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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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반이 가깝기 때문에 이전에도 분명 봤을텐데, 옥상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는게 신기했다. 세진에게 교과서를 빌리러 왔었다면 대화는 나눠 보지 않았더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이제 와서야 하루에 두세 번도 더 내 눈에 띄는 수현의 정체가 궁금했다.
87 수현은 나를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근데 수현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인지, 중요해지고 있는 중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애는 어느 정도로 친해야 친하다고 느끼는지 궁금했다.
91 아저씨가 나를 살렸다는 사실이 내가 나를 더 좋아해도 되는 건지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95 나는 수현의 그런 순발력이 신기했다. 아무 계산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들이.
102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103 내가 나로 이루지게 된 어떤 이유들처럼, 수현도 어떤 기점이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106 나는 조금도 내 삶을 양보하지 못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107 “너랑 이러고 있는 게 신기하다. 우리 얼마 전까지 잘 몰랐잖아.”
“그러게.”
“나는 진짜 너를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어.”
수현이 들릴 듯 말 듯한 모곳리로 말했다.
111 지금의 나보다 한 살 어린 언니를. 단정하고 모범적으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이기도 했다. 어떻게 두 개의 가능성이 한 얼굴에 공존하지.
112 내가 언니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갑자기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났다.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은 다 예뻐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 의외로 이타적인 구석이 있어서 포장을 잘해 줘. 아, 너희 언니가 미화되었다는 건 아니고.”
113 짜증을 내다 보니까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119 엄마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가끔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언니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언니에 대한 무서운 자부심이 있다는 것을 느껴왔다. 언니가 누군가를 살리고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언니의 죽음은 그저 그런 죽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다른 희생자 가족에 비해서 엄마가 일찍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원동력임을 알고 있다. 상대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는 유가족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의 하나 남은 딸이자,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이다.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
너무 과한 생각일까?
123 수현과 있으면 모르고 싶었던 것들도 자꾸 알게 되고, 묻혀 있던 것들도 어느새 발견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포함해서.
134 사실은 잘 모르겠다. 언니에 대한 기억이 내 어딘가에서 발굴되는 것인지, 혹은 발명되는 것인지를.
143 선생님들은 평범하게 자라 준 내 모습을 보며 마치 나의 오랜 후견인이라도 된 것처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 시선에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개를 산책시키던 할아버지처럼 사나운 사람들은 살면서 별로 만나 보질 못했다. 대부분 나를 좀 더 배려하려 했고 그 유난한 시선에 익숙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149 나를 생각하면 참사가 떠오르는 것도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기적의 상징이 된 것, ~~
154 십이 년 전 기사에는 ‘희망’이나 ‘기적’이나 ‘빛’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세계 전체에 희박한 것들을 굳이 내게서 찾으려는 시도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191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198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209 “너랑 있으면 그래도 아빠를 손톱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어져. 진심이야.”
211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나를 보고 좋아한다는 거지? 내가 어떤 애가 될 줄 알고? 아닌가. 오히려 어떤 애가 될 줄 잘 모르니까, 몰라서 좋아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렇게 자랄 줄 미리 알았어도 엄마가 나를 좋아했을까.
217 “교회 주차장에 깔려 있는 자갈 같은 거 말이야.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그냥 그런 상태인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상태인 거야. 거기에 내가 넘어져서 긁히고 베여도 화를 내는 게 무의미한 거야. 내가 돌멩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거고, 돌멩이가 내 감정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인 거야.”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냥 그런 인물이 되어 보고 싶어. 한 번 정도는 말이야.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 말이야. 행동의 의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오히려 백 가지로도 천 가지로도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