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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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음악 시간에 교실 앞에서 나 혼자 불던 리코더 소리가 잠깐씩 나타나는 검은색 직선이라면, 선생님의 리코더 소리는 동그랗게 나부끼는 하얀 커튼 같았다. 좋은 연주는 그 공간을 과분하게 채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23 선생님의 리코더 연주 같은 글이 쓰고 싶어졌다. 쉬워 보이는 것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온기는 가만히 있는 개인을 움직이게 했다. 내 글의 모양은 평범한 누군가의 마음처럼 아주 흔했으면 좋겠다. 잠깐씩 피어났다 사라지는 그 쉬운 마음을 분명하게 다잡아 표현해낸다면, 어쩌면 선생님의 리코더 소리처럼 찰나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고서 작은 나아짐을 겪고, 당신의 자리로 달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마음을 더듬어서 오늘의 마음을 괜히 기록해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24 사소하지만 흔한 것부터 가까이 들여다보고 쓰는 일은 근사한 한 곡의 리코더 연주와도 같다. 지금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뒤늦게 떠올려봤을 때에도 분명히 그려지는 장면을 갖게 된다.
34 지금이면 좋았을 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언제라도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다.
75 그러나 부지런히 나를 키울 순간들을 챙겨야 한다. 좋아하는 걸 어렵게 만나고, 시간을 들여 기다리고, 고르고 고른 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정성이 필요하다.
87 자신을 계속해서 알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테이블이 필요한 법이다. 작업실에 각자의 책상에 앉아 오늘 자 업무를 보듯이, 집에서도 자신에게 딱 맞는 앉은키의 시간이
89 얼마든지 다른 우리가 같은 집에서 이렇게 매일 만나고 있다. 같은 곳에 꽂힐 줄 모르고 살다 만났기에 우리가 다른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자, 오늘 자 페이지가 부드럽게 넘겨진다.
91 가끔 어딘가 망가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나사 하나가 핑그르르 빠져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인데, 사실 그 나사가 없어도 딱히 문제는 없다. (…) 고등학생 때의 나는, 같은 자리에 똑같이 나사가 없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에 잠기곤 했다.
103 어떤 시작은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몰랐던 세계로 고개를 숙인다. 어쩌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은 일보다 내 안에 선명하게 남을지도 모른다. 그 자국이 언젠가의 나를 만들기도 하면서, 우리의 어떤 면은 느즈막이 자라나지 않을까.
119 매일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을 향하는 마음이 지속된다면, 책을 닮은 사람으로서 한 장 한 장 다르게 넘겨지며 어제보다 두툼한 내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
121 책의 세계는 그만큼 크고 책과 사람이 더해지면 각각의 세계 또한 서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넓어진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선뜩 답하지 못한다면, 어떤 책을 닮고 싶으냐고 조금 고쳐보자. 어쩌면 도ㅣ고 싶은 내 모습이 책으로는 금방 떠오를지도 모른다.
129 차곡차곡 나의 사전에 쌓일 단어들은 그 의미는 그대로 품고 있되 얼마든지 풍부해져 있으면 좋겠다.
132 단지 글씨체가 이렇구나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내 그림과 글씨체로 나를 바라보려고 하는 그의 시간이 내게는 사랑으로 느껴졌다.
132 “와. 정말 좋다 그말. 즐거운 만큼만 무리한다는 말.”
140 서점을 운영하는 친구가 한 말이 있다. “[Web 발신] 문자 뒤에 사람 있다”고.
142 쓰레기처럼 후기 또한 시작이다. 후기는 결국 나에 대한 기록이기에. 내가 먹은 것, 내가 필요로 했던 것, 내가 희망했던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겪은 사소하고 어쩌면 대단한 것을 적는 일이다. 그 문장에서, 자신의 하루에 대해 얼마든지 새롭게 적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쉽게 지나쳐버리는 나의 세밀한 면모는 나의 세밀한 면모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을까.
143 지금은 무언가를 쓸 때 생각한다. 모르는 누군가가 보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내가 이걸 다시 본다고. 나중의 내가 나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을 알고 있다. 그 말을 하지 않기만 해도,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144 결국은 나에 대한 이야기만 주절거리는 후기가 될 테지만, 그 덕에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떠올려보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란 이미 지나간 내 모습을 다각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필요한 글이다.
162 노곤노곤한 타인의 하루는 쉽게 자기 연민의 양념으로 쓰인다. 나의 풍경을 여러모로 찡그리고 보기 시작하면 남들의 일도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타인에 대한 까끌까끌한 부러움은 그렇게 생겨나고, 오늘의 하루에 그림자가 지고 만다. 일이 마냥 피곤하고 그래서 일과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 고이고 고이면 조금씩 마음이 상해버린다. 일을 좋아하면 지는 것 같아서 일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진심을 다해 일하는 것 같은 사람을 깔보기 시작한다. 결국 일의 크기보다 더 큰 감정 소모를 겪게 된다.
163 먹고 크게 체한 음식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여러 제작 업체를 알아보고 제작 발주를 넣는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163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것. 이것이 일이 정말 일이 될 때 찾아오는 뚜렷한 슬픔이었다.
167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소한 부분에 만족하고, 만족하기 위해 사소한 부분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 일에 대한 책임감과 흥미, 그리고 나를 위한 만족과 모처럼의 열중이 더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순간들. 이 순간들이 모여 좋은 책, 오래 기억될 책이 만들어진다. 적어도 책을 만든 사람에게만큼은 좋은 책으로 남는다.
169 오늘도 책의 길을 걷는다. 묵묵히 걸으면서 인정한다. 이 길이 그저 좋지만은 않을 테지만, 내가 좋아할 만한 순간이 분명히 차려진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 일을 하다가 좋은 순간을 만나면 좀 또랑해지자. 좋다고 느낀다면 나에게 똑똑히 알리자. 적어도 내 일을 창피해 하진 말자. 모처럼 열심히 하고 싶다면 나에게 시간을 주자. 몰두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미리 잠을 잘 자두자. 혼자인 시간을 너르게 두자. 일이 힘겹게만 느껴진다면 빠르게 끝내고 다음을 바라보자. 마음을 위해 감정 없이 일해도 되지만 힘들면 힘을 빼고 멈추자. 그리고 나의 숲속에서 가장 구석진 곳을 들여다보자. 그 다음에는 숲 밖으로 나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자. 책은 책으로 보자. 책을 좋아하는 나와 책이 되게끔 하는 나, 둘의 다짐은 나의 길을 더 멀리 낸다.
170 어쩌면 그 마음은 제가 글을 쓰는 마음과도 닮은 것 같습니다. 유난스럽다는 말에 어울리는 마음입니다.
- 구한나리, <올리브 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중
174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점차 나를 귀여워하면서 이제는 없는 나의 면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내가 한 일이 낯설어지고 점점 타인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때, 지난 나의 행복들을 구경하게 되고 오늘의 적적함은 새삼 도드라진다. 그리고 이 적적함을 어쩌면 지금의 나는 좋아하고 있는지도.
175 본 책을 다시 읽을 때면 전에 못 느낀 보물 같은 순간이 찾아오듯이, 다이어리 속 쪽지들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이야기는 변하지 않지만 나는 어떻게든 변하게 마련이라, 나의 시절마다 다르게 찾아드는 대목들은 지금의 나를 기어코 감각하게 한다.
186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종이 위에서 말하고 싶어졌고, 모든 버려질 이야기들을 전부 읽는 무언가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더욱이 읽고 싶다.
187 마치 납작하게 있던 상자가 세워져 품 안에 공간이 생기는 것처럼, 책도 나도 여백이 생긴다.
188 다음을 모르는 이야기를 한 글자씩 밟아나갈 힘이 생기는 좋은 문장은 때때로 찾아온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인데, 책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직업인이 되는 나는 이런 순간에 제각각의 두근거림을 느낀다.
189 그렇게 나의 문장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쓸 말이 생각난다. 잃음과 동시에 누리는 희망찬 상실을 맛보게 된다.
191 마음으로부터 좋다고 느끼는 책은 어째선지 슬프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누군가의 언어로 만났을 때, 나의 문장을 잃는다. 책을 읽을 때마다 문장을 읽게 된다. 잃게 되는 문장이 많은 책을 읽고 싶다.
203-204 조급하지 말자고 다짐했기에 가능한 읽기였다. 조급한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지. 일의 과정이 쏙 빠지게 된다. 조급한 사람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이루어지는 관계 앞에 서면 얼굴의 표정도 표면도 딱딱해지게 마련이다. 지금을 즐기며 조금 늦더라도 이 순간에 대해 알아가는 대화 방식이 좋은 건, 우리 안의 것들을 하나씩 세심히 바라보는 자세가 결국 관계를 만든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홀로 흥미롭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잃는다. 관계란 서로의 마음을 끌기 위함이 아니니까. 억지로 당겨지는 일이 아니니까. 우리의 전과 지금과 다음을 느긋하게 함께 바라볼 때, 우리는 정말 우리가 된다.
209 책방은 책을 읽으러 가는 곳이기 이전에 책의 세계를 만나러 가는 곳이니까.
215 “이제 막 만난 책, 그 사람에게만큼은 신간이다.”
224 천의 세상에서 마음껏 유영하며 지내는 두 사람에게는 내가 하지 못하는 상상의 너비가 있었다.
225 내 손을 잡고 내가 모르는 숲속을 당당하게 걷는 두 사람 덕분에 내 그림은 어느새 천 위에 자연스럽게 자리해 있었다.
225-226 제작을 잘 아는 실무자가 아니더라도 즐겁게 얼마든지 상상하는 힘을 기른다면 일을 하는 스펙트럼은 무궁무진하게 넓어질 것이다. 설득을 바라는 입장에서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없는 걸 기꺼이 이해하는 마음으로 일한다면, 도착한 실재의 물건은 분명 다르게 봉리 테니까. 그런 입장이 어떤 과정에서든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
238 독서 생활에 있어서도 다독가가 끝내 되지 못하겠지만, 내 방식의 책 사랑은 어떻게든 내 안에서 진해질 것이다. 오늘이기에 만날 수 있는 책과 문장이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242 종이 속 세상이 내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하길 바라며, 지금은 그저 좋은 장면을 열심히 모으는 때라고 생각하며, 지금과 종이를 아프게 비교하기보다는 기꺼이 희망을 가지려들었다. 나에게는 다음이 분명히 있다는 희망과 좋아하는 찰나들이 모인다면야 이 한 권 같은 하루가 당연해질지 모른다는 희망. 아직은 ‘아직’인 나이였으니까. 언젠가 이 세상이 내 것이 된다면, 이 게임의 스틱을 내가 쥔다면, 나에게 어떤 세상을 살게 해줄지를 준비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279 양보는 한 발짝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니라, 모르는 방향으로 세상 넓어지는 일이었다. 나의 주장을 굽히면서 나아가는 시는, 아랫줄로 향할수록 오히려 마음에 드는 시가 되었다.
282 아직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니까 당연히 절대 닳을 리 없는 나의 뒤축이 부럽다니. 뒤축이 말랑말랑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말랑말랑한지 모른다.
285 뾰족한 한 명을 바라보는 글쓰기는 의외로 나를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288-289 대니 샤피로의 쓰는 생활을 읽을수록 이상한 위안을 받았다. 나를 깊게 보기로 한 삶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들은 덤덤한 응원이 되고, 나의 자리에서 분명한 마음을 갖게 한다.
289 나를 쓰면서 찾게 되는 내가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쓰면서 오늘을 겨우 살아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 않았던 생각, 했으면 좋았을 말, 이제야 정리되는 기억, 지난날 무지했다는 인정, 그리고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을 찾았다.
290 차마 말 못하는 내 삶의 사고가 어쩌면 책 속의 사건이 될지도 모르는 희망을 가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사고를 사건으로 만드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