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나와 우는 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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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체력이 유난히 빨리 닳았던 데는 팔자에 없는 객식구 노릇에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도 있다. 우의 가족은 내게 너그럽고 관대했지만, 남의 집에 산다는 것은 어지간한 염치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매 순간 나는 아무도 내게 주지 않은 눈칫밥을 부지런히 챙겨먹었다. 슬금슬금 책장 한 칸을 비워 내 물건을 수납하거나 손세탁한 면 생리대를 눈에 띄지 않는 집안 구석에 널어둘때마다 (너무나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우의 활동지원 일을 하고 있는 나의 인건비와 나를 먹이고 재우기 위해 우의 가족이 소요하는 비용을 따지거나 저울질하고 싶지 않았다. 우와 연애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우를 돌보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다.
88 나는 물리적인 이동의 어려움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삶으로 가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삶조차 욕심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나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90 우리가 가장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불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모르겠다. 특권을 의식하기엔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근본적인 단계에서부터 험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누릴 수는 없는 희소한 지적문화적 자원을 비교적 풍족하게 향유했다. 동시에 우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 이를테면 안전과 이동, 배변 따위의 문제와 내내 씨름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분수에 비해 지나치게 고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교육받았고 지성을 갖추었다는 사실, 교양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자랑스럽다기보다 종종 부끄러웠다.
우리의 앎은 우리의 삶과 너무 달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자주 헷갈려했다. 날씨가 좋고 커피를 마신 어느 오후엔 문득 우리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불쑥 가슴이 벅차고 손이 떨리기도 했다. 사는 게 팍팍하고 고달픈 날에는 우리가 그 누구도 아니며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씹어서 꿀꺽 삼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전자의 날들보다는 후자의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91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염려해주는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을, 우리 앞에 무한한 희망과 행복의 세계를 열어젖혀주는 열렬한 선의를 무뚝뚝하게 자르거나 꺾지 않고서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지 몰랐다. 그것들이 정녕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접근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때마다 찾아드는 좌절과 상실감이 하나하나 설웁고 애달프다는 것을 말할 수 없어 난감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꿈꾸기엔 애당초 할 수 있는 덕 자체가 너무 적다는 걸 깨달은 우리는 점차 오래 방치된 풍선들처럼 광택을 잃고 쪼그라들었다.
92 다른 이들이 나날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말하자면 정상을 향해 세상의 절벽을 오르고 또 오르는 동안, 우리는 그들에겐 지극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니까 정상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더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그들의 시간과 공간을 닮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앎을 닮지 않은 것처럼.
포기는 우리가 불가해한 일상을 살아가는 가장 유용한 방식이었다. 체념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익혀야 했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나는 잦은 포기와 습관적인 체념이 우리의 무능력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일까 봐 두려웠다. 세계는 우리에게 모질고 냉담하였고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을 부적절하거나 위법한 것으로 여겼다. 세계는 우리에게 낙담과 비참을 가르쳤다. 우와 나는 차차 유순하게 길이 들었다. 분노해야 할 때 수치심을 느꼈고 바깥으로 화를 내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 우울을 감추었다. 긴 시간 고인 우울은 냇물이 자라나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점차로 깊어지고 거칠어지고 사나워졌다.
93 나는 늘상 수모를 겪는 우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마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세상에 따로 있다는 듯이 그렇게 생각했다. 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얘가 내 옆에서 이런 대접 받고 있을 애가 아닌데. 마치 자기는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는 듯이 그런 말을 했다. 차별적인 세상에서 나날이 지치고 소진된 연인들은 그런 비틀린 칭찬으로만 서로를 아껴줄 수 있었다.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구나. 너는 나와 다른 시공간에 속해 있었어야 온당한데. 그것이 우와 내가 서로를 위하고 알아보아주는 오만하고 고달픈 방식이었다. 우리는 콧대 높고 시건방진 연인들이었다. 서로를 칭송하고 찬사하려다 각자의 빈곤함만을 상기하고 마는 연인들이었다. 아랫돌을 빼어 윗돌을 괴던 궁핍한 날들. 서로를 안으려는 일과 서로를 향해 허물어지는 일이 분리되지 않던 밤들
145 나는 때로 사람들의 악의를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무구하고 구김살 없는 사람들을 남몰래 시기했지만 찬이만은 좋아했다.
151 내가 왜 이 가냘픈 작은 세계, 한순간 지어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세계에 번번이 마음을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나 사라진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삶, 어떤 세계가 한때 있었음을 영영 믿지도 잊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삶을 공연자의 삶이라고 말해본다면, 공연을 만드는 일이란 어쩌면 내가 우와 있었던 시간을 다루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152 한편 꿈이 생겼다는 것은 나를 이전보다 불행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내 삶과 일상이 근본적으로 위태롭고 불만족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다른 많은 영역이 그러하듯 공연예술 역시 유구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비장애신체의 전유물이었으므로. 공연하는 삶은 유동적이고 비효율적인 스케줄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공연이 적자가 나도 생계를 유지하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경제력을, 밀도 높은 연습과 실연을 해낼 수 있을만큼의 튼튼하고 맷집 있는 몸과 마음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공연은 내게 강력한 헌신을 요구했다. 우에게 지금껏 바쳐 온 것만큼이나 광범위하고도 집중도 높은, 누군가를 이미 돌보고 있는 몸으로는 도저히 병행할 수 없는 헌신을.
224 안팎에서 감각되는 모순과 낙차를 더는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린 것들이 끝없이 발견되었다. 머릿속은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으로 금세 빼곡해졌다. 한편으로 비건이 되는 일은 좌절과 우울을, 슬픔을 데려왔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죽음에 관여하는 사람, 고통을 가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랬다. 나 자신의 잔혹함과 끔찍함을 되새기는 방식으로 실천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나는 새로이 상처받았고 매번 끝없이 외로워졌다.
실은 죽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고통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미안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다. 삶은 부정확하고 궁색한 몸짓이 되어갔다. 스스로의 무고함과 결백함만을 입증할 뿐인 두루뭉술하고도 결벽증적인 자학과 구분되지 않았다.
225 미끄러지고 허물어지는 순간에 적당히 딴청을 피우거나 망각하는 너그러움을, 내 실수와 불완전함을 모두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해지지 않는 요령을 익혔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화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의 몸과, 그리고 내가 그간 먹어온, 죽여온, 내다버린, 외면한 몸들과 화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스스로와의 고통스러운 불화를 그만두고 싶었다.
230 목이 빠지게 기다려봤자 인생의 타개책이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고 나는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인생의 무엇도 그냥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런 전제부터가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점에서 그 예감은 지극히 옳고 타당했으며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고 유혹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설사 모든 것을 잃는다 한들 우리 손 안에 어떤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대수롭지 않았을 예감이었다. 삶을 이루는 중요한 것들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으며 우리가 누군인지는 우리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더라면 쉬이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예감이었다.
237 그러므로 이렇게 이어 적어둔다. 그런 애였어서 그런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애였어서 자기의 어려운 사랑을 얼마간이나마 할 수 있었다. 그 애조차도 자기 자신의 편이 아니었지만 그 애의 사랑만은 그 애를 이해해주었다. 그 애의 사랑이 그 애를 살려주었다.
241 이제 내 몸과 마음은 다시는 우와 있을 때처럼 반짝이지 못할 거야. 내가 살았던 기쁨과 슬픔은 세상에서 오직 우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었어. 나는 우를 떠났지만 그것들은 나를 떠나지 않고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그토록 아름답고 연약한 것들을 내게 가르쳐주어서 고마워.
우가 지금 사랑하는 이들을 지극히 사랑했으면 좋겠어. 우의 몸에 남아 있는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힘만은 남아 있으면 좋겠어. 내가 다 못 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서 받고, 내게 다 못 준 사랑을 그들에게 주었으면 좋겠어. 우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어. 내게는 더 이상 불가능한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244 은빈의 삶이 은빈을 사랑하듯, 우의 삶이 우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