여했을 때 맨 먼저 주의를 쏟은 대상이 에어컨이었다. 그들이 모인 회의실은 과잉 냉방되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에어컨을 끄자고 요청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저항하지 않으면서> 뭐 하나라도 바꾸기를 바랄 수 있을까?”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251 그는 새치기를 허용하는 표를 사는 것은 타인의 경험을 저하시키는 데 돈을 내는 셈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줄을 아예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더 오래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어느 아이라도 알 것이다.

267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합니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때 물질적인 것이란 집과 음식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물론 여기서 방이란 일종의 상징이고 방문의 자물쇠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다. 여자가 글을 쓰고자 한다면 작업할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307 그는 나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면 그는 이전에도 늘 나라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조건부이고 언제라도 폐지될 수 있는 위태로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나라가 없었다. <우리가 반역의 낭만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 것은 갖지 않은 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잔인하리만치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임스 볼드윈은 이렇게 적었다. 시민인 적 없는 사람은 반역자가 될 수 없다.

311 우버 기사들은 고용주를 모르거나 동료 피고용인을 모른다. 이들이 갖지 못한 안정성 중 하나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안정성, 그리고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안정성이다.

311 어떤 사람들은 위태로움을 선택한다. 이것은 위태로움이 단지 우리 시대의 조건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응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프레카리아트에는 안정된 고용과 퇴직금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임시직과 여행과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불안을 일으키니, 안정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

318 이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보러 와서 하는 일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버거는 말한다. <혹은 그들이 소유의 맥락으로 그 작품들을 언급할 권리를 획득했다고 말해도 좋다.> 예술은 사유 재산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322 언젠가 한 동료는 이 글에 대해서 내게 말했다. 동료의 말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거짓말이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려 준다는 뜻이었다.

326 <내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고사 깨달은 것은 우리의 몸이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지나간다는 것과 우리와 공동체의 상호 작용 방식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차의 폭력적인 힘은 사람들을 소외시키죠. 우리가 사는 동네에 그런 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레이철 커크스는 차는 갑옷과 같다고 말했다. 차는 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고자 설계되었을 뿐, 밖에 있는 사람은 보호하지 않는다. 차 밖의 사람들은 늘 차를 경계해야 하고, 사실상 머릿속으로 차를 몰아 보아야 한다. 심지어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조차 차의 움직임을 가늠할 줄 알고, 차가 멈추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며, 차는 크고 무거울 뿐더러 앞을 못 보는 물체인 양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349 ”자기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없다면 진짜 자기 돈이 아니죠.“ 나는 설명한다. 그리고 돈으로 실수해 보는 것은 돈으로 실수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다.

365 “시간과 돈을 보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죠.” 이 이웃은 언젠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음악과 연극에 써서, 콘서트와 공연을 보러 다닌다. 그녀는 예술에 투자한다. 나는 내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시간은 글에 쓰고 내 돈은 이 집에 쓴다.

369 그리고 이제 내게는 새로운 안정감이, 견고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이전에도 내가 별반 유동적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제는 직장을 유지하는 한 담보 대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첫 몇 해 동안에 나는 내 안락함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리고 그 안락함이 불편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면 이 불편감이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고, 나의 특별한 새 삶이 평범하게 느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상실을 막을 요량으로 일상에서 불편감을 느낀 순간을 기록하는 일기를 둔 것이었는데, 그 순간들은 보통 내가 모종의 안락이나 쾌락을 즐긴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불편감을 놓고 싶지 않았고, 안락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모순의 산물이다.

373 에릭 올린 라이트는 게임의 은유가 자본주의 내에서 세 가지 상이한 권력 싸움을 묘사하는 데 쓰여 왔다고 말한다. 어떤 게임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싸움(체제 권력), 주어진 게임의 규칙에 대한 싸움(제도 권력), 정해진 규칙 내에서 어떤 수를 두느냐에 대한 싸움(상황 권력)이다. 이 책은 정해진 규칙 내에서의 수를 기록한 글이지만, 그 규칙과 게임 자체에 대한 내 불편감도 기록되어 있다. <내게 주어진 게임을 내가 정한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하는 질문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였다.

375 내 문화 자본은 내 사회 자본과 얽혀 있고 - 내가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ㅐ가 아는 것들을 알 수 없었겠지만, 한편으로 내가 아는 것들이 없었다면 내가 아는 사람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 그 둘은 모두 내 경제 자본에 결부되어 있다. 내 친구들 중 다수는 나와 마찬가지로 중산층의 가치와 가정과 무지 속에서 교육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