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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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래서 좋다. 우리가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서. 끈적임 없이 산뜻하게 이 사랑을 말할 수 있어서. 너무 크고, 너무 중요하고, 너무 대단한 것들이 나를 무겁게 짓누를 때면 마음 속으로 “잠깐 타임!”을 외치고 재빨리 아이스크림에게로 도망친다. 아이스크림은 내가 가진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서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그러면서도 절대 생색내는 법이 없다.
차갑게 신선해진 나는 다시 뜨거운 것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떠난다. 뜨겁게 일하고, 뜨겁게 화내고, 뜨겁게 아프고, 뜨겁게 즐겁다가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어지면 돌아와 와작와작 깨물어 먹을 것이다. 죠스바를, 캔디바를, 수박바를, 비비빅을.
18 술에 취하면 사람들은 너무 쉽게,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다. 예의와 체면, 자제력과 인내심, 비밀과 기억 같은 것들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바로 그런 것들이라는 사실을 취객들은 매일 새롭게 가르쳐주었다.
40 메로나의 가장 멋진 점은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준비한 신제품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해서,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새로운 도전을 한다. 몸집이 크다고 넘어지는 게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오히려 더 아프고 더 창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달리면서, 결코 오리지널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해도 도전 그 자체를 즐기면서. 메로나라는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확장됐을 것이다.
43 한 사람의 취향이 형성되는 과정에 나는 관심이 많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제일 먼저 그의 취향이 궁금해진다. (…) 취향에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때로는 열 마디 말보다 하나의 취향이 그 사람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48 우리가 사랑했던 정다운 것들과 현명하게 멀어지는 방법을 이젠 내가 아빠에게 가르쳐줄 차례인 것 같은데. 그 방법이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빠 역시 때로는 전혀 모르는 것들을 배워야 했겠지. 지금보다 젊고 건강했던 어느날의 아빠가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 위해 애쓰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 그때는 아빠니까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음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63 평범한 삶에서 발을 살짝 삐끗하면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119 ‘만만하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는 ‘부담스럽거나 무서울 것이 없어 대하기 쉽다.’는 뜻 말고도 한 가지 뜻이 더 있다. ‘연하고 보드랍다.’ 나는 이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내가 사랑하는 소프트콘과 꼭 어울리는 느낌이라서. 누군가를 기다릴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맥도날드를 찾는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행복이 바로 거기에 있다.
128 언니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하겐다즈는 여전히 사치스러운 아이스크림이다. 로또에 당첨돼야 비로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큰맘 먹고 집어들었다가도 이 돈이면 김밥 한 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마실 수 있는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슬그머니 내려놓게 되는. 그래도 아주 가끔은, 열 번 중에 한 번은 눈을 딱 감고 하겐다즈를 산다. 그런 날의 내게 필요한 건 김밥이나 아메리카노가 아닌 작은 사치다. 아찔하게 달콤한 그 한 컵을 비우고 나면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다. 다즈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담담하고 무심하게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143 나는 소포모어 징크스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 마음은 아마도 의심일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 내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 내가 이룬 성과에 대한 의심, 나의 노력과 의지에 대한 의심, 다음 기회에 대한 의심… 의심에는 끝이 없어서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다른 것들도 줄줄이 무너진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손을 떼도 이미 늦었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봤다. 다 무너질 때까지. 더 좋은 방법도 있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빠삐코 딸기를 닮은 것들을. 시즌 1보다 시즌 2가 더 재미있는 드라마, 타이틀곡보다 좋은 후속곡, 대표 메뉴보다 맛있는 신메뉴. 그런 것들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조금씩 회복하고 싶었다.
144 아직 작고 어려서 무럭무럭 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믿기만 한다면… 그 믿음을 손에 꼭 쥐고 계속하기만 한다면…
151 누군가의 최선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한 것 같다. 모두가 돌아서도 끝까지 응원할 용기를 주니까. 가능성은 숨은그림찾기의 아주 작고 희미한 그림 같아서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느 존재를 자꾸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가장 멋진 모습을 발견하면 그 장면이 흐릿해지기 전에 마음속 깊이 새겨놓는다. 그게 나 자신일 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때도. 형편없이 눅눅해질 미래의 어떤 날에도 우리의 최선은 거기 남아 변함없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최선을 안다. 오래오래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누구보다 밝게 빛났던 순간을 안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천하무적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게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만은 끝까지 나를 놓지 않을 테니까. 눅눅한 내가 못 견디게 싫다가도 아주 미워하지는 못할 테니까.
이 마음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몇 번을 얼었다 녹아도 다시 처음처럼 바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