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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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어딘가 맞지 않는 사람
서문 - 마트료시카의 가장 깊숙한 곳
14 실은 받들여지고 싶은 욕구가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방어하고자 꺼려지는 마음이라는 옷을 입으니, 그들을 멀리하는 나는 그들과 영영 친햊리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아이러니. 비극의 시작이 수치심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괜한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기력, 부족한 사교성이나 친화력, 혹은 나쁜 경우에는 상대를 탓하면서 나는 점점 고립된다.
16 들킬까 봐 늘상 불아한 곳, 그곳에는 잘하는 걸로 자신을 증명해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못난 사람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둘 다 갖는 사람이 산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나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사람이 가면을 쓰고 수동적으로 굴며 거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18 그보다는 모르는 걸 아는 척 할 때, 모르는 걸 필사적으로 숨길 때, 수치심은 바로 그럴 때 생겨난다.
19 이 기준에 따라 우리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기준 안에서 인간의 불완전함은 고려되지 않는다 .누구도 규범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간 수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수치심을 탐구하는 데 있어 평가의 기준과 잣대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가치체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1 잘해 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능력이 비호감이 되는 여성으로서의 사회화를 겪으며 겸손하고 수줍고 양보하고 관계지향적이고 감정을 중시하는 여성성에 대한 학습이 비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내가 차지하는 자리를 작아지게 만들고 내 몸이 작아져야 한다는 감각을 만들어냈다. 쉽게 ‘고집 있는 여자’가 되고 그에 따라 스스로를 깎아야 하는 압력을 받았을 때, 나를 실제로 깎아내지 않더라도 압력은 유효하게 존재한다.
23-24 나는 (모든 곳에서) 특별하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나는 (나에게) 특별하지만 (세상에) 특별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나의 결핍과 단점과 부정적인 감정을 들여다보고 느끼면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완벽은 불가능함을 인정할 수 있다면, 나를 외부의 시선과 기준으로 평가하는 한 내가 어떤 모습든 내게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실감할 수 있다면, 조금 놓여날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함이 부적절함으로 가는 연결고리를 끊고,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할 수는 있다고 조금쯤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24 취약성을 드러내는 게 약점이 되는 세상에서 내게 없는 척 꽁꽁 수믹려 애쓰는 취약성이 곪고 곪아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수치심으로 발효된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취약성을 들키면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은 내가 가진 취약성이 곧 수치심이 되게 만든다. 수치심은 취약성에서 오지만 모든 취약성이 수치심이 되는 건 아니다.
1장 완벽에의 환상
36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다’고 상대의 감정과 욕구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것은 ‘너의 감정과 욕구란 건 우리가 함께 시간을 들여 느끼고 다룰 만한 가치가 없거나 틀렸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다. 욕구와 감정과 갈등은 수면 위로 꺼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좋거나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만 선택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정은 그 외의 것들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다루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44 그렇게 타인에게 맞춰가다 보니 스스로 좋은 것도 없어져갔다. 정말로 다 괜찮아. 아무 상관없어. 아무 마음의 변별이 없어. (…) 점점 원하는 게 없는 인간이 되어갔다. 아무것도 열렬히 원하지 않는 상태가 익숙해져 갔다.
50 나는 틀린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53 부족함이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잔뜩 움츠러들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내면의 불완전감이 타인의 인정에 목매달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완전감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니 인정도 받을 수 없는 모순의 고리 안에서 끝내 나를 채워줄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한다.
54 나는 자꾸만 나 아닌 무언가가 되려 한다. 자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집착하나 그럴 때 상정하는 자신조차 지금의 내가 아닌 어딘가 먼 이상향에 존재하는, 지금으로서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58 상처를 입을 수도 있어, 거절당할 수도 있어, 못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어, 미움받을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여전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69 까딱하면 내쳐진다는 공포, 나를 드러내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조용히 앉아 옅은 웃음을 띠고 있어야 집단에 묻어갈 수 있다는 믿음. 이것들은 앞뒤로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져 왔다.
69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은 크고 작게 우리 삶에서 자주 일어나고 때마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며 어디서 기인하는지 또한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에게는 그날이, 가장 어리둥절하고 연결되지 않는 문장이지만(’똑똑하다는 이유로 내쳐진다고?’) 한편으로는 은은하게 받아왔던 시선과 경고들이 연결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강렬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영역을 정했을 것이다.
2장 집에 두고 온 나
76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꾸준히 은은하게 불안하다. 만약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진짜 장본인이 내가 아닌 상황에서조차, 그러니까 내가 운전하지 않는 차를 타고서도 민폐를 끼치고 비난받을까 봐 마음을 놓지못한다.
77 불안은 나를 쫓기게 만들어 느긋함이나 여유, 유연함을 앗아간다.
78 그리하여 나에게는 평정심의 강박 못지않게 일관성에 대한 강박이 있다. 한 뼘 높은 곳에서 머리 위를 떠다니며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심파자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있어, 내가 친구들과 흥에 취해 들떠 있을 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인다.
79 자기 자신에게 예외를 많이 둘수록 건강하다. 자아와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과 환경 속에서 나 자신도 따라 변함을 인정하고 상반된 모습들도 수용하며 모순을 받아들이고 조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건 자아의 내용이 꽉차 있다기보다 비어 있다는 뜻일 테다. 어떻게든 빈 자리에 일관된 상을 만들어 메꾸려는 노력이 고된 이유인 지도 모른다.
80-81 어느 순간에도 내게 머물러 있다. 몰입과는 다르고 차라리 집착에 가깝다. 말과 행동, 때로는 겉으로 내뱉지 않는 생각까지도 사소한 디테일까지 모조리 검열하며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다. 그리하여 나는 두개의 존재로 나누어져 있다. 행위와 시선. 주체와 대상. 본래의 나와 그림자인 나. 날 움직이는 제 1의 존재와 날 멈추는 제2의 존재.
81 그림자는 나이고 내가 아니다. 밖에서 들어왔더 말들, 내가 남을 평가하던 생각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들,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한 목소리로 내게 기대하고 요구했던 실낱보다도 가느다란 ‘정상’과 ‘우등’을 향한 기준들, 이것들이 모두 뒤엉켜 시꺼메졌다.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끌고다니는 건지 모호해져버렸다.
82 때문에 어떤 면에서 나는 공인으로 살아온 느낌을 갖는다. 발가벗겨질 경우를 대비하여 나의 사적인 영역은 마치 공적인 영역처럼 여겨져 왔다. 언제 어디서 들춰져도 문제없도록 반쪽인 감독관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어 왔다.
84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음을 불안이고 부끄러움이다. 평정심을 잃는 건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다.
85 나의 오롯한 마음만으로는 정당성이 없다고 믿도록 만드는 게 바로 수치심일 것이다.
89 실망은 정말 받고 싶지 않은 것 중의 하나다. 타인의 실망만큼 내 존재가 깎여나가는 것 같으니까.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 같다. 타인의 인정으로 겨우 세웠다가 순식간에 지나가는 타인의 무심한 표정 하나로 무너져버리는 모래성 같은 자아.
90 나로 살기 위해는 꾸준한 성찰과 자기수용, 때로는 저항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기대대로 사는 데 익숙하고 기대대로 사는 건 어떤 면에서 쉽고 편한 일이니까. 살라는 대로 살다 보면 가면은 점점 내 얼굴이 되어버리고 두껍게 밀착된 가면을 벗겨내는 건 한순간의 마음으로 되지 않는다. 내 손으로 쓴 가면이지만 원한다고 벗어버리지 못하는 게 가면의 비극이다.
91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가면을 벗고 싶다는 뜻이다. 비일관적이고 모순된 사람이어도 괜찮다는 안심을 갖고 싶은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도 가치 있다는 확신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103 나에게 소속되고 나면 모임에서 주류가 되는 것은 정말로 상관없어질지도 모른다. 배우 김혜수는 한 인터뷰에서 “늘 중심이 되려고 하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일원이 되려고 하면 열려 있는 부분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주류가 되기 위한 정답지를 버리고 일원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가 되는 중이다.
105 ‘뭐 해’란 바꿔 말하면 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 아닐까? 뭘 했든 그걸로 무언가(좋은 것) 되거나 이루어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우울을 경유하여 드러난 것 아닐까?
111 즉, ‘구구절절’은 이해받고자 하는 몸부림이고 ‘말하기 귀찮아’는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다. 수치심이 만들어내는 우울의 감각이다.
3장 가치 증명 전쟁
124-125 존재 가치가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믿음은 인간을 불안에 떨게 한다. 최상의 능력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라는 두려움은 자신의 취약성을 감추려는 동기가 된다. 내 삶이 내 손에만 달려있다는 생각은 달리 보면 오만이고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연결을 끊는다.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압박을 만들어내고 너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게 한다. 반대로 본다면 네가 잘해 내지 못한 건 모조리 너의 탓이 된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없어진다. 각자도생의 시대. 고립과 외로움의 시대. 자괴와 무시의 시대.
125 성취는 나를 기쁘게 했지만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절대로 잃으면 안 된다는 불안의 근원이었고 내가 받는 조건부 사랑의 절대 조건이었다.
130 너무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게 만들었다. 섣불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게 무엇이든 중에 가장 좋은 게 맞을까? 과연 완벽한 선택일까? 내가 쥘 수 있었던 다른 것, 갈 수 있었던 다른 길을 바라보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봐 망설여졌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동시에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는 내게 자유롭게 꿈꾸라고 독려했지만,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무한대라는 우주에서 길을 개척해 어딘가에 존재할 나에게 꼭 맞는 행성을 찾아나가야만 하는 과제를 붙들고 나는 영원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유의 땅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131 ‘무엇이든’이라는 땅에서 제대로 된 선택과 성취를 해내지 못하면 바로 ‘아무것도’라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본능적인 예감이었을 것이다.
147 그러니까 존재 가치라는 거 애초에 없는 것으로 해버리면 어떨까. 존재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 그저 존재할 뿐이야.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어. 설득해낼 필요가 없어. 그래, 바로 나에게 말이야. 나에게는 언제까지라도 나를 증명해낼 수 없잖아. 차라리 증명하기를 포기해버리면 어때?
148 그들에게 의미란 ‘지금’ 그리고 ‘여기’뿐일 것이다. 시간이 되면 나무는 어김없이 우거진다. 꾸준하고 의연하게 존재한다. 자연 같은 사람이 되고픈 바람은 수치심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마음과 이어져 있다.
153 그리하여 주류가 되려 할 때 혹은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 나의 성취는 양껏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런 곳에서의 주류 되기란 내 말이 의견보다 감상처럼 여겨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웬만해서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배꼽에서부터 끌어올리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155 밤마다 사라지는 회사 책상을 어떻게든 끌어안고 버티기보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을 버려버린 건 적성과 성향에 맞지 않은 업무와 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주류가 될 자신과 가능성이 없어서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천하를 호령할 야망을 펼치려 할 때 마주할 시선과 평가로부터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155 “그래요, 다 누나 뜻대로 되어야 하니까.”
157 그리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란 확신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 떳떳하게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 되뇌며 자꾸만 도망치려는 나를 달랠 만한 확신을.
159 “너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영화 이론서를 볼 때나 기가 막히게 좋은 영화를 볼 때 막막하지 않니?”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나는 좋은 영화를 만들 자신이 있어.”
살면서 내가 갖고 싶던 건 이런 종류의 느낌이었다. 그가 결국 좋은 영화를 만들었는지아닌지는 상관없다. 내가 갖고 싶은 건 정말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평생을 이것을 위해 살아왔다), 좋은 영화를 만들 자신이 내게 있다고 믿는 것, 나는 좋은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를 우울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초조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지금껏 걸어온 길과 이뤄낸 성취와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떠올려 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단단한 훈풍을 느끼지 못하는 나에게 결여된 태도다.
160 성취하는 여자가 받는 경계와 적의가 있었고 여러 측면에서 점점 성취가 어려워졌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원할 문화적 뒷받침이 되어 있지 않았다.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을 자유롭게 탐색할 권리도 자유롭게 쟁취할 권리도 아직은 부족하다.
162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그것은 제한이 아니라 너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포장한다.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하면서, 실패했을 때는 더 가혹한 비난을, 성공했을 때는 덜 화려한 상찬을 내린다. 앞길을 닦아줄 생각은 없이 그저 뒷짐을 진 채 진정으로 원한다면 어떤 방해물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거라고 내게로 책임을 넘길 뿐이다. 모름지기 여자란 잘남을 현명하게 숨겨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되기를 진실로 격려받을까? 너무 똑똑하고 잘나가는 여자는 악바리이거나 독한 것, 잘난 척하고 거만하고 재수 없다고, 남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고, 인생의 한쪽에만 치우쳐서 다른 것을 놓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을까?
163 내가 길을 잃은 곳은 바로 그곳이었을지 모른다. 그 동떨어짐 사이, 머리가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 사이, 귀로 들리는 것과 그래서 발걸음을 떼었을 때 나에게 꽂히는 시선 사이에서. 나라는 몸 하나에 서로 다른 기대와 모순되는 잣대가 들이대어질 때, 그리하여 나는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하겠다는 희미한 예상이 어렴풋이 밀려올 때, 내가 믿어왔던 나라는 사람이 더 이상 나의 무기가 되어주지 못할 때, 그때가 바로 수치심이 서식하기 몹시 좋은 환경이었다.
4장 여자라는 몸
167 티피오(TPO: Time Place Occasion; 시간, 장소, 때)에 맞게 의상을 선정하는 데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어울리기 위한 나의 무의식적인 노력일까? 그 자리에 적절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면을 적절하게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트는 것일까?
169 겉모습으로 수치심을 해결하고자 하나 그럴수록 겉모습으로 인해 더욱 수치심이 깊어지는 것 같다. 나느 몸에 대한 수치심이라기보다 내 몸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수치심을 갖는다.
170 그렇긴 해도 자발적인 놀이라 하기에는 대화를 나누는 우리도 뭔지 모를 근원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기준에 들어맞지 않으면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조롱받고 깔보아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176 여럿이 같이 주장하는 거대한 운동에 동참하기는 쉬웠지만, 너무도 사소하고 미세한, 그래서 의도적이라고 봐주지 않을 만한, 그저 나라는 사람으로 보일 영역이라면 나는 완벽하기를 원했다. 매력의 종류가 달라져도 매력적이긴 해야 환영받을 테니까.
178 사람의 예쁨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미적 존재인 우리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새로 만들고 넓히고 수정하는 중이다.
단순히 너 자신을 긍정하라거나 너의 몸을 사랑하라는 결과론적인 주문 말고 과정적인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더 다양한 여성의 몸을 보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눈을 기르고 싶다. 어떤 몸도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날이 이상향이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름다움의 범위 확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더 다채로운 롤모델이 필요하다. 미디어에서 다채로운 여성의 몸을 접하고 그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삶을 듣고 싶다. 그것이 내가 몸에 갖는 수치심을 조금은 보듬어줄 것이다. 티 없이 완벽하게 예쁜 몸을 갈망하는 시선을 거두고 여기 존재하는 여자의 몸을 그저 예쁜 몸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84 여자의 몸은 남자의 욕망과 폭력이 동시에 실현되는 장이다. 권력자인 남자들에 의해 추앙되지만 동시에 끔찍하고 불경한 것이다. 남자들이 자신이 원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서 여자의 몸을 후려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인지도 모르고, 남성중심사회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 여자에게 어떤 힘도 실제로 주지 않으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르고, 여성을 영원히 남성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여성의 몸을 남성의 몸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차적인 위치로 밀어 넣으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187 조건부 인정과 사랑에서 조건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기보다 조건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방향이란 건 얼마나 직선적이고 단순한가. 기준에 가까워질수록 세상과 타인의 관심과 호의가 생겨나는 걸 확인하는 일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189 궁극적인 실패를 껴안은 채, 여성이라는 존재에 실패가 통합되어버린 것을 전제로 한 채, 여자는 자신을 어떻게 온전히 껴안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몸이 유발하는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몸에서 시작되어 온 존재를 덮치는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의 몸을 독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통합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여자의 분열과 그로 인한 자기부정과 자기혐오는 예정된 수순이다.
191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타인의 존엄성과 결정권을 침범하는 너라고.
195 똑똑함은 쓸모와 긴밀하게 닿아 있다. 능력과 성공과도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것들의 전제가 된다. 그래서 똑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쓸모없어 보일까 봐, 무능력하고 실패자로 보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197 자기를 평가할 때 극단적일 만큼 엄격한 기준이 많은 여자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도 안다.
여성의 똑똑함을 진정으로 높게 쳐주지 않는 문화, 똑똑하다는 말이 너 잘났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며 때로는 단지 자기 주관과 의견과 생각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쓰이는 분위기 안에서 헛똑똑이는 갑절의 욕이 된다. 그래, 너 똑똑하다, 근데 그 똑똑함조차 가짜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면 안 돼. 나는 다짐하고 다짐한다. 그러면 모두가 알아챌 거야. 구멍 나 있다는 사실을. 부족하다는 사실을. 헛똑똑이라는 사실을.
198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줄 거라 기대할 수도 없다. 설사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더라도 내가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나를 위로하려 하거나 과장하거나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해버릴 뿐이다. 수치심은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는 다른 이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끔찍하게 외로운 감정이다.
200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시도들이 어떤 형상으로 찾아왔는지, 세상과의 불화와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겪어왔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취약성을 숨기고 완벽해지라고 요구하는 경쟁중심의 문화와 무엇보다 여성의 존재를 위축시키는 가부장제를 말이다.
202 이 사회는 구성원에게 완벽해지기를 요구하며 우리의 능력과 성취만을 존재 가치로 인정한다. 거기에 더해 남성중심사회는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딘가 부족한, 무언가 잘못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여성은 이중의 수치심 억압 안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외모, 성취, 관계, 자아, 성격, 섹슈얼리티 등의 영역에서 수치심을 갖도록 만드는 환경 안에 있다.
여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 자기와 관련된 것들을 겸손보다 조금 더 나아간 태도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자의 실패에 더 가혹하게 구는 문화가 만들어내는 태도다. ‘정상’과 ‘가치’의 기준이 여자에게 훨씬 더 촘촘하게 짜여 있는 상황이 이에 기여한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높은 기준이 들이대어지고 이중 잣대가 들이밀어진다.
5장 완벽과 충분 사이
212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애쓰고 감추는 동안 남들이 보기에 얼핏 꽤 괜찮은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의 초조함과 공허함, 불안과 우울은 남모르게 자신을 괴롭히고 결국에는 잘 만들어갈 수 있었을 관계들, 즉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를 좀먹는다.
214 이런 두려움의 전제에는 괜찮은 사람이란 똑똑하고 독립적이고 성공하고 다른 사람에게 둘러싸인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이자 실망받고 남들이 나를 떠나갈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다.
216 쉬이 발설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내면 깊이 심어놓는 것, 그리하여 혼자 고립되게 만드는 것이 수치심의 고약함이다.
221 버겁다는 느낌은 나를 은근하게 짓눌러 왔다. 항상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혼자 애써야 하고 혼자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지금 가로막힌 장애물은 나만 겪는 것이고,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방식도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성정에서 나오는 독특한 방식이기 때문에 같은 일을 겪는 동료들과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자연히 속내를 타인에게 털어놓는 일도 적었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도 있었음을 남들이 하는 걸 보고서야 깨닫는다.
221 느슨하거나 조여진 연결감을 느낄 때마다 감정이 북받치는 건 역으로 그만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기 대문이다.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독립적인 사람, 알아서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나를 고립된 사람, 홀로 고군분투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스스로 성취해내는 것에 대한 기쁨과 만족도 존재하지만, 그 아래에 깊고 넓게 외로움과 고독이 깔려있다.
223 흔들리지 않는 애정에 대한 믿음,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나의 약함을 무기로 삼아 나를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게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취약해질 수 있다.
225 어떤 감정이든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게 나를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들었고, 내 몸 밖으로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털어내고 나면 그 ‘말할 수 없는 감정’에서 조금 놓여나는 기분이었다.
225 그럼에도 분명한 건 감정과 감각을 표현해보면서 점점 더 나에 관하여 알아간다는 점이다. 인식하고 표현하는 순서도, 표현하면서 인식하는 순서도, 양쪽 모두 가능하다는 걸 알아간다. 너의 응원을 받아 나를 알아가고 알아낸 나를 너에게 표현해낸다. 앞으로 계속해서 감정과 취약성에 대해 편안해지고 싶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들여다보기를 불편해한다면 나를 남에게도 표현해낼 수 없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속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선은 취약성과 잘 지내면서 내 안의 평화를 되찾아 가려 한다. 그러면 나는 너에게 기댈 수 있을 것이다.
230 수줍은 태도가 수치심에서 나오고 수치심이 수줍음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 나로서 존재하는 게 불편해서 말이 적은 사람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수줍고 내향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하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나에 대한 발견이다.
237 남들 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말에 질색을 하면서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체 왜 수치심을 갖는가.
240 성취의 개념을 작고 눈에 보이지 않고 나에게 의미 있는 것들로 넓게 확장시킨다면 나는 좀 더 자주 기분이 좋고 좀 더 스스로를 믿어주고 좀 더 단단해질 수 있지 않을까.
242 나에게 아무리 괴상하고 별난 것이 있어도 그걸 글로 쓸 수만 있다면 괜찮다. 글로 쓴다는 건 알게 되었다는 뜻이고 소화시킨다는 뜻이며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뭉뚱그려진 감각을 조각조각 파헤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의미의 회복이다. 수치심에 관해 쓰면서 글쓰기에서 받는 위안이 더욱 커졌는데, 수치심을 가진 사람이 나를 드러내는 글을 쓴다는 사실이 스스로 위로가 되고 자부심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242-243 성취는 여전히 많은 측면에서 나에게 중요하다. 나를 세상에 증명해내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그 자체로 독이 되진 않는다. 건강한 성취욕은 내게 동력이 되어주고 나를 채워주고 나를 서게 만든다. 다만 지금껏 성취감이 짧게만 지속되었던 이유, 다음 목표를 허겁지겁 찾아 나섰던 이유를 잊지 않는다. 삶과 일과 관계들을 평가하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본다. 오래 지속되는 성취감, 나를 가득 채우는 충만함은 원하는 것을 성취할 때 그제야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프리랜서로서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인정하고 좋아한다는 점을 집을 나설 때마다 상기한다면 오후 세 시의 나도 이내 가슴을 펼 수 있을 것이다.
249 모두가 나라고 부르고 나라고 믿고 있는 무언가와 맞지 않는 듯한 느낌,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기분, 내 존재가 어디선가 어긋난 것만 같은 수치심이다. 나는 그를 마음으로 안고 속삭였다. 나도 그 마음을 알아. 너무 잘 알아.
249 본명에는 주어진 것들이 잔뜩 묻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된 것들. 존명으로 불릴 때 그 모든 것의 역사가 이름에 같이 달라붙어 재차 나에게 온다.
251 비록 인터넷이지만 - 어쩌면 인터넷이라서 한층 현실과 단절된 느낌을 주는 - 어떤 장소에서 천사딸기로 존재했던 경험이 나에게 알려준 것은 스스로 만든 새로운 이름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었다. 내 안에 있지만 자주 꺼내어지지 않던 특정 부분이 새로운 이름을 통해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해했다. 그건 ‘주연’이가 부르는 사람에 의하여 주댕이가 되고 주발이가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글쓰기 자아에게 그리하여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본명과 전혀 동떨어진 이름이었다. 나는 글로 만난 세상에서 그 이름으로 산다.
253 나로 사는 법을 계속 탐색해나간다. 이름을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나를 드러내는 법을 찾는다. 내가 나로 편안하게 있을수록 수치심은 줄어든다. 나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회복될 수 있다. 이름이 불릴 때, 슬쩍 발을 내밀어 문지방을 넘어본다.
254 사날 또한 세상의 풍파를 맛보았고 앞으로 더 겪을 테지만 사날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싶다. 아니, 그보다 풍파가 자신을 의심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수 있게 아무리 모진 풍파라도 잘게 쪼개어 소화시킬 수 있는 소화력을 주고 싶다. 마지막 글자에 붙은 리을 받침이 언제까지고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261 나는 아는 것을 믿는다. 한번 알고 나면 그것을 모른 체하든 멀리 치워놓든 정말로 모르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아는 건 문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당장은 직면하기 괴로워 문을 닫아두더라도 작은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 하나를 가지는 일이다. 빛줄기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걸려도 끝내 문은 열리고 방은 환해지고 앎이 나를 구해준다고 믿는다.
264-265 그렇기에 안다는 건 모르고 있던 상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차원으로 가버리는 일이다. 모르고 있으면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다.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채로 때로는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그저 휩쓸릴 뿐이다. 모를수록 파도는 위험하고 공포스럽고 강렬하게 느껴진다. 파도의 기원을 아는 상태라면 휩쓸려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다. 알고 나면 선택할 수 있고 모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아는 것이 비록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올바르게 이끌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게 수치심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적어도 이 감정과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게 되면 여전히 그 감정과 생각에 잠겨 있더라도 내 정수리가 수면에 바로 닿아 있다는 감각 정도는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물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숨을 쉬게 될 거라는 희망을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하더라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내뱉고 밖으로 꺼내놓는 것이 가지는 양기의 힘. 나는 글쓰기와 워크숍으로 나의 수치심을 양지에 드러내 놓고 뽀송하게 말리는 중이다.
267-268 스스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의 취약한 점을 사랑한다. 취약하지 않은 강인한 부분을 좋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무래도 취약성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의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거나 혹은 바로 그 점을 가슴 아리게 좋아하며 그의 취약성을 안아주고 싶을 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바로 그 관점을 나에게도 적용해보려 한다. 나는 나에게 친절하고 나를 믿어주고 나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타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보다 훨씬 미숙하고 서툴다. 나의 좋은 점, 강인한 점, 반짝이는 모습을 좋아하기는 쉽다. 반면 나의 어두운 면, 약한 면, 취약한 면은 좋아하지 못해도 사랑해주고 싶다. 아니, 사랑하지 못해도 안아주고 싶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 그대로. 나의 결핍과 단점과 욕망과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면 오히려 숨통이 트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애와 나에 대한 환상으로 꽉 찬 마음에 틈이 생기고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나의 약한 모습을 안아줄 수 있다면 그 따뜻한 포옹 안에서 수치심은 햇볕을 받은 습지식물처럼 갈 곳을 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