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피부
서늘한 문체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푸른 빛의 작품들을 단정하게 담아낸다

🔖 책갈피
8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무언가를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조금씩 물러나 있다. 이현아 작가의 푸른 공간을 사랑한다. - 최혜진 <우리 각자의 미술관> 저자
17-18 미지에 닻을 던지고 펜을 돛으로 삼아 자기 세계의 방향을 트는 사람을, 가만히 앉아 국경을 건너는 사람을, 나는 보고 있다.
40 나는 발튀스식의 노스탤지어를 바라본다. 그에게 있어 지나간 날에 대한 애도란 상실의 자리를 메우지 않고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다.
46 루시안은 인물이 거기 있을 때, 얼굴과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두 지켜봤다. 그의 초상은 단순한 인상에 그치는 법이 없다. 마치 사람이 시간을 살며 몸에 켜켜이 무언가를 쌓듯이 그럼에도 시간이 중첩된다.
52 누군가 바라봐줌으로써 또 누군가를 바라봄으로써 변화하는 경험. 한 사람의 진실을 한 겹 벗겨내거나 조심스럽게 덮어주는 경험. 두 사건이 모두 이 그림 안에 있다.
77 무언가에 닿은 피부는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동시에 피부에 닿은 대상의 상태도 알린다. 그 접촉면에서 대화가 일어난다. 무릎이나 종아리, 팔꿈치가 익숙한 물건들에 닿을 때 그 부피감과 무게감, 촉감과 온도는 평소 느끼던 것과는 깜짝 놀랄 만큼 다르다.
116 누구나 자신만의 캔버스를 지고 살아간다. 그 생각에 이르자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사람처럼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저 심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
153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위해 힘을 내기가 어렵다. 기운이 발끝에서 차오르다가 무릎에서 찰박인다. 그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다. 무엇에도 만족을 못 하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계속 도망쳤다.
185 어쩌면 종교이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는 것’에 있는 게 아닐까. 모든 시야를 차단하고 싶이 내려가는 행위에. 이 세계의 문을 닫고 저 세계에 발을 딛는 순간에.
222 어쩌면 사람을 변하고 물들이게 하는 것은 삶의 주변부에 조용히 쌓이는 순간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