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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을까

2024-09-08 저자: 안예슬 출판사: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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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여성 청년이 고립되는 과정에는 가부장적 억압과 불안정 노동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런 공통 경험이 있는데도 여성 청년들은 자기 자신을 탓했고, 사회는 물론 주변에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68 반려동물을 돌보는 데에는 돈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기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동물하고 일상을 함께할 수는 없다. 내 삶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동물하고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한 나는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74-75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한 가수를 좋아하는 팬이라는 사실 말고 공통점이 적었지만, 바로 그 사실이 가장 크고 중요한 닮은 점이었다. 수현처럼 나 또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그곳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98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이 사람이, 이 장소와 모임이, 이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아픔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자기가 겪는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는 이는 공감을 받은 경험이 있거나 더는 견딜 수 없는 사람뿐이다. 견딜 수 없을 때 말하기가 아니라 죽음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100-101 자살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삶의 여러 굴곡을 지나면서 아픔을 겪고 치유하는 과정을 오롯이 혼자 버티다가 몸과 마음이 견딜 수 없게 되면 그제야 죽음이 다가온다.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은 죽음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있다.

121 세상과 나를 잇는 첫째 번 관계에서 나는 받은 만큼 돌려줘야 했고, 나는 그 뒤 동등한 교환이 가능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관계는 곧 교환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는, 대답 없는 영상 속 세상에 연결됐다.

128 독립은 온전히 혼자서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주변의 지지와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

129 진로와 원하는 삶을 탐구하려면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면 다양한 경험을 하고 고민도 해야 한다. 그런데 재희는 가족에 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가족이 모은 돈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느라 자기를 돌보고 미래를 상상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172 그런 요소들(20대 초반 대학생의 삶의 이벤트) 사이에서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고, 돌보기는 힘들다. 그 친구들과 나는 그저 주어진 삶을 살 뿐이었다. 생각하면 나하고 처지가 비슷한 이들도 분명 있었다.

189 취업처럼 생존과 존엄을 좌지우지하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사회를 탓하기보다는 자기를 탓한다. 이 사회가 문제라면 나 혼자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가진 자원이 없어서,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내 외모가 별로 좋지 않아서’ 내가 이 꼴이라고 생각해야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닦달하다가 어느 순간 진신을 마주한다.

“여자라서 안 뽑았다. 여자라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무색해지는 그 순간, 우리는 배제되고 고립된다.

200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갈등은 당연한 과정이다. 인정받으려고, 맡은 업무를 완수하려고 골몰하면 각자 의견이 생기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이 낸 의견이 나하고 다르면 부딪치는 일이 생긴다. 타협하고, 합의하고, 때로는 박 터지게 싸우고, 어제까지 껄끄럽던 사람이 오늘은 더 껄끄러워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이 준 상처를 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다. 동료들에게 내 밑바닥을 보여주고 상대방 밑바닥을 마주하면서 인간 세상에 환멸을 느끼다가도, 결국 사람 덕분에 다시 힘을 얻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진정한 동료가 된다.

220 별것 아닌 일로 화낼 수 있다면 그만큼 그 사람은 내게 안전하다는 의미다.

225 정상성과 안전망을 회복하고 원가족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거쳐 결혼이라는 일반적 현상하고 결합한다.

229 미래의 결혼이 아니라 현재의 지지와 인정이 중요하다. 지금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앞으로 내 어떤 모습도, 어떤 말과 글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여성 청년이라는 이유로 가르침이 필요한 대상이 된다. 그런 이들은 결혼을 둘러싼 우리의 고민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와 미래를 기혼과 비혼에 얽힌 이야기로 읽는다. 결혼을 둘러싼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는 평생 가보지 못한 세계를 향한 열망이, 정서적 안정과 성장이라는 희망이 자리하는데도 말이다.

233 고립의 다른 이름은 아픔이다. 아픔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을 알아본다. 내가 던진 질문은 사실 구체성이 없는 상대를 향했다. 그렇지만 여성 고립 청년들은 ‘나 같은 상황’에 있고 ‘나 같은 고통’을 겪는 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고심했다.

240 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수는 무척 중요한 문항으로 여겨진다. 개인이 지닌 사적 자원의 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공은 이 숫자를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기관에서 일할 때 내가 전문가 자문을 거치고 나서야 질문을 넣듯이 문항에 포함은 하지만주목하지는 않는다.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밖에 나오지 않는 이에게는 프로그램이나 일자리를 제안하면서 외출을 권하지만, 도움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는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모른다. 나도 이 문항을 통해 대안을 내놓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는 구조적 한계의 실체를 건져내야 한다. 세진처럼 주변에 관계 자원이 없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고립에 가깝고 생계 위험도 훨씬 크다. 당연히 가족 배경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