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타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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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육체의 무게에 붙은 이름은 나를 잠깐은 편하게 해줬지만 그에 더해 그 이름에 의지하고 매달리게도 했다. 최애를 응원할 때만 이 무게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18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 말을 듣는 기분이었고, 나는 무언가를 깨뜨린 것 같았다. 예전부터 무심히 귓전으로 듣던 단어의 나열이 새롭게 배치됐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네버랜드에 가자. 코끝이 찡했다. 나를 위한 말 같았다. 공명한 목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년의 발그스름한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목에서도 같은 말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말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무게를 짊어지고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롭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누군가가 힘주어 말해준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떠안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작은 몸을 매개 삼아 아른거렸다. 나는 그와 연결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23 아이돌을 좋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서 최애의 모든 행동을 믿고 떠받드는 사람도 있고 옳고 그름을 구분 못 하면 팬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최애를 연애 감정으로 좋아해서 작품에는 흥미 없는 사람, 그런 감정은 없지만 최애에게 댓글을 보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사람, 반대로 작품만 좋아하고 스캔들 따위엔 전혀 관심 없는 사람, 돈 쓰는 데 집중하는 사람, 팬끼리 소통하는 걸 즐기는 사람.
내 방식은 작품도 사람도 통째로 꾸준히 해석하는 것이다. 최애가 보는 세계를 보고 싶었다.
26 “죄송, 죄송합니다. (웃음) 아니, 그러니까 가사를 쓰는 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누구 한 사람쯤은 알아줄지도 모르니까, 뭔가 간파해줄지도 모르니까요. 안 그러면 못 버텨요, 무대에 서는 거요.”
28 내가 아는 한 최애는 얌전한 사람은 아니다. 자기만의 성역이 있어서 누가 침범하면 화를 낸다. 그래도 이글거리는 감정을 눈동자 속에 붙들어 놓지 실제로 거칠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잊지 않고, 잊지도 못한다.
34 바보 같은 질문이다.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존재 자체를 좋아하면 얼굴, 춤, 노래, 말투, 성격, 몸놀림, 최애와 연관된 모든 것이 좋아진다. ‘중이 미우면 승복도 밉다’라는 말의 반대다. 중을 좋아하면 중이 입은 승복의 터진 실밥까지 사랑스럽다. 그런 거다.
40 나이도 학교도 사는 지역도 모두 다르지만, 그는 물론이고 최애와 마자마좌 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들 이어졌다.
69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83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괴롭기도 하다.
90 지켜주고 싶고 애틋해지는 ‘귀여움’은 최강이어서, 최애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되더라도 그것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98 달래며 말리니까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최애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괴로움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117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 최애의 약동하는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필사적으로 쫓으려고 춤추는 내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외쳐, 외쳐, 최애가 온몸으로 말을 건다. 나는 외친다. 소용돌이치던 무언가가 갑자기 풀려나 주변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성가신 내 목숨의 무게를 통째로 짓뭉개려는 것처럼 외친다.
120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난 뒤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최애를 파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다. 최애 없는 인생은 여생일 뿐이다.
131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내가 엉망진창을 만들고 싶었다.
136 아카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걸고 최애를 사랑한다. 최애 자체보다도 최애를 사랑하는 것이 아카리의 척추, 아카리의 중심이자 본질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