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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세계

2023-08-13 저자: 위수정 출판사: 문학동네

🔖 책갈피

은의 세계

34 목소리는 잘 안 늙거든. 제일 천천히 간대, 목소리가.

안개는 두 명

풍경과 사랑

95 One to one correspondence. 그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연호가 떠난 후 나는 발코니로 가서 섰다. 그러나 곧 뒤로 물러났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만큼 나는 두려웠다. 연호가 올려다볼까봐. 나를 발견할까봐.

99 사람들은 너무 함부로 말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103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계속 걸었다. 저래도 봄이 되면 또 난리 나겠지. 나는 앙상한 나무들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또 난리 나겠지.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겠지.

무덤이 조금씩

120 닦을수록 망쳐버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닦지 않을 수도 없었다.

150 독설을 거침없이 날리던 쾌활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예전에 보았떤 사람이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버렸다.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기억 속의 여자와 요양원의 여자는 그냥 다른 사람. 그래서 나는 가장 마음에 드는 내 어릴 적 사진을 꺼내놓고 자주 거울을 보며 비교해보았다. 나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까봐.

마르케스를 잊어서

Take Me Somewhere Nice

214 광고주들과 개인적인 칠분을 쌓아 나중에 독립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역시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연말이 올 때마다, 아 시간 더럽게 빠르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233 자꾸 모르는 척하고 싶어. 이해돼?

화양

241 짐보는 나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기에 그에게는 마치 땅을 파서 비밀을 이야기하고 묻어버리는 것처럼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할 수 있었다.

음악의 도움 없이

301 아무것도 참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불청객이 되고 싶었다.


해설 부정도 탐색도 없이

306 위수정의 소설은 인과관계가 명확한 화소들이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확정적이지 않은 느낌이 지속될 수도 있겠으나, 매 장면들은 전혀 희미하지 않고 그 연쇄는 결코 헐겁지 않다.

309 그의 인물들은 아는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르는 것을 따라가는 신체들이어서, 그의 소설은 마치 감독의 머릿속을 잘 헤아리지 못한 배우들의 몸짓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같다. 그들의 신체를 지켜보며 그 세계로 진입한 우리는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다만 그들이 겪은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사소하거나 중대하거나 특이하거나 똑같이, 이미 알려져 있는 또는 비로소 알려지거나 알아내야 할 세계의 의미를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의미를 알지 못하는 세계를 헤매며 어느새 우리를 이끌 뿐이다.

311 감각이란 신체가 세계와 만나는 접점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진짜가 아님에도 뚜렷하게 현현하는 이런 환각/착각은 이들의 신체가 세계와 만나는 지점이 불안정하거나 불확실함을 뜻할 터이다. 신체는 고유한 감각을 통해 세계 속의 자기를 동일화하는 자리다. 착각하는 신체는 세계와의 접점을 자기동일성으로 집중시키지 않는 대신 자기 신체를 세계의 여러 방면으로 개방해버린 신체다. 매번 자기 몸의 감각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현실화된 세계의 의미를 따라가는 대신 의미화되지 않은 다른 앎 혹은 다른 세계에 대한 앎을 만난다.

313 요컨대 헛것을 실감한다는 것은 확정된 의미가 아니라 그 외부를 감각하는 것이다. 착각하는 신체는 현실화된 세계의 의미를 아는 데는 실패하지만, 그 의미의 외부를 감각함으로써 다른 앎으로, 다른 이해로 나아간다.

314 진실이 의미를 이어가게 하는 힘이라면 거짓말은 의미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다. 진실을 복구하지 않는 이들의 거짓말은 의미를 파편화하고 의미를 종합하지 못하게 한다. 거짓말은 의미 작용의 망을 빠져나가는 말이며 의미 작용으로 접근이 안 되는 말이다. 그래서 거짓말은 의미를 만드는 말이 아니라 의미에 한계를 짓는 말이다. 거짓말은 의미의 파편을 번식시키고 의미들 사이의 틈이 발각되게 한다. 헛것을 실감하는 착각과 진실을 복구하지 않는 거짓말을 통해 이들은 주어진 현실 또는 세계의 의미를 비껴가는 중이다. 확정된 세상의 바깥을 더듬는 중이다.

315 이들은 그곳에 둔감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버티기가 힘든 것이다.

317 남들의 손가락질이 없어도 스스로 묘한 모욕감과 수치심에 휩싸인 가운데 감행하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되는 그 이야기들이 현실의 화양연화가 되리라 기대하는 건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순진한 만용일 것이다.

317 순진하지도 우둔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이미 속해있는 이 세계 - 선택의 외양을 띠고 주어졌기에 거부할 수도 없으나 아무래도 끝내 동의할 수는 없는 현실 또는 현실의 체제 - 는 두렵고 무섭다기보다 어렵고 무거운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은 종종 무엇을 잘 모른다기보다 잘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 어려움과 무거움을 조금 덜기 위해 터져나오는 몸짓처럼 보인다.

318 불청객이 되는 여자들이 주어진 체제 속에서 착각하고 거짓말하고 폭소를 터뜨릴 때, 현실의 체제 혹은 주어진 질서의 의미를 모른 채 헤매거나 때로 그것을 망치며 지나가는 그녀들은 미친 년 또는 썅년의 이름으로 체제에 기입되기도 한다. 명은, 유리, 화영, 인영, 홍, 민수 등 이 책의 거의 모든 여성 인물들은 누군가에게 미친년이나 썅년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들이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는 그녀들 스스로 미친년-되기 또는 썅년-되기를 수행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욕된 기표의 자리를 스스로 맡아야만 그녀들은 이 세계에서 이름없이 떠도는 신체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남성적 언어 질서의 빈자리를 떠안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의 독단과 무능을 뒤집음으로써, 마치 퀴어라는 이름을 자처하는 퀴어의 전략처럼. 어쩌면 그녀들은 미친년 또는 썅년의 자리에서의 경험이 이 세계에서 말해질 수 없는 여성성 또는 가면 쓴 여성성의 혼돈으로 가려지고 마는 사태에 저항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세계의 남성적 이야기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 너머의 세계를 감각하는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마치 아무 얘기나 하는 듯 착각과 거짓말을 석/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솔직하고 싶은 욕망으로 이렇게 풀어냈듯이.

320 그 장면들은 이 세계의 불청객이 포착하고 감각하는 경험을 전달한다. 가시적인 맥락 없는 비현실을 환기하는 착각, 진실의 맥락을 교란하고 의미를 중단하는 거짓말, 체제의 난관과 무게를 떨쳐버리려는 폭소 등. 지금까지 읽어온 바를 정리하면서 다시 말해본다면, 위수정의 소설은 주어진 체제에 대한 감응이 아니라 그것을 이탈한 감각을 따라가는 경험, 자기 삶이 놓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세계를 견디기 위해 터져나오는 충동, 자기 동일시의 앎을 추구하기보다 앎이 되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

326 그러나 역시 감정이란 의지나 유용성과 무관하여 아름다운 것. 나를 나로, 나를 내가 아니게 만드는 것.

328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도

종종 나는 혼자라고 느낀다.

그러한 마음이 나를 글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언제부턴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누구의 손을 잡고 싶었던 건지도 이제는 잊었다. 잊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는 쪽으로 무한히 향하는 식물들처럼 나 역시 손을 거두지는 못하리라. 끝내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독파챌린지

  1. 표제작 ‘은의 세계’는 어떠셨나요? 이 작품은 코로나의 풍경이 듬뿍 묻어있는데요. 지나고 나서 읽으니 코로나 시기가 아득하게 멀리 느껴지기도 합니다. 코로나 시대, 그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이상했거나 기묘했던 풍경이 있었나요? 함께 공유해주세요.
  2. 옛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된 경험이 있나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안개는 두 명 처럼 거짓으로 써주세요.)
  3. ‘풍경과 사랑’ 어떻게 읽으셨나요? 혹시 불편한 부분이 있었나요? 혹은 사회적 통념과 도덕에서 벗어난 금기의 작품을 읽을 때 묘하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나요? 순수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인물들의 모습 어떠셨나요?
  4. 하루 21페이지가 꽤 많은 분량일 거예요. ‘무덤이 조금씩’ 잘 읽고 계신가요? 여기까지 읽고 오신 분들 정말 잘하셨어요! 대단하세요! 무던이 조금씩도 어떻게 서사가 흘러갈지 감이 안잡히시죠? 등장인물들은 우연히 묘지에서 함께 만나게 되는데요. 여러분은 낯선 여행지에서 친구를 잘 사귀는 편이신가요?
  5. 환하고 조용한 대낮, 듣기에 좋은 음악 뭐가 있을까요? 여러분의 추천곡을 남겨주세요.
  6. 화양의 나는 왜 재영의 집을 찾아 관리인에게 암에 걸렸다며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 상황은 실재일까요? 환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