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던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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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애초에 죽음이라는 초현실적인 단계 앞에서 결혼으로 만들어진 가족보다는 사는 동안 어떤 커뮤니티를 형성해왔는지가 더 중요하다.
55-56 법적 가족이 아니면 생활동반자는 아무 권리도 없는 고리타분한 나라에서 법보다 더 강력한 연대를 자주 본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식구가 될 수 있다. (…) 그들은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십수 년간 연락이 끊어진 상태여서 시신 인도조차 거부하는 가족은 법으로 인정받지만, 십수 년간 상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은 혼인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이 되어버리는 걸 보면서 진짜 부패한 건 허울뿐인 법과 제도라고 생각했다.
80 벽을 굳이 넘지 않아도, 벽을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조금 멀리 돌아가면 되는데 이 사회는 그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완행을 역행으로 읽어버리는 사회의 자막이 정말 비상이지 않을까. 많은 이들에겐 돌아갈 길조차 없다.
81 그들은 도피 목적의 투신보다는, 잃었던 목적지를 이제야 발견하곤 굳은 결심으로 직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143 버티는 자에게 신체나 정신적 상처 말고 뭐가 생기는지 잘 몰랐는데 전우 한 명쯤은 생기더라.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며 함께 치유법을 배워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 짬밥이었다. 너는 나에게로 와서 한 그릇의 짬밥이 된 것이다.
162 과거로 가득한 엄마의 장롱엔 새로운 기쁨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매 계절 달리 덮는 이불이지만 결국 매 계절 반복해서 추억을 곱씹는 것이었다. 추억은 물건과 달리 삭지도 않는다.
170 근속 기간이 쌓일수록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173 아무리 일은 일로만 처리하고 직장은 건조하게 직장으로만 대하자 싶지만, 나의 경우 일이 어느 정도 자기효능감을 충족시켜줘야 지속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돈만 준다고 모든 업무를 다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만을 상쇄할 만큼 막대한 연봉이 보장된 것도 아닌 데다가 애초에 공무원은 업무에 비해 제대로 된 돈을 받지도 못한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사소한 거 하나라도 칭찬을 들은 적이 없다.
174 우리나라는 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을 사는 게 전쟁이다. 이들을 ‘변사자’ 대신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한 ‘전사자’로 부르는 게 옳을 지도 모른다.
175 죽음은 또 하나의 쉼표일 뿐, 그 사람이 남긴 모든 것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은 아니다. 이 얄팍한 믿음은 변사자가 떠난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예술가가 남긴 작품을 두고두고 보전하며 기리는 마음이 예술가를 향한 새로운 해석에 기인하듯이.
176 바람에 흔들려야만 씨를 뿌릴 수 있는 민들레처럼 강력한 태풍이 지나가면 낙원이 펼쳐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