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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2024-11-18 저자: 김현미 출판사: 봄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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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런 이들에게 조금 더 확실한 삶과 자족의 근거는 무엇일까? 괜찮은 일과 일터다. 임금노동이. 일이 정말 중요해졌다. (…) 계속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혹은 일이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존재하는가가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이들의 존재감을 구성한다.

20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구성하는 일터의 여성들은 생산, 소비, 여가의 방식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해서 일터의 성 평등과 사회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내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사회 변화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분명 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일, 자아, 윤리, 젠더, 섹슈얼리티의 긴장과 각축을 견디고 해결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일터를 합리적이고 공정한 장소로 만들면서 젠더 정의를 모색하는 여성들의 출현을 고대하며 이 책을 썼다.

21 일터는 특정 기업과 대표자의 사유지가 아닌 가치와 지향이 공유, 전수되어야 할 공론장이다. 자아를 버리고 포기하는 곳이 아닌 개인의 지향, 의지, 행위자성, 인권이 인정되어야 하는 곳이다.

1부 우리의 곤경에 대하여

1장 취업 문턱에서

45 이 같은 현상은 분명 사회 구조적 성차별과 여성에게 턱없이 기회가 적은 현실에 원인이 있다. 그리고 이때 집안의 투자와 기대, 사회로 가는 좁은 문 사이에서 여성 청년들은 ‘마음의 보수화’를 겪는다. 이들은 뿌리 박힌 사회적 불평등은 개인이 개선하기 어려우니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동원하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공정이라 인식한다. 이 과정은 청년 세대가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찬호의 지적에 따르면 이들의 능력주의는 기회와 결과의 평등이나 정의 같은 가치를 압도하고 있으며, 자기 계발을 지속하면서 타인에 대한 기준 또한 엄격해지는 모순에 빠졌다.

2장 정규직의 주변부에서

59 일터에서 소외되는 현실은 상흔을 남긴다. 자신의 노동이 가져올 최종 결과를 알지 못하고 계속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자신의 일에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62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이 점점 없어진다고 느끼면서 이들은 일단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동시에 자기계발과 이동을 위한 투자를 계속해야만 하기 때문에 노동에 헌신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고비용 삶의 구조 속에서 ‘적자 인생’을 살게 된다.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황이 청년 여성들의 삶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성 불평등과 계급 불평등은 이렇게 교차한다.

3장 내가 될 수 없는 나의 일터에서

74 일터의 기준이나 규범을 바꾸지 않은 채 이뤄지는 여성들의 ‘끼어들기’나 ‘명예 남성 되기’ 전략은 일터에서 성 평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왜 일터가 부당한 차별을 지속시키는 공간인가를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80 무엇보다 일과 삶의 균형은 여성 개인의 균형 감각 유지라는 젠더 수행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1 일터의 성 평등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몇몇 여성이 ‘어떻게 성공했느냐’가 아닌, 왜 여성이 일터에 오래 남을 수 없는가를 집요하게 물으며 답을 찾아야 한다.

83 맥로비는 이런 완벽한 여성성에 대한 추구가 실제로 일터의 젠더 위계에 도전하고 남성들과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것을 피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노력을 통해 젠더 억압이라는 고질적 불평등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노력과 경쟁을 통해 완벽한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신념만큼이나 현대의 일하는 여성들은 일터에서의 좌절과 실패에 대해 개인이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부당한 대우에 화를 내는 것조차 여성의 ‘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분노하는 대신 감정의 항상성을 유지하기를 그리고 앞으로 더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물론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실제로 이 여성들은 ‘남성’으로 설정된 완벽한 노동자상에 당신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매일 받으며 일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기대에 시달린다.

84 완벽주의자 자아에 도달하고자 여성들은 많은 것을 희생하지만, 이 도달할 수 없는 환상과의 불가피한 만남은 여성을 우울증으로 이끈다. 게다가 이 같은 이상은 성별 권력의 존재와 구조적 불평등을 가린 채 젠더 차이를 배제한 채 구성된 ‘냉정한 객관적 지표’에 매달리게끔 한다. 이들은 반페미니즘적 정서가 평가 시스템을 구성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일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여긴다. 이 같은 일터에서 여성들은 파편화되고, 감정적으로 위선적이 되며, 더 우울하고, 덜 투명해진다.

2부 우리의 동료 남성들에 대하여

4장 남성 연대의 게임 규칙

5장 회색 지대의 남성 동료

118 문제는 동료 여성들의 커리어를 장기적인 전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급자 자신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여성들과 협업하지만 으레 여성들을 오래 활용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고성취주의자인 많은 관리자가 여성들의 능력은 시간적 한계가 있다고 믿는다. 여성들은 결혼, 육아, 번아웃, 건강 악화로 일을 그만두거나 예전만큼 많이 할 수 없게 된다고 상정하며 때문에 사람이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데 필요한 휴식, 승진, 훈련, 교육 등을 제공하는 노력을 상대적으로 투여하지 않는다. 이는 능력주의 성차별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성차별을 보여준다.

123 대부분의 남성 직장인처럼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상사를 고발하면서까지 불의에 대항해 싸우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여성의 용기 뒤에 거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성폭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일을 빼앗고, 무력화시키는지에 대한 앎이 결코 없는 남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이해하는 동료가 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고 느껴진다. 비슷한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싸움을 결심한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한 번도 와닿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127 일터에서 함께 많은 시간을 나누고, 서로의 일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경험을 갖게 되면 동료애가 생긴다.

133 다양한 성적 괴롭힘이 실재하는 일터에서 ‘나는 하지 않는다’를 넘어, ‘조직에 이런 일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고 행동하는 조력자들이 필요하다. 을의 연대가 가능한 남성 동료는 늘어나고 있는가?

136 점차 결혼이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되고 전통적 성 역할을 거부하는 비혼 인구가 급증하는 현대에는 사회인들이 결혼 관계에 진입하지 않은 채 친밀성을 나누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상호 인정, 정직, 평등, 상호 쾌락, 자부심, 행복이 개개인에게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다. 일터에도 이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되어야 하고 동료간 관계의 질도 변화해야 한다.

136 여성들 사이에서 점차 생존을 위한 능력주의가 강화되는 한편 남성들은 자기 연민적 피해자 정서에 자아를 투척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누군가에게만 할당되어 마땅한 권리는 없다. 평등과 정의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며 공유되어야만 그 가치가 확장된다. 동료 관계 역시 성별 등으로 위계를 짓기보다 서로가 잘 살아내도록 돕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일터의 민주화는 각성한 개인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3부 우리의 감정노동과 서글픈 오해에 대하여

6장 액팅: 감정 연기 전문

149 현대의 일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전이할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조직 내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된다.

153 젊은 여성이 무뚝뚝하거나 감정 표현이 적은 경우 이는 해고 사유가 된다. 이들은 자신의 낮은 위치에서 “성평등이나 공정함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다”고 느낀다. 이들의 타협점은 ‘노동력 판매자로서의 자신’과 일터밖 ‘조금 더 진실한 나’의 간격을 인정하는 것이다. 일터에서 과장된 친밀성을 발휘하는 인격과 진짜 자신 사이에 단절을 선언하면서 무감한 사회인 자아를 체화하는 것이다.

7장 쇼잉: 유능하지만 무해하게

157 여성들의 성과는 늘 저평가된다. 때문에 조직에서 보통 정도로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눈에 띄는 고성과자가 되어야 한다.

166 실상은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말투를 지니며 누구와 어떤 관계에서 어떤 대화를 하느냐에 어조가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강력한 편견이 존재하는 것이다.

169 해당 연구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여성들이 광범위한 담론 전략에 능숙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여성들이 자신의 전문가적 정체성에 안전함을 느끼게 되면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거나, 그렇다고 마치 성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를 굳이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여자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처럼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얘기다. 어떤 ‘여성성’을 억제하거나 과잉으로 재현할 필요가 없어진다.

8장 일하는 여성의 네트워킹

174 이런 면에서 특히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끼리 친밀감을 구성하는 일은 안전한 느낌과 소속감을 준다. 현대의 일터에서는 오래 함께 일하는 동료가 부재하고 갈등이 잦다. 서로 업무 신뢰를 쌓을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다. 불안정한 지위의 여성들이 빠르게 안전한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것은 생존과 커리어 개발에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늘 평가 당하는 것 같은” 불안을 겪는 이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인싸 공동체’는 인정의 부재를 서로의 격려나 칭찬으로 상쇄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위계 없는 동료의 존재는 상사나 업무 상대자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자신이 당한 부당함을 객관화시켜줄 수 있다.

178 이런 그룹에 속하는 일은 여흥이라기보다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며, 각 일터에서 개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정성을 공동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다.

183 이들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특정 정서를 공유하는 동료 그룹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 안에서 공론화되는 문제들에 적극 동의하고 해석을 달아주면서 이것을 ‘우리’의 문제로 확산시키는 것도 이들이다. 사내 소규모 친목 그룹이라는 배타성을 어떻게 극복해가면서 조직의 차별과 싸울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9장 멘토의 조건

199-200 관리직 여성들이 느끼는 가치위협은 “조직 내 지위와 사회적 지위가 불일치하는 여성이 관리자로서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때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때 위협에는 집합위협, 편애위협, 경쟁위협이 있다. 집합위협은 업무능력에 대한 저평가, 성별·인종 고정관념 등과 같은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성 관리자인 자신에게 반영될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편애위협은 인구학적으로 자신과 유사한 사람에 대한 지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편애로 보일까 봐 느끼는 두려움이다. 경쟁위협은 다른 후보가 자신을 능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 예컨대 경쟁자 여성에 비해 자신이 자격이 덜 갖춰진 것처럼 비춰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성차별적인 조직에서 소수의 여성 관리자로 승진한 여성들이 느끼는 이런 두려움과 위협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오히려 여성 동료나 하급자에 대한 차별을 재생산하거나, 공정한 판단조차 편애로 비춰질까 염려하게 만든다. 또한 여성 관리자로서 자신의 능력이나 역할을 판단할 때 여성임이 부각되거나 후배 여성에 대한 저평가가 자신에게도 반영될까 봐 거리두기 감정을 갖게 된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여성 하급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의사 결정을 하는 자리에 오른 여성들 또한 성차별적인 조직에서 사회화되면서 여성의 능력이나 역할에 대한 편견을 내재했으며 이런 편견이 관리자인 자신에게 반영될까 봐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더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201 사다리는 기어서 올라간 나와 같은 40-60대 여성과 사다리를 걷어찬 내 제자와 같은 20-30대 여성은 서로를 보면서 상호 불안을 갖는다. 우리의 공통점은 매우 삐걱거리는 사다리 앞에 섰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언제 사다리가 엎어질지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럽게 기어서 올라갔고, 다른 누군가는 사다리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다 그리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203 후배 여성들이 원하는 건 남성 연대와 싸워 그런 관행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

205 그런 하루씨의 멘토는 이 분야의 여성으로, “내가 현재 뛰고 있는 경기장보다 더 큰 경기장에 나간 그의 경험을 들려주는 사람”이다. 즉 여성이 ‘근접 가능한’ 미래에 존재하되 여성들이 처한 어려움과 그들의 가능성을 동시에 인지하여 해법을 확장해주는 선배, 그 경험을 솔직하게 공유해주는 선배가 멘토가 된다.

205 연결되고자 하는 여성들의 열망은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협력자로서 서로를 바라볼 때 정치적 힘으로 발현될 수 있다. 일터는 여성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먹고, 대화하며 서로의 자아를 투영하고 도전하는 공적 장소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로서 존재하는 여성 동료들의 조건에 대해 맥락적인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며, 그 차이들을 언어화하고, 공동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4부 우리는 계속 일할 수 있을까

10장 젠더 장벽

221 여성이 고위직으로 진입했다는 것 자체가 여성 성공의 징표가 될 수는 없다. 소수 고위직 여성의 빠른 추락은 그것을 막아낼 안전장치가 없고, 그 추락이 의도되었다는 점에서 구조적 성차별의 한 형태다.

228 여성들은 일을 많이 하지만 평가 체계에 따라 불이익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소위 ‘딜버트의 법칙’이라는 역설이 일어난다. 이는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오지 않지만 또한 가장 적은 타격을 입히는 무능력한 남성들이 가장 먼저 승진하고 성공하는 역설이다. 조직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주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들은 마치 가사 노동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띄지 않다가 ‘하지 않을 때’ 가장 빨리 가시화되어 부정적 평가를 받기 쉬운 직무에 배치된다. 이런 직무는 조직을 돌아가게 하는 필수 요건임에도 가치 절하되고, 이 같은 직무에서 분투하는 여성들은 종종 “일을 잘하는데 리더십이 떨어진다”와 같은 관습화된 평가에 부딪힌다.

231 그들은 노동 강도가 센 일을 척척 해내더라도 ‘너는 회사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233 종종 여성들에게 능력이라는 개념은 ‘어떤 상황에서도 준비된’ ‘비난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같은 개념으로 번역된다. 결국 능력은 ‘자기 완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실행된다. 남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맥, 영향력, 보상 개념과 연결하는 경향과 대조적이다. 여성들이 집착하는 능력 개념 자체가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능력 개념 안에는 사회나 조직에서 기대되는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수록 어떤 점에서는 여성성에 대한 기대를 재생산하고 높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여성들은 젠더를 초월하여 개인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위험 관리를 통한 능력 개념은 이들을 ‘재여성화’시키고 있다. 여성들이 능력주의가 전통적 성차별을 상쇄할 것이라 믿을수록 전통적인 통제 규칙을 내면화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성들이 능력주의를 유일한 평가 체제로 받아들이게 되면, 주변인과 동료를 그 잣대 즉 학벌이나 직업으로 위계화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는 비교, 질투, 나르시시즘과 자기 경멸로 이어지고 불안감을 증폭한다.

233 신자유주의가 옹호하는 능력 개념은 현재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보다는 끊임없이 이들을 소진시키고 불안을 키우는 데 기여한다.

235 직업 이동이 빈번한 노동 유연화 시대에 대부분의 직업 획득과 이동이 평판과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때 여성들은 다른 좋은 직장에 추천해줄 만한 자원으로서 호의와 보살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능력이 있는 여성은 조직에 ‘순응’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동료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이 작동한다.

11장 경력단절

239 그들의 일에 대한 의지는 ‘좋은 엄마’ 각본, 무책임한 공동양육자인 배우자, 사회적 돌봄의 부재 등으로 자주 흔들린다.

240 일하는 여성의 수가 급증했지만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기대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밀해지고 전문화되었다.

12장 일자리를 만드는 여성들

13장 여성들은 저항하지 않는가?

272 동화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의 일부를 숨기거나 드러내지 않는 방법으로 통과되기 passing와 덮기 covering 부터, 차별적 규범을 옹호하거나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여성의 일터 내 권리와 다양성을 옹호하는 <인허사이트>의 기자 카라 허토는 동화를 “여성, LGBTQ+, 유색인종, 장애인 등 소수자와 소외된 구성원이 지배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외모, 행동, 생각 등이 지배 집단에 일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소수자들은 남성 중심적 일터에서 그들이 ‘구별되는 존재’임을 안다. 자신이 조직의 일상 문화에 낯설어하거나, 놀라거나, 소속되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괴롭기 때문에 이들은 적극적으로 동화를 바라게 되기도 한다. 성, 나이, 국적, 지역, 신체 조건 등에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은 그 차이가 부정적인 표식으로 회자되기 때문에, 스스로 무뎌져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이런 점에서 동화는 외부의 강압이나 명시적 요청 없이도 조직 내 소수자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276 여성은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는가?

278 떠나온 곳에서 ‘얻은 것’이 있다고 여기고 이 모든 과정을 성장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이들은 모욕감을 떨쳐낸다.

282 그런데 여기서 이들이 성공을 위한 싸움을 ‘자신과의 경쟁’으로 서사화하는 이유는 과도하게 경쟁적인 여성으로 보이는 데서 오는 위험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여성들이 다른 사람 즉 외부와 경쟁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그들의 경력에 ‘위험’하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완벽해지고자 오직 그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타인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여성들이 조직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 취한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들은 경쟁적인 여성이라는 부정적 낙인을 피하는 동시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고자 한다. 많은 여성이 타인과의 경쟁을 갈등과 난관으로 인식하며 이때의 감정적 소모가 목표 달서에 방해가 된다고 느낀다. 반면 자신과의 경쟁은 스스로 설정한 목표에 매진하여 인정을 구할 수도 있는 긍정적인 일로 인식한다.

290-291 왜 일터에서 변화를 위한 실천과 저항이 일어나기 힘든가? 뜻이 있어도 실행하기 어려운 이유는 남성 중심 조직의 가치관과 관습에 ‘동화’되는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가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고 개인적 해법에 골몰하도록 개개인을 추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302 일터는 우리의 자아, 때로는 페미니스트 자아와 분리될 수 없다. 일터는 우리가 세상에 어떤 존재로 머무르고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고 느끼고 살고 싶은지를 이해하는데 영향을 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에서 아마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를 일터에서 우리의 페미니스트 자아도 발현되어야 한다. 발현의 순간은 더 높은 직위나 성공을 거머쥐었을 때 따라오는 트로피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은 언제나 현재적, 일상적이다. 그 순간은 부정의를 간파하는 사람들 간의 순간적이며 열정적인 협력에서 나온다. 역사가 증명하듯, 대안과 해방을 늘 ‘주변부’의 경험과 목소리에서 나온다. 현대 전문직·사무직 일터의 여성들은 목소리를 박탈당한 완벽한 피해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능력을 통해 안정된 지위에 도달한 인간도 아니다. 그 경계와 노정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로서, 그 과정에 놓인 무수한 해방의 가능성을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존재다. 여기서 일터의 페미니즘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303페미니즘은 페미니즘 내부의 이질적이고 낯선 목소리를 수용하고 반박함으로써, 성찰적이며 확장적인 생산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정치운동의 역사가 그렇듯이, 페미니즘 또한 필연적으로 갈등을 통해 새 장을 열어간다. 일터의 페미니즘은 현재이며 도래할 미래이다.